하 아레츠 땅
' 형상과 글' 카페 ( 창세기 1장 연구)
김창호글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 순서는 하늘과 그리고 땅이다.
그런데 2절에서 하늘 이야기에 앞서 땅 이야기를 먼저 서술한다.
에덴 이야기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천지를 말했으면 천(하늘)을 이야기 하고 다음에 지(땅)를 이야기 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2절에서 지(땅)을 먼저 이야기 한다.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구조다.
성경의 모든 언어가 비유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그릴 수 없는 세계를 언어에 담으려기에 그렇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서양의 어느 철인의 말이 옳다.
말은 모두 허무요 말하고 나면 모두 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혀를 사용하여 말하며 산다.
말할 수 없는 세계조차도 말로 말하려 한다. 그러므로 비유가 등장한다.
따라서 비유 언어는 말할 수 없는 세계와 말의 세계의 가교 역할, 사다리 역할을 하기 위힌 고육지책이다.
따라서 성경의 표현들을, 대상을 지시하는 물리적 사물의 대응어로만 새기려 한다면 그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 비유와 상징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땅에 대한 이야기도 동일하다.
땅은 흔히 저기 저 객관으로 있는 지구라는 덩어리를 말함이 아니다.
성경 저자들의 땅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마음의 밭 (아그로스)을 일컬어 땅이라 하고, 이를 일러 세상(코스모스) 마(13:34-35) 이라 한다.
청세기 1장의 창조 문학과 2장의 예덴 문학은 히브리인들의 언어와 사유 속에 면면히 녹아들어 있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의 밑뿌리요 저수지고 무의식의 토대가 된다.
하여, 창세기 1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즉 단지 우주 창조론의 도그마가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히브리 문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 개념을 파악하고
역으로 창세기 1장을 조망하면 의문이 풀린다.
하늘은 마음 너머 마음의 세계 곧 신이 좌정하고 계신 지성소를 일컫는다.
성서의 하늘은 언제나 물리적 하늘이 아니다.
신의 좌소를 일컬어 하늘( 하샤미임)이라 하고, 예수와 바울은 그 하늘을 일컬어 하늘 '지성소'라고 못 박는다.
그러므로 물리적 하늘은 지성소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비유 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 1절에 등장하는 하늘도 물리적 하늘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에서는 너희가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복해서 질문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저 하늘이 아니고
성전에서도 휘장으로 가려져 있다고 표현되는 지성소의 하늘을 일컫는다는 말이다.
이 관점으로 창세기 1장을 읽어가노라면 우주 창조론이 맞느냐 진화론이 맞느냐는 토론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원인 무효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아에레츠 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빛을 받아 싹을 틔우고 경작해야 할 마음의 밭을 일컬어 성경은 땅이라고 한다.
하늘도 마음이요 땅도 마음이란 말이냐?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언뜻 같아 보이나 마음의 세계를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 형용하는 것은
거기 우주의 변용과 유사한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로 포괄할 수 있으나 상세히 나누어 보면 하늘과 땅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다르다.
같기도 하며 같지 않기도 하다.
그것은 추후에 좀 더 소상하게 밝혀지리라 여긴다.
하늘이 저 하늘이 아닌 것처럼 땅도 저 땅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다. 창세기 1장은 주기도문을 성실히 하는 사람의 삶의 예언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창세기 1장을 읽어가면서 이 점을 혼돈하면 곤란하다.
우주창조의 설화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따라서 극단적인 오해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이 기록될 당시 민간에 떠돌고 있는 우주 창조설화가 비유언어로 인용되었을 수는 있다.
우주창조의 신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도리어 우주 창조설화가 우리 내면을 설명함에 있어 유용했기에 창세기 저자는 그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물주가 실제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자.???( 잉? 이 무슨 표현???)
*** ( 저자는 오직 물질적 천지창조가 아닌 관점에서 창세기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에 충실한 표현인 것 같다)
그것은 천문학도나 지구과학도들에게 연구 과제로 중요할지 모른다.
우주 창조설화는 믿는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 그렇게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거나 말거나다.
정원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 대해, 내가 거기 있다고 믿든 믿지 않든 그 나무는 거기에 그렇게 있다.
내가 믿는다는 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는 그렇게 거기 서 있다는 말이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나무를 향해, 나는 저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따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정신이 멀쩡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을 보도하는 뉴스가 아니라면, 어떤 사건이나 상황 혹은 개념이 비유로 차용될 때, 객관적 사실의 엄격성이 문제되지 않는다.
화자가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 픽션이면 어떻고 논픽션이면 어떻단 말인가.
비유에 인용된 사건의 객관적 진실 여부는 매우 부차적인 것이다.
글쓴이의 본질과는 상관없다.
문학은 언제나 상상과 허구를 통해 인간의 더 깊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히브리인들의 창조 문학은 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무한한 상징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경전을 앞에 두고 그 객관적 사실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쩌면 다수의 신학적 논쟁은 많은 경우 그 같은 데 치우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이 어디까지가 실제 삶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가공된 이야기인가를 토론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냐. 문학평론가들이 그 사실 여부를 논쟁한다면 난센스인 것처럼
성경을 놓고 그 같은 논쟁은 흔하게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아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고등비평의 문서설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당대에는 심각한 시대적 논쟁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 바라보면 그것은 낡은 구시대의 신학적 산물일 뿐이다.
왜 혼돈일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창 1:2)
창세기 1장은 '하샤마임'과 '하이레츠'의 이야기다. 하늘과 땅의 이야기가 그 전부다.
성경 전체 역시 하늘과 땅 이야기로 압축 요약할 수 있다.
불가에 곽암 선사가 표현한 '10우도'라는 것이 있다. 십우도는 구도의 길을 소의 그림을 통해 10단계로 표현한다.
정신세계의 순례도를 명쾌하게 압축한 선화다. 그림과 더불어 간결한 시를 덧붙인 것 또한 유명하다.
어떤 이는 심우도라 칭하기도 한다.
불가에 십우도가 있다면 성경에는 7일 창조가 있다.
창세기 1장의 성격을 이 한마디에 담고 싶고 성격 규정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의 파노라마와 대 서사는 마음의 세계를 창조해 가는 신령한 영성의 7일 창조 순례기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 전체를 조망하는 나의 기본적인 컨셉(?)이다.
창 1장1절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 성서다. 나머지 창세기 1장은 1절에 대한 주석이다.
기타 다른 이야기는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수많은 버전이다.
신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의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다.
사람다운 사람을 일컬어 예나 지금이나 거룩하다고 칭하고 누구나 그를 지향해 서 있다.
육체는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정신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게 모든 육체를 입고 태어난 인생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성서의 근거라도 있는가.
예레미야의 표현을 인용해 보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 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 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 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 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 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 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였음이로다(렘 4:19 - 28)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슬픈 노래다.
여기 유다의 상태를 일컫는 표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창세기 1장 2절을 동어반복하고 있다. 표현에 살이 조금 더 붙어 있을 뿐이다.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산, 작은 산, 공중의 새, 하늘이 흑암하다는 표현들!
창세기 1장 2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를 표절이라고 질타할 것인가?
아니면 우주 창조 설화를 제멋대로 잘못 인용하고 있다고 예레미야를 꾸짖기라도 할텐가?
오늘 보면 창세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확하다.
창조설화에서 말하는 지구 창조시 땅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의식의 세계가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창조'라는 말은 인간의 정신을 빚어가는 것과 연관이 있는 개념이다.
이는 성경 기록자들의 한결같은 기본 설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는 이들이 오염된 시각으로
성경 읽기를 계속해 왔다. 통탄할 일이다.
기독교의 신학은 경전해석을 독점 판매하고 오도된 정신의 독극물을 유포시킨 것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 웅대한 거대 조직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창세기 1장 2절은 하늘과 땅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심전이 원시 상태라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왜 그럴까 왜 그럴 수밖에 없고 의식의 기원이 어떻게 진행되기에 그럴까?
초기 의식은 그 기원이 자기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고 타자로부터 비롯되어서 그렇다.
타자로부터 비롯된 의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의식으로 다시 세팅되어야 한다.
이 점은 불가피하다. 의식의 세계는 누구나 예외 없이 그렇게 구조화되었다.
타자로부터 독립해서 자기 기원의 의식이 창조되어야 비로소 인간의 의식은 존재를 획득하는 것이고
'나'가 '나'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타자로 인해 비롯된 의식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서술될 수 없다.
타자로 비롯된 의식이 부정되고 새로 시작된 의식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개벽이라 칭한다.
거듭 태어남이라고도 한다. 모든 순례의 길은 이 도상에서 이야기다.
타자로 비롯된 의식 곧 나(I)가 신으로 묘사된 그(He)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He is I) 다.
여기서 HE는 성서에서 엘로힘이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될 때의 나(I)는 비로서 야웨 엘로힘이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다가 십자가 형틀에서 죽임을 당한다.
참으로 참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너무 몰라서다.
비록 육체는 죽임을 당하나 그 의식과 정신은 비로소 존재의 그( He = I)로 우뚝 서게 된다.
창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땅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다.
그 의식이 타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나는 없고 내 의식의 집에 수없이 많은 타자가 복제되어 있다는 자각이
시작되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라는 말이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데, 거기 복제되어 있는 수많은 나도 여전히 내가 아니라는, 타자로 비롯된 나의 정체가 탄로나면서 공허와 혼돈과 흑암의 깊은 격랑이 시작된다는 것,
대개 1장 2절은 세 개의 문장이 병렬 구조를 이루고 있다.
땅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요, 하늘의 상태는 흑암의 깊음이다. '흑암이 깊다'는 뜻은 빛이 없다는 의미다.
예례미야의 노래를 살펴보면,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
위의 하늘이 흑암 할 것이라( 렘 4: 19 - 28) 하지 않는가.
- 혼돈(토우)이란?
땅이 혼돈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혼돈이란 without form 이요, formless 다. 즉,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꼴이 없음이다.
무엇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일까?. 성전은 저 밖에 있고 삼일만에 세우겠다는 성전이 아직 다시
꼴을 갖추지 못하게 되니(집이 없으니) 길없는 광야에서 유리하게 된다. 혼돈이다(시 107: 4)
혼돈하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시냇가를 걷다가 사막으로 가서 죽는다.
혼돈하면 총명을 잃고 거친 들로 유리한다.
빛이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되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된다.( 욥12: 25)
예수는 이르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다.
길을 잃어버린 인생들이 저마다 유리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 참으로 혼돈 아닌가.
성전은 복마전이 되어 자신의 꼴을 갖추지 못하고 타자가 들끓고 있는 것,
온통 타자를 복제하여 타자의 마당이 되어 있다는 것, 혼돈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거짓 자아에 농락당하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혼돈이다.
아직 자기 자신을 세우지 못함이고 자기 꼴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formless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진리가 진리를 말하고 사랑이 사랑을 말한다. 거짓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혼돈이며
진리 아닌 것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 토후(i)다. 토후는 아울러 무가치한 것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황폐한 땅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타자를 복제해 놓고 타자를 자신으로 여기며 그가 진리를 말한다면, 진리일까? 아니 혼돈이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진언을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것이 혼돈이다.
거기서 예수는 손가락이다.
그가 가리키는 달은 누구나에게 있는 타자로 복제된 자기가 아니라,
비로소 자기로부터 유래한 의식의 '나'를 가리키고 있다.
내가 길이라고 할 때의 '나'는 지성소의 지밀한 곳에 있는 그다.
그가 아버지요, 그와 나는 하나라고 예수는 일컫는다.
곧 그가 나라고 선언하고, 그 '나'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여 그는(he)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는 곧 나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의 참 의미다.
하여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he)를 보았거늘 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따라서 나 아닌 나, 타자가 복제되어 나로 둔갑해 있는 나가 진리 운운하는 것이 혼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돈'이란 곧 타자 자아가 판을 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도 어쩔 수 없는 상태라 하겠다.
혼돈이 혼돈으로 비로소 다가오는 것, 거기에 새로운 토대가 마련된다.
비로소 손가락이 아닌 달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따라서 혼돈은 새로운 길의 입구요, 가능성이기도 하다.
전기의 베드로는 그 자신이 '아가파오'였다. 예수는 베드로의 혼돈을 교정해 주신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란다. 그것은 닭 울기 전에 부인할 수밖에 없는 네 목숨이지 어찌 그것이 사랑일까 보냐.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 그것이 베드로의 혼돈이었다.
'필로'는 '필로'고 '아가파오'는 '아갚오'다. (요 21장 참고)
'필로'를 가지고 새 계명, 곧 '아가파오'인 줄 아는 것, 그것이 혼돈이며 유리하는 자다. 길을 잃은 자다.
광야에서 비틀거리며 더듬는 인생이 아닌가. 혼돈은 허망한 것을 의뢰함이요,
없어질 것을 참으로 여겨 붙잡고 사는 인생을 말한다. 헛된 수고요 공연히 힘들이는 것,
그것이 혼돈에서 비롯된다.
괜히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혼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혼돈이란 인식의 혼돈을 일컫는다.
혼돈은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을 갖는 자에게 합당한 표현이다.
물질이나 대상은 혼돈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인식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합당한 언어다.
따라서 땅이 혼돈하다는 창세기의 선포는 마음 땅의 혼돈이며, 인식의 혼돈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
오성(悟性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 )은 인식원리 중 하나다. 오성은 만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척도다.
오성은 서로를 분별하고 구분하며 규정짓고 판단한다.
오성은 스스로의 지혜를 발휘하여 종교와 도덕과 윤리와 문화를 창출한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판단에 근거하여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오성의 능력이다.
오성이란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본디 오성과 이성은 개념의 차이가 있다.
아니, 근원적인 차이가 있으나 오늘날 유사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성리학(性理學)에서의 성리(性理)는 심성론과 맞닿아 있어서, 우주 운행의 이치와 심성의 이치를 동일하게 파악하려 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사단을 심성론으로, 성리(性理)로, 이성(理性)으로 파악하려 한다.
서양에서도 오성과 이성을 구분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오성론인 셈이다. 칸트는 이치를 논하는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분한다.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오성이라면
이성은 오성과 상관없이
거기 그렇게 돌아가는 사물과 우주의 이치에 일치하려는 심성과 그에 따르는 정신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절대 이성은 곧 절대 정신이다.
성리학의 심성론에서는 사단(四端)을 일컫는다. 리와 기에서 리성(理性)과 기성(氣性)을 나눈다.
**(사단: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 선설을 내세우며 이것을 사단(선을 싹틔우는 4개의 단서, 실마리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 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나누었다.
이때 기성은 칠정(七情)이고 리성(理性)은 사단이다.
따라서 이성적이라고 할 때의 이성은 동물과 다른 특성 곧 사단(四端)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대개 이성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라는 의미로 통하나,
본디 동양에서는 이성적이라는 말은 사단(四端)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라 하겠다.
리(理)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합당하기에 합리성은 리의 원리에 충실하겠다는 말이겠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이라는 말과 그런 점에서 다르다.
즉, 理를 발하는 존재가 사람다운 사람(聖人)이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말이다.
리는 언제나 기를 통해 현현한다. 이를 일러 데오이(god)라 한다.
따라서 옛사람들에게 천법(天法)은 언제나 심법(心法)이다.
하늘의 별은 마음의 별과 상응한다. 그것은 동방의 박사들에게도 그러했고 칸트에게도 그러했다.
물론 칸트는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심법의 도덕률 곧 양심에 상응시키고 있어서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구조는 같다는 말이다.
동양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주역(周易)은 해와 달의 변화. 그에 따른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관찰한다.
이를 마음의 변화 원리에 적용한다. 천법과 심법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론 또한 옛사람들의 방식을 따르자면 심법일 수밖에 없고 심법의 위대한 비유라는 말이겠다.
하여 창세기는 물리 세계의 창조론이 아니라 心性論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성이 홀로 밭에 놓여 있을 때 무슨 일을 하는가. 오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오성의 능력을 어디에서 발휘하는가.
스스로를 감추고 상대에게 자신을 돋보이도록 의복을 지어 입는데 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오성이 이성을 향하지 않고 단지 동물적 욕망을 구현하는데만 발휘된다.
이 세상의 만물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스스로를 남보다 낫게 여기거나 의로운척 하지 않는다.
오성을 갖고 있는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한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인 오성과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오성은 자신을 위선자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타자를 복제하여 오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복제하여 오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복제된 타자의 요구에 따라 오성의 기능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척하는 도구가 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을 항상 염려하여
과대 치장하는 위선의 도구로 사용된다.
땅(인식의 능력)이 혼돈하면 이와 같으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겠는가?라고 장탄식하는 예레미야의 목소리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땅이 혼돈하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하는 데서부터, 다시 말해 혼돈을 인식하는데서부터 하나님의 신(루아흐)은 비로소 수면에 운행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공허(그 보후)는 사물(事物) 곧 대상에 부여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열국 중, 에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을 한다.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여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돈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찔레, 기풀류)이 자라서
시랑(타님 혹은 타닌, 용, 뱀, 바다 괴물, 독사)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34: 10- 13)
에돔을 바라보니 사람은 없고 곧 짐승들만 가득하단다.
당아는 펠리컨 혹은 가마우지로 짐작된다. 성서에서 부정한 새로 지칭된다. 부엉이와 까마귀가 머무는 땅으로 표현된다.
혼란과 줄과 공허의 추를 베풀 것이란다.
인간의 심전이 저와 같은 상태가 공허다.
있어야 할 것은 부재하고 오로지 짐승들만 판을 치는 인생들의 마음의 세계.
물을 저축치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곧 공허다. 공허라는 말은 인생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공허라는 말은 인식의 대상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물을 개념화시켜 공허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감성 곧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개념 중 하나다. 인식 주체인 인간의 감성적 영역을 표현하는 말이다.
거기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 판을 치고 있을 때 인간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가시나무, 엉겅퀴, 시랑과 타조는 타자를 복제한 복제의 상징물이다.
복제할 때, 늘 욕망이 작동하여 고무풍선을 부풀리듯, 상상력을 동원하여 복제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니 타자를 과장하여 자신 안에 복제한다.
복마전에 머무는 타자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입력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르침이고 사회 관습이 주입한 것들이다.
사회가 신화로 만든 셀럽들이나 명사들의 썰이 이상향으로 들어와 있다.
그들의 요구가 머무는 타닌, 리워야단이 무의식에 꽈리를 틀고 있고, 마침내 상상의 동물, 용의 형상을 하고 들어와 있다.
아름다운 미명을 지니고 있으니 리워야단은 용이 아니라 엘로힘이라는 양의 옷을 입고 주인 행세를 한다.
가득차 있으나 공허한 까닭이다.
아무리 구하고 찾아도 구해지지 않고 찾지 못한다.
공허란 시랑의 굴이 되고 있고 타조의 집이 되어 있고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는 황무지가 되 어 있다는 말이겠다.
인간의 심성 한가운데 집주인은 없고 객이 머물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혼돈이기도 하지만, 거기 주인인 '나'가 존재하지 않으니 공허다.
텅빔이 아니라 가득차 있으나 있어야 할 것이 없어 공허다.
모든 것을 갖추고도 자기 자신이 없어 공황장애에 빠지게 된다.
창조설화에서 저 지구를 만들기 전의 땅의 상태가 공허했다는 말은 그러므로 지적정직성(知的正直性)에서만 보아도
모순 아닌가. 닭이 공허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자의 마음이 공허하다고 하지 않는다.
인식주관인 인생들의 감성 영역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언어다.
마땅히 깃들어 있어야 할 것이 깃들지 않고 머물어야 할 것이 머물지 않고 있는 마음의 땅,
거기 짐승들만 판을 치고 있는 것이야말로 텅 빈 공허다.
여기의 공허는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득차 있다.
짐승들로 가득 차 있고 소유로 가득 차 있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가득 차 있음이 도리어 공허가 된 것이다. 비움의 공허가 아니라 채움의 공허인 셈이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
육척 단구의 인간이 갖는 욕망은 무한하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고 솔로몬은 말한다.
그는 은을 사람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다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이가리요
일하는 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뒤척인다고 했다(전 5: 10- 12)
창세기 저자는 땅을 보니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같이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무슨 일을 시작하려는가.
여기 엘로힘은 저 엘로힘이 아니다.
성전, 곧 지성소의 비밀로 있는 신성이 비로소 그 본래의 기운인 신성으로 나래를 펴려는 것이다.
따라서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려는 선행 사건이다.
평화를 노래하는 곳에 불이 던져졌음이다.
동물이 들끓고 있는 땅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사건이 드러나는 때가 곧 시작이다.
심판은 곧 구원을 향한 첫걸음이다.
구원이란 공허의 땅에 타자를 내보내고 존재의 '나'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성서의 독특한 표현이다.
혼돈과 공허는 빛을 영접하기 위한 전조(前兆)다.
흑암(호세크)
흑암이란 무엇인가. 어둡고 캄캄함이다. 땅을 보니 혼돈과 공허하고 하늘을 보니 어둡고 캄캄하다.
하늘이 어둡고 캄캄하니 땅은 더욱 캄캄하고 흑암으로 덮여 있다.
하늘의 빛이 없음은 동시에 땅의 어두움이다.
따라서 흑암은 땅의 상태이기도 하려니와 하늘의 빛이 없음을 말한다.
하늘에 빛이 없으니 당연히 땅도 흑암에 갇힌다.
그러므로 창세기 읽기를 시작한 우리가 분명하게 짚어야 할 대목이 있으니 흑암이라는 것은
하늘의 상태라는 점이고 그것이 땅을 어둡게 한다는 말이다.
근원에서 창조되는 하늘과 땅은 그러므로 그 토대가 2절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하늘이 맑고 땅이 정연하면 근원에서 창조되는 하늘과 땅은 아직 낳을 수 없다.
창조의 때가 아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은 빛이 없음이 다가올 때 비로소 거기에서 창조의 새나래가 펼쳐진다고 하겠다.
빛이 없으니 땅을 뒤덮고 있고 흑암이 바다를 감싸고 있다.
'흑암이 깊음(대양, 깊은 바다)의 얼굴에 있다(알 페네이 테홈, 170 29- 27 7257 명사문장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라는 것이다.
하늘의 어둠을 담고 있는 대양(大洋)을 상상해 보라.
깊은 바다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늘의 어둠, 바다의 표면이 거울이 되어 반사하게 되니 흑암은 증폭되어 두 배로 어둡다.
흑암이 가히 깊다는 하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 할 것이라(렘 4: 23-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출 10: 21- 28)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출14: 20)
하늘이 흑암으로 덮여 있으면 땅은 그 흑암 속에 갇히게 마련이다.
하늘에 빛이 없으면 흑암이 드리워진 대양의 흑암은 어떠하겠는가.
허나 흑암은 없다.
선과 악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고
어둠을 빛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흑암이 아니라, 흑암이 곧 빛이다. 하여 그들에게 흑암은 오지 않는다.
선악이 빛이고 어둠이 빛이기 때문이다. 맘몬이 빛이다.
두 손 흔들며 춤추고 간증 퍼레이드를 펼치는 그들에게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자신의 선만이 선이고, 자신의 구원만이 구원인 그들에게 어둠은 오지 않는다.
그들의 빛이 어둠이라는 사실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것이 혼돈이고,
자기 부재의 공허라는 깊은 자각이 찾아오기 전에는 아르케, 레쉬트 안에서 창조되는 하늘과 땅은 도래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은 히브리 문학에 담겨 있는 창조의 대업을 위한 자궁이고 토대라는 말이다.
창조의 궁극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을 향해 있다.
창조의 알파는 '따라서 어둠을 빛으로 삼고 있는 인생들이 그것이 빛이 아니고 어둠이라는 대오각성과 절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인생의 정신이 타자지배에서 벗어나 존재의 나를 향해 서 있는 실존상황이고 레알이다.
창세기 1장은 자기 존재의 움틈에서 시작하는 독립운동의 대사서요, 독립선언서고
마침내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해방가를 부르기 위한 절기의 노래다.
타자 자아에서 존재 자아를 향한 자기 의식의 탄생과 개현,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의 기록이다.
흑암의 바다, 망망대해 사방은 어둡고 하늘은 별빛 몸을 숨긴다. 별이 있어 별이 아니라,
해 돋으나 해 아니고 달이 그 빛을 잃는다.
검은 구름 채알 드리운 그믐 깊은 밤. 입 벌린 대양의 악어 파도조차 일지 않아 괴괴한데 일엽편주 조각배 위에 그대,
눈 반짝인들 무엇이 보이느뇨. 허무의 바다, 흑암 깊은 곳 문 닫힌 적 없는데,
출구는 어드메뇨.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는 것 또한 동사 문장이다.
이 세 문장은 접속사 '베'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심지(心地)와 심천(心天)에 대한 실존적 묘사인 점이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개벽하여 천지 공사를 하겠다는 것이 창세기 1장이다.
심지(心地)는 혼돈과 공허요, 심천(心天)은 흑암이다.
심지는 혼돈과 공허가 역동적으로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적기술(動的記術),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어서 빛이 차단되고 흑암은 깊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상태의 진술이다.
하늘 곧 심천, 지성소가 열폭 피륙의 휘장으로 두껍게 덮여 잇으니 빛이 어찌 비추겠는가.
휘장이 걷혀야 직관의 통로를 통해서 하늘의 빛이 비춘다.
오성의 판단능력이 땅의 거민이라면 천둥과 번개의 빛이 내려치는 것은 직관을 통해 날아오는 동편 하늘의 천사다.
하늘은 휘장으로 가려 계시가 없어졌고 땅에는 위선을 주인으로 섬기는 오성과 짐승의 욕망만이 판을 치고 있다.
창세기 1장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선지자의 깨침이었다.
어두움은 항상 눈과 관련 짓는다. 마음에도 눈이 달려 있다.
눈은 쏟아지는 햇살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만물을 밝히 볼 수 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 42: 7)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 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 13- 9-10)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두움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겔 32: 7- 8)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영원히 굳게 하소서 (시 69: 23)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애가 5: 17- 18)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 12 -10 nan) 하나님의 신(얼, 루아흐)은 물 위에서 날개짓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웅장한 선시(禪詩)란 말인가.
하나님의 얼은 씨알(함마임, 물, 정액)에 생동하고 있다. 물은 만물, 곧 기식하는 것들의 생명의 원천이다.
히브리 문학에서 물은 종종 '정액'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는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심천과 심지는 저렇듯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여 있다 해도 심연 속에는 하나님의 얼이 물 위로 생동하고 있다는
이같은 표현은 히브리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우리 내면 세계의 물을 개념화하면 말씀이다. 정신을 살게 하는 양식이다.
요한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은 물, 곧 말씀과 함께 계시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바로 이 말씀이 근원 안에(기름부음, 메시야)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신은 심지(心地)의 혼돈과 공허, 심천(心天)의 흑암,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우주 깊은 곳에
물의 약동으로 좌정하고 계신다.
이곳이 어디인가? 하나님의 얼이 어디에 좌정하고 계신가. 그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가.
거기 더 은밀한 곳을 직시하라.
하나님의 신이 좌정하고 계신 것이 보이지 아니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신과의 격절(絶)이다.
그 격절은 동시에 신과의 접점이라고 하는 초광속음이 거기 담겨 들리지 아니한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겠다고 하는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은 물 위에 약동하신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진술은 비로소 실존 인식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창세기 저자의 전언이다.
직선적 진술로 보기보다는 통시적으로 보자.
창세기 1장 전체를 꿰뚫고 기록해가고 있는 창세기 저자의 입장에서 2절을 통찰해 보자.
입체적으로 관조하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는 것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실존적 자각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뜻이요,
하늘에는 빛이 차단되었다는 깊은 장탄식의 자각을 토대로, 석고처럼 죽어 있던 하나님의 신이 부활하는
생명의 역설과 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망으로부터 부활의 열매가 맺힌다.
죽은 자로부터 기름부음 곧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고 맏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가 근본이고 머리요 로쉬트다.
창세기 1장은 바로 그로 시작되는 창조를 일컫는다.
창세기 1장 첫 단어 베레쉬트가 이를 함축하고 있다.
뱁티스트 곧 침례로 상징되고 진술되는 신약의 문체들이 창세기 1장 2절에 선재적으로 고스란히 기술되고 있다.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바로 그렇게 혼돈했고, 거기 그 땅에는 동물들의 욕정이 가득했구나!
하늘의 빛은 부재한 캄캄한 , 어둠인 줄 모른채 오성의 빛이 빛인 줄 알고 날뛰었구나!
그것이 대양에 떨구고 있는 흑암이었다니.
아, 허무의 바다에 깊이 빠져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흑암의 인생이여! 하여 마태는 이런 기록을 남긴다.
만일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며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번역성서들이 이를 왜곡한다.
어둠을 빛으로 여긴다는 뜻을 '빛이 어두우면'으로 오역하지만 ... 그런 뜻이 아니다.
공동번역은 차라리 낫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죄를 자백한다는 뜻은, 정직한 실존 인식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응시 속에서만 빛은, 자각은 시작되는 것이다.
동면에 들었던, 뿌리 아래로 숨어들었던 기운이 물 위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절은 인생의 절망과 희망이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혼돈하지도 않고 공허하지도 않고 흑암이 깊지도 않을 때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지 않는다.
대개의 인생들은 결코 혼돈하지 않다.
요동은 커녕 너무나 견고하고 우뚝 서 있다. 산들 위에 더 높이 좌정하며 뿌리박고 있다.
하샤마임, 하아레츠의 토대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 혼돈과 흑암과 공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일락의 즐거움 때문에 그 끝자락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얻은 것이 도리어 진리를 훼파하고 혼돈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로 드러나지 않는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빛이 비출 수 있는 토대이다.
우리 자신의 실존적 자각의 토대 위에서만 빛은 빛이다.
촛불이 촛불의 역할을 하려면 사방이 어두움일 때 가능하다. 환한 대낮에 촛불을 켜고 이것을 빛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빛이 아니요 빛을 잃은 빛이다.
공허는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 빛이 비추기 위한 창조의 토대다.
거기 동물들이 가득한가. 그것이 보이는가. 그대는 단지 동물로 살아가려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사시라.
그러나 동물들만 가득한 것이 끔찍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사람, 사람이 보고 싶다면,
그것이 미세한 바람 구멍이 되어 그곳으로 바람은 스며든다.
창조는 시작되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베레레쉬트에서만 어둠과 빛이 제대로 드러난다.
레쉬트가 아닌 곳에서는 결코 혼돈이 혼돈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공허가 공허로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정과 욕심의 토대 위에서 모든 것을 비춰보면 그 자리에서는 혼돈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혼돈과 공허를 혼돈이라고 공허라 일컫는 그대는 아직 세상에서 열심히 사시라.
열심히 종교 비즈니스에 충실하라.
거기서는 상대적 공허만이 드러날 뿐이지 여기 2절에서 말하는 절대 존재적 혼돈과 공허의 실존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의 긍극은 무엇일까.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이 깃드는 것, 그것은 채움이며 동시에 비움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문법에서 공허와 안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공허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터진 욕망의 주머니에 대한 실존 인식이됴,
안식은 욕망으로 만들어 놓은 동물의 세계를 털어내고 새로운 우주(생명의 세계)를 채우는 창조의 끝이다.
그것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요, 공허가 아니라 안식이며, 오성의 질서(혼돈)가 아니라 생명의 혼돈(무한질서)이다.
그러므로 여기 비움은 채움이며 채움은 곧 비움이라는 신묘가 있고 생명의 관점에서 볼 때 흔히 사람들이 일컫는 질서는 도리어 혼돈이고 혼돈은 도리어 질서인 것을 알게 된다.
요한이 말하는 대로 그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만물이란 창세기 1장 전부다.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 되는 줄 아는 것, 스스로의 지혜로 이루어진 줄 아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로의 변화가
구원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단지 저기 있는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큰 속임수다. 심지와 심천의 천지개벽 공사를 흐리게 하는 구름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대 안의 만물의 창조에 대한 믿음이 없이 저 밖에 있는 만물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아무리 믿음을 자랑해도 우상을 숭배하는 데는 효험이 있을지 모르지만, 의미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믿거나 말거나이기 때문이다.
마치 내 아들이 나를 보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인 줄 믿어요! 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럴 때 뭐라 반응해야 하는가?
아들아, 참으로 기특하구나 나를 네 아버지로 믿어줘서 참으로 기특하구나 할 것인가?
사도신경의 고백은 그런 점에서도 넌센스라는 말이다.
자신의 내면 세계는 수많은 성공신화를 흠모하는 타자 자아가 틀어쥐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려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이는 하나님 이 자신의 세계 내에 창조해 가는 일을 즐겨 바라본다.
자신의 에고로 기름부음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자기 현현을 훼방하지 않는다. 그것이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메시아는 저 밖에서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