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과 2장,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할까
'형상과 글' 카페 김창호님의 글에서 발췌
창세기 1장 7일 창조의 이야기와
2장 4절부터 전개되는 에덴동산 이야기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같은 질문은 마치 노아의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와 같은 질문이다.
이같은 질문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와 동일한 질문이다.
창세기 독자들은
천지 창조의 창세기 1장과 에덴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편집 되었고
더구나 70인역(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에 히브리어 된 구약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번역 성서)의
장절 분류 방식을 따라서 창세기 1장 이야기가 2장 3절까지 계속되고 있는 터라
2장의 에덴 이야기와 연속된 기사로 보려 한다.
(장절 분류는 오랜 후 인쇄술이 발달한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졌다)
같은 이야기, 창조 기사의 연속된 이야기처럼 착시를 일으키게 장절 분류가 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포함해서 1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개의 번역 성서들이 채택하고 있는 창세기(베레쉬트)2장 4절을
히브리어 성서는 창세기(베레쉬트) 2장1절로 분류한다.
아무튼 창세기 1장과 2장은 노아의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같은 책에 담겨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이듯 동일 기사가 아니다. 아니 서로 다른 기사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노아의 이야기를 통한 영성의 흐름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읽는 영성의 흐름은
하나로 통한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도 동일하다.
창세기 1장에는 7일 창조 이야기 방식이고 제 6일에 인간 창조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덴의 이야기에는 7일 창조의 분류 방식 그리고 그 같은 프레임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인간과 창세기 2장의 등장인물 '아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주 오래된, 지금도 반복되고 앞으로도 계속될 질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인물인가?
성서의 독자들에게 창세기 제 6일에 창조한 그 사람, 곧 인류 최초의 인물인 '아담'인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는 식의 이야기가 끝없이 화자되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질문이라 하겠지만, 웃지 못할 질문이기도 하다.
고유명사 아담 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에덴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보통 명사 아담(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과 2장 이야기는 단언컨데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세가 편집했다고 알려진 모세 오경의 첫 기사로 창세기 1장이 등장하지만,
창세기 1장의 웅장한 문체와 2장의 아기자기한 문체의 서술 방식도 서로가 전혀 다르다.
글쓴이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게 맞는가?
축자 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을 혹여 받아들인다 해도 이야기의 진술 방식이 이렇게 확연하게 드를 수 있는가?
따라서 모세가 편집했을지라도, E문서(엘로힘 문서 창세기 1장)와 J문서(야웨 엘로힘 문서, 창세기 2장 이후부터 일부)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단지 연속해서 편집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원시 복음의 순서를 좇았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은 마침내 제 6일에 자칼라 네케바(남자와 여자)에 대해 창조 이야기가 나오지만,
1절부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1장 1절에 등장하는 천지(하늘과 땅) 창조 이야기부터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비유다.
물리적 세계를 비유로 등장시켜 영성의 창조세계를 단계별로 서술해나간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사람이야기다.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 모두 사람이야기다.
따라서 6일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는 사람도 비유란 말이다.
마침내 사람다운 사람이 비로소 5일 창조의 바탕에서 제 6일에 등장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꼴이 마침내 갖춰진 상태다.
영성 진화의 여섯 번째 단계를 일컫는다.
성서의 전체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같은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나의 주관적 해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이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서술을 인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해석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같은 이해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영성의 시작이고
순례의 초발심 상태에 대한 진술임을 버울 서신이 투명하게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을 일컬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이 생명이며 사람들의 빛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말씀은 오로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개념이다.
빛에 대한 요한복음의 진술만을 보더라도 창세기 1자의 빛이 물리적인 세계의 창조 이야기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물리적인 세계의 창조 설화는 단지 빛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채택되었을 따름이다.
성서의 수많은 곳에서 창세기 1장의 부분 부분이 모두 순례의 여정 임을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는 천지 창조 이야기와 천지의 족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 방식이고 서술이다.
아마도 오래전 중근동에 흩어져있는 이야기들이 영적 가치에 의해 취합되어 모세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추측한다.
거기서부터 창세기 1장과 2장은 각자의 이야기 구조를 띤 채 경전으로 우뚝 자리잡고 있고
오늘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수많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모여 성서를 구성하고 있다.
성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서로 소통된다.
창세기 1장 7일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주식회사,
하나님 나라의 회사 연혁이나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이력서로 읽혀서는 곤란하다.
영성의 발달 단계를 7일 창조라는 대서사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