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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세기 명칭과 에덴 이야기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3. 25. 18:07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 -

 

 

 

에덴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창세기 2장 4절부터다. 창세기라는 책명은 2장 4절 톨도트에서 나온 말이다.

한글로는 대략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제너시스요, 헬라어로는 게네세오스다.

이는 족보요 계보라는 의미며, 족보 혹은 계보는 "낳고 낳고"를 뜻한다.

톨도트(톨레다의 구성형)는 '야라드', 곧 '낳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형이다.

70인 역에서 '게네세오스'로 책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70인 역 번역의 초기에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의 이야기는 없었던 게 아닌가 추론해 본다.

모세 오경은 책이 시작될 때 처음 명사를 그 책의 명칭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후 영어 혹은 그 밖의 번역서들에서 '창세기'라는 이름이 사용되면서 그 이름이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하면 오늘날 성서의 편집본을 중심으로 보면 창세기라는 명칭은 적절치 않다.

히브리인들은 본래 모세 오경의 첫 단어에서 그 책의 이름을 따온다.

하여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가 본래 책의 이름이다.

2장 4절의 톨도트라는 단어를 그대로 책명으로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계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낳고 낳고에 대한 기록이므로 '계보기'이라는 말이 도리어 적절하다.

물론 창세기 2장 4절을 토대로 책명을 짓는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1장 1절로 하면 책명은 '베레쉬트'요 본원기다.

 

창세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독자들의 무의식에 담겨지는 게 있다.

야웨 엘로힘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대 전제를 앞세운다.

절대지존의 우상을 삼게 되고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서는 야웨 엘로힘이 숭배의 대상이라는 책이 아니다.

창조의 주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이때 창조란 우주 창조를 일컫는 게 아니다.

우주는 단순히 비유일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창조의 주체는 야웨 엘로힘이다.

숭배가 아니라 도리어 믿음이어야 한다. 얼이 얼사람을 낳는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정신이 정신을 낳는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는다.

믿음이어야 하는 까닭은 모든 정신의 주체는 지성소에 있는 지극산 정신의 존재인 하나님이

지극한 마음의 나를 빚고 창조해간다는 사실이다.

신령이 신령을 낳는다. 그러므로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은 언제나 지극한 존재를 향해

나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지극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엘레 톨도트 하샤마임 베하아레츠'(창 2:4) - 이것은 하늘과 땅의 낳고 낳음이다."로 번역해 볼 수 있다.

70인역은 "아우테 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우라누 카이 게스"로 번역한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투스'라고 시작한다.

신약 성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고,

창세기 2장 4절은 '하늘과 땅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둘은 서로 병행 구절이다.

따라서 이후 전개될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것이다.

마태복음도 에덴 이야기도 계보기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계보'라는 표현에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표현이 중첩되어 있다.

거기에는 동시에 우리 '각각' 그 정신세계가 어떻게 새롭게 낳고 또 낳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

곧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서려 있음을 읽어내야 한다.

생명책에 녹명되어 있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이 같은 점을 지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4절에 나오는 '톨도트(계보)'를 설명하기 위해 이어서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데,

'바라(창조하다. 낳다)'와 '아사(만들다. 양육하다)'와 '야차르(조성하다)'다.

계보(톨도트)를 이어가는 중요한 행위의 세 단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흔히 '창조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라'는 낳고 낳고에 포섭되는 단어다.

즉, creat 라는 의미의 '바라'는 사실 'born' 혹은 'give brith'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고, 'produce'의 의미가 담겨 있다.

동시에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도 모두 톨도트에 포섭되는 개념들이다.

계보를 이어가는, 족보를 형성해가는 개념적 동사들이다.

'바라'가 '낳다'라면 '아사'는 '양육하다'에 상응하고 '야차르'는 성숙한 인격으로 '조성해가다'의 의미를 담고 있따.

이 세 동사는 '톨도트(계보)의 술어들이다.

에덴 동산의 '경작하다'에도 포섭되는 동사들이다.

창세기 2장 4절과 같은 문장 구조를 띠고 있는 창세기 5장 1절은 다음과 같다.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지어내시던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2장 4절의 하늘과 땅이 여기서는 아담으로 치환되었다. 하늘과 땅은 아담을 비유하고 있다.

세페르 톨도트 아담, 세폐르는 마태복음 첫 단어 '비블로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뿐이다.

'바라'는 '창조하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곧 '낳는 것'을 뜻한다.

하여 '낳는 것'을 '창조'라고 일컫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직역하면 이렇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을 낳고(바라) 하나님의 모양으로 그를 아사(양육)해 가는 날,

아담의 계보의 책이다." 성서 이야기들의 숨어 있는 코드라고 할 수 있겠다.

요한계시록의 첫 시작은 '아포칼룹시스 예수 크리스투'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남이 요한 계시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라는 마태복음도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땅에 상응하고 그리스도는 하늘에 상응한다.

히브리인들의 성전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지성소는 하늘을 상징하고 성소는 땅을 상징한다.

이는 신구약 성서의 일관된 전체 맥락이다.

하늘은 물리적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땅도 역시 물리적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에덴의 이야기는 신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신화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성서는 이야기 구조를 띤다. 로고스는 이야기 방식을 취한다. 진리의 진술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해서 서술되는 것이 아니다.

서서적 구조의 이야기 방식으로 구술되고 있고 구비문학으로 전해오다가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다.

비록 신화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이야기 안에 담고 있는 것은 로고스라는 점이다.

옛사람들, 그러니까 종이가 없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본질적 삶에 대해 여러 형태의 이야기 방식으로 전승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효과적이었다.

어느 민족 어느 부족이나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신화적으로 전승되어 온 수많은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성서, 그 중 모세 오경은 민간에 존재하고 떠다니는

많은 이야기 중 모세의 영성으로 필터링 되어 채집되고 새로 편집된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 당시의 세계관을 담게 마련이다.

즉, 신화는 신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시대의 세계관, 인간관, 존재론이 이야기에 반영되고 투영된다.

그런 점에서 근원적으로 뮈토스는 로고스다.

뮈토스에 숨어 있는 로고스를 읽으내는 것, 그것은 뮈토스를 대하는 해석자의 몫이다.

뮈토스는 로고스보다 도리어 더 많은 로고스를 담아낸다.

뮈토스에 투영된 로고스를 읽는다는 것은 온전히 해석자의 몫이고 해석자의 존재만큼만 로고스가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에덴의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서구문명의 밑뿌리에 있는 원형적 이댜기다.

에덴의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서양철학의 수많은 논의도 에덴 이야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현대철학의 중심주제인 '존재', '무'의 개념들도 이미 에덴 이야기 속에 깊이 함장하고 있가.

오늘 우리 인생들의 각자 이야기도 결푹 에덴 이야기의 각자 버전일 뿐이다.

인생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고 이야기 속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

옛사람들은 그들의 소통방식으로 소통했다. 저마다의 이야기 형식으로 후손들에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지혜를 전달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 방식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생명과 진리를 나누기에 충분했다. 

성서는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창조 이야기, 에덴 이야기,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야기, 모세 이야기, 예수의 탄생과 부활 이야기 등, 성서는 이야기들의 집대성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체의 이야기도 물론이려니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소통 언어가 중요하다.

진리의 진술에 있어 이야기 방식만 한 것이 있을까.

영성의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는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것이다.

이야기는 진리를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과 달리 생명과 진리의 세계를 더욱 풍성케 한다.

진리와 생명은 정의할수록 편협해지고 제한되기 때문이다. 생명과 진리를 정의하다 보면 진리와 생명은 온데간데 없고 선악의 지식만 남게 마련이다. 더구나 영성의 세계를 후대에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랴.

영성의 사람들은 노아의 이야기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지 하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그들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였다.

영성이 상실되면서 전래 된 이야기의 참뜻은 오리무중이 되었고 수수께끼(자명한 의사소통이던 것이 알 수 없는 이야기로 변모)가 되기 시작한다. 해설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풀이하는 다양한 견해가 나타난다. 영성은 밝아지기보다는 퇴화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은 이야기를 풀이한 방식 중 하나다. 아담 이야기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핵심을

풀어내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이런 점이 더욱 명확하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해석하고 그 이야기의 본래 의미, 최초의 영성과 생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어 줄 걸출한 영성의 사람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이야기의 생명력은 그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단군신화를 터무니없는 얘기로 볼 수도 있으려니와 그 이야기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온전히 깨어 있는 영성의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중근동에는 성서와 유사한 수많은 창조설화, 홍수설화, 탄생설화들이 산재해 있따.

성서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유사한 이야기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성서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유효하고 경전의 자리를 우뚝 지키고 있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신학 이론으로 성서의 정당성을 변호하려는 방식은 자기 그룹의 방어적 이론에 불과할 뿐

일반인들을 설득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호교론이라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들에게만 의미 있는 이론일 뿐 상대를 이해시키기엔 터무니없다는 말이다.

모든 이야기는 시대마다 영성의 사람들에 의해 생명의 숨결이 불어 넣어진다.

모세에 의해 창조 이야기, 홍수 이야기가 비로소 생명의 이야기로 채택되고 경전에 흡수되어

연년세세 영성을 담아내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혼탁한 세대를 지나 예수에 의해 성서의 이야기들은 비로소 생명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혼탁한 영성은 다시 이야기를 퇴락시키고 있다.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메타포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공중휴거론으로 타락하고 있고

수 많은 생명의 이야기들의 선악의 이야기로 변모하고 있다.

이 같은 타락의 시대를 누가 다시 돌려놓고 기록으로 전해진 이야기 속에서 로고스를 읽어낼 수 있을까?

예수에 의해 완성된 성서(구약) 이야기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반복되었고 다시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내게서 그들 이야기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대에 의해 성서의 이야기가 죽은 사망의 얘기가 되기도 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오늘도 나와 그대에 의해 계속되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래된, 그리고 도래할 오늘 나의 이야기며 우리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