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걷고 있는가?
조도재
4. 종의 십계명이냐 아들의 권세의 기도냐
하나님은 살았고 운동력 있는 그의 말씀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푯대를 주셨다.
그 푯대를 벗어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죄다.
율법이든 세상의 법이든 모든 사람은 그 법 아래서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길을 걷는다.
그것이 죄인데 첫 사람은 모두 그 때문에 죄 아래 있다.
죄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는 흑암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공허와 마음으로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는 혼돈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음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지 못하는 무저갱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즉 첫 사람의 마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속에 있었던 처음 땅(땅의 기초)과 같다.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창조를 행하신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신 권세의 기도와 모세의 십계명은 어떤 관계인가.
주님의 기도(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는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기도로서
이 기도를 하는 자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하여 사람에게 요구하신 의(하나님의 기쁘신 뜻)를
자신의 권세로 가지게 한다.
즉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자를 본받아 영과 진리의 의를 이루는 권세의 기도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불완전한 십계명을 의무로 가지고 있는 종의 길을 걷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으로 그 기도를 자신의 권세로 가지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온전히 이룬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으로부터 자유케 된 아들은 바라지는 믿음으로 권세의 기도자가 되어 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야웨니라'하셨다.
즉 십계명은 야웨 하나님이 육신의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주신 것이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이요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죄로부터 해방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게 한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알파의 은혜다.
어느 누구도 먼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믿을 수도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알파에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인식하게 하는 계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알파에서 그것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고 그 죄로부터 구원되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오메가에서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하려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알파의 유월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메가의 유월은 그들이 메시야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혜 속으로 들어와서
영과 진리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잘 보라.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완전케 하는 믿음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하였다.
하나님은 돌과 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에게는 십계명을 주셨으나 그 가운데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이들에게는 더 온전한 믿음의 의로 살게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왜 율법과 호음이 하나로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또 거기에 기록된 불완전한 율법을 살피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어떻게 율법을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고
믿음으로 그 안에서 그를 본받고자 함이다.
그것은 또한 오메가의 때에 있는 우리가 바라지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창조의 근원) 속으로 들어가서 영의 생각을 따라 영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고자 함이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메가의 아들의 때에
알파의 종의 때로 돌아가며 중도에 잃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영과 진리로 돌아오도록 일깨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십계명과 주님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자.
십계명의 제 일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케 하신 주님의 기도는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되어지이다.'이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계명은 야웨 하나님이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육신의 생각을 따라 육신의 길을 걸으며 죄의 종들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이 첫째 계명은 야웨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들에게 자신들에게 있게 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신 것이다.
출애굽 전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자신들에게 다른 신들을 있게 하는 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일 계명을 받은 후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하는 것이 분명히 죄가 된다.
전에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자신들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 다른 신들이 있게 하는 것이 죄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그들이 제 일 계명을 받게 되자 죄가 죄로 분명하게 드러나며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낳아진 아들들은
존재적으로 그들에게 다른 신들을 있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낳으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들에게 다른 신들을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율법의 계명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 못한 종들에게 죄를 범치 않도록 의무로 주어진 것이요,
주님의 기도는 죄로부터 해방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권세를 주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고 또 아들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 권세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된 아들이 아니면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자신 안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없다.
모세의 제 일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의 변화를 통하여 온전케 된다.
즉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들' 곧 아버지께 낳아진 아들들의 마음의 하늘들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거룩케되는 그의 아들들 안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제 이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유일하신 아버지께 말씀으로 낳아졌고 또 아버지는 아들들의 마음 하늘들에 와서 계신다. 그런데 어떻게 영이신 아버지의 아들들이 자신들을 낳으셨고 또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를 잊거나 잃어버리고
육으로 돌아가 새긴 우상을 만들고 그것들에 절하여 그것들을 섬기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닌 육신의 종들과 영의 아들들 사이에는 잃게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다.
만일 어느 누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다른 편으로 우상을 만들고( 고안하고) 그것에 절하며 섬기고 있다면 그는 분명 아버지 하나님께 낳아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인일 뿐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임금(우상)으로 영접한 자들이 참으로 많은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 가운데는 거짓 율법 선생들과 기복신앙으로 그들을 좇는 종교인들이 있다.
바래지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들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그들 자신의 존재적 권세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거나 자기 믿음에 갇혀 있는 종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상을 민들고
거기에 절하며 섬기며 만물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져 내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존재의 영적 권세로써 이 계명을 논전케 한다.
제 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헛되이) 부르지 않기 위하여 그의 이름 자체를 부르지 않았다.
비록 거룩한 글에 야웨의 이름이 쓰여 있을지라도 그들은 '주'(아도나이)라 고쳐 읽었다.
그 일이 오랜 세월 지속되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잃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 ( 여호와)라 하지만 그것도 명백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기 위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않다가 도리어
그들을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이 일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그들을 사랑하신 거룩하신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아버지)의 이름이 거룩되어지이다.
기도하는 권세를 주셨다.
'나'이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육신의 '나'안에 속 사람인 '나'를 낳으시고
아버지의 거룩 속에서 육과 영이 하나 되는 '나의 나됨'을 이루신다.
'나의 나됨'을 이루는 아들은 누구나 아버지께 받은 거룩한 권세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되어지이다' 기도한다.
모세는 죄의 종에게 '너는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였으나 그 계명을 완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되어지이다'기도하라 하셨다.
제 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것을 거룩하게 하라' (자카르 에트 욤 핫샤바트 레 카데소)이다.
'레 카데소를 직역하면 '그것이 거룩하게 되도록'이지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도록'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본받아 안식일을 기억하여(마음에 품고) 거룩하게 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게 하신 것이다.
기록된 바,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여종이나, 네 남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을 하지 말라.
니는 엿새 동안에 야웨께서 그 하늘들과 그 땅과 그 바다와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야웨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였고 또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출20" 9- 11)하였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그를 본바다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복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 첫 창조에 속한 것은 알파의 징조요, 새 창조에 속한 것은 오메가의 실상이다.
그러나 새 창조의 오메가의 때에 속한 자가 첫 창조의 알파의 때로 돌아가면 오메가의 안식과 축복과
거룩을 잃어버린 것이다.우리에게 먼저 알파가 있었기 때문에 오메가로 나아간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의 새 창조의 오메가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 그는 중도에 잃어진 자다.
율법 선생들이나 종교인들은 이 오메가의 일을 알지 못하고 잃어진 자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돌이켜서 오메가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 주님은 돌아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실 것이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되어지이다' 하는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 안에서
그의 거룩을 본받아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바라지게 된 믿음의 존재들이 그들의 권세로 행하는 기도이다.
이 권세를 가진 존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로 말미암아 영과 진리 안에서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기도하든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영이신 하나님은 기도자가 그 육신으로 어느 장소에 있든지 시공을 초월하여 그와 함께 하신다.
주님은 이 하나의 기도로서 우리 안에서 모세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계명을 완전케 하셨다.
종은 주인의 계명을 의무로 받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계명을 권세로 받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혼(목숨)을 내어 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받을 권세도 있나니
이 계명을 아버지께 받았노라'(요10" 18)
바리새인들(율법 선생들)은 안식일을 그들을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을 존재적으로 본받는 날로 삼지 않았다.
즉 그들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거룩한 존재가 되지 아니하고
그 날을 자신들의 선악지식을 따라 거룩하게 지키는 날로 알았다.
그들은 다만 계명의 문자 속에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안식일을 지킬지라도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문자지식(선악지식)을 따라 안식일에 안식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 심판하며 정죄하는 일을 하면서
도리어 안식일을 더럽혔다.
때문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 속에서 참 안식을 주시려고 오신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아니하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거룩한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기쁜 뜻을 좇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게 하시며
모세의 네 번째 계명을 완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것이 바라지는 믿음으로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시공 초월의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율법 선생들과 그들을 따르는 종교인들은 그 시공 초월의 거룩한 예배를 시공에 갇힌 속된 몸짓의 예배로
끌어내린다. 그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완전케 된 예배를 그들의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서
육신의 몸짓으로 속되게 하거나 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십계명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계명을 완전케 할 뿐 아니라 계속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존재의)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바라지게 된 믿음의 실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제 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기록된 바,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야웨께서 네가 준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하였다.
사람이 자기를 낳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율법에서 뿐 아니라 육신의 세상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가치다.
다섯째 계명부터 열 번째 까지는 첫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 육신으로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계명들은 알파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계명들을 영과 진리 안에서 온전케 할 때 오메가의 권세를 가진다.
다섯 째 계명은 첫 사람이 땅에서 잘 되고 사람답게 사는 기본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속한 겉 사람 안에 영의 속 사람을 낳으시기 때문에 육신의 첫 사람이 없으면 영의 둘째 사람도 없다.
따라서 육신의 일은 알파요 영의 일은 오메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지는 믿음으로 육신의 일이 영과 진리 안에서 거듭나면 완전한 실상을 이룬다.
율법에 '네 마음을 다하고 혼(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하였다.
이 사랑의 계명은 율법 속에 문자로 있었을 뿐이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따라서 육신의 첫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둘째 사람으로 존재의 변화를 맞이하지 못하면
사랑의 계명은 도리어 그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요 멍에다.
왜냐하면 육신의 첫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해서 무엇보다 자기 혼(목숨)을 아낀다.
사람이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혼을 다하여 아버지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존재적으로 본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부활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형제들이 될 때에 사랑의 계명을 그들의 권세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그들의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혼(목숨)을 내어 놓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런데 그 사랑의 계명은 이스라엘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육신의 생각을 따라 육신의 길을 걸으며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받았다.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은
그들에게는 율법 속에 문자로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의 권세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첫 사람을 물과 영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영의 둘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또 그들을 그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권세자가 되게 하셨다.
또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하였으나 그것도 문자로 있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존재의 변화가
하나님의 죄인들을 부르신 그의 기쁘신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주어진 사랑의 계명은 율법 속에 문자로 있었을 뿐, 그들은 그 계명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존을 이루는 영과 진리의 권세로는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생존의 크로노스에 갇혀서 생명의 카이로스로 유월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 존재적 미성숙 속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율법을 좇아가는 것 또한 그들의 영적 존재적 미성숙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때문에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의 나 됨'을 위하여 있고 '너의 너 됨'은 '나의 나 됨'을 완전케 하면서
'우리의 하나 됨'을 이룬다.
즉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의 몸을 이루는 형제들의
영적 존재적 사랑의 권세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문자로 있는 사랑의 계명을 완전케 하시어 영적 존재적 사랑의 권세가 되게 하셨다.
기록된 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의 종 된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시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게 함이라' (롬6"3-4) 하였다.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의 길을 걸으며 존재의 변화를 이루는데 있다.
제 육은, '살인하지 말라'이며
제 칠은, '간음하지 말라'이며
제 팔은, ''도둑질하지 말라'이며
제 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이며
제 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이다.
기록된 바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마라'하였다
율법은 제 육, 제 칠, 제 팔, 제 구, 제 십의 계명을 땅에 사는 육신의 첫 사람에게 육신의 법으로 명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계명들을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의 영적 존재적 사랑의 권세로 완전케 하셨다.
그는 이 모든 계명들을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권세로 완전케 하셨다.
율법의 여섯째 계명으로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이웃에게 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계명들을 사랑의 권세가 되게 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웃에게 하지 말 것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 행해야 할 것은 기쁘게 행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 34)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은 불완전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신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형제들 또한 그의 양식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는다.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이다.
이 계명 하나만으로도 율법 선생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좇는 종교인들은 모두 정죄 되었다.
탐심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증거나 다른 무엇을 행하게 하는 근원이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탐심을 그대로 두고 탐내지 않는 계명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랑으로 살아난자다.
그러나 오늘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열 번째 계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계명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탐심을 이루는 것을 믿음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기복신앙'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기복신앙 또한 우상숭다.
이런 우상숭배는 생명의 말씀 밖에서 선악지식을 동원하여 교리논쟁을 일삼고 있는 율법 선생들에게서
크게 조장되고 있다.
그들이 겉으로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탐심을 좇아가고 있다.
율법 선생들이 교리논쟁을 하는 것은 탐심으로 돈이나 사람이나 세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은 교리논쟁을 하는 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자기의 기쁜 뜻으로 삼는 하나님의 아들들 안에 있다.
오늘날 탐심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영업 중 치킨 집을 여는 것보다
교회를 여는 것이 낫다 한다.
이것은 오늘날 탐심을 좇는 종교인들이 빠져든 비참한 자화상이다.
깨어 있는 자들은 이런 일에 대하여 애통하고 있으리라.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라
하셨다.
알파의 율법은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으나
오메가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서 죄 지은 자들을 사하는 권세를 가지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꾸로 사람들을 율법으로 인도하여 죄를 짓게 하는 거짓 증거자로 전락할 수 없다.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고 안식일을 지켜야 복을 받는 다는 육신의 자기 믿음 속에 갇혀 있는 것은
탐심 때문이며 탐심은 우상숭배다.
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게 마옵시고 도리어 악에서 구하옵소서'하라 하셨다.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항상 영과 진리 안에 깨어 있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을 넉넉히 이긴다.
만약 우리가 잠시 시험에 빠져들어 불순종의 아들들을 본받는 악(자기 선)에 갇혔다 할지라도
긍휼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거기에서 구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롭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의 마지막은 '대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이다.
아버지의 아들들은 자기 믿음으로 막연히 내세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존재적으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 속에 들어와 있다.
또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속해 있는 것을 존재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막연히 내세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이나 아버지의 것을 탐내는
죄의 종들도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면서 아버지의 것이 그들의 것이요 그들의 것이 아버지의 것인
영과 진리의 때인 카이로스 안에 있다.
하나님의 일은 알파와 오메가가 온전한 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알파의 일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일을 하였다.
율법은 실상을 위하여 있었고 실상은 율법을 완전케 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순서이기 때문에 율법 선생들의 생각처럼 거꾸로 되지 아니한다.
즉 실상의 때에 있는 존재는 그림자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구든지 장성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장성한 자의 때에 속한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의 나 됨'의 길,
곧 참 사람과 참 신의 길을 걷는다.
참 사람의 길을 걷는 자의 십일조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자신의 이웃 사랑의 권세로 가지는 것이요. 참 신의 십일조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자신의 하나님 사랑의 권세로 가지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십일조는 사랑의 권세로 대변혁을 이루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대변혁을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의 새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변혁의 근원이시요 궁극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