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방법
난 살면 살수록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난 믿음생활을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
어떻게 믿으면 잘 믿는 것인지..
난 살면 살수록 모르겠다.
어떻게 사랑하면 잘 사랑하는 것인지..
.......
그래서
내 스타일대로 살기로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성질로는
살면서 만나는 악한 성질들의 것과 겨루기에는 역부족이기에
차라리 내 편한 선한 방법으로 그들과 겨루며 살기로 했다..
지금은 이유야 어찌하였든 바람직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스스로 겁쟁이며 비겁한 위선자라고 스스로를 깍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아는 믿음이었기에
결과가 내가 아는 믿음의 열매이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믿음생활은 쉬 피로해졌다.
그때 나는 내가 믿음생활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지
정작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믿음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여 오직 예수께 두는 희망과 그분께서 죄많은 이땅에 오셔야 했던 가장 큰 이유이며
그분으로 인해 비롯된 구원 자체에 접근하게 되었다.
영의 열매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그 믿음생활에서의 자연스런 향기로 나오는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난 사랑에 관한한 욕심이 많았다.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꼭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바라는 사랑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저절로 나오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의 행위를 어떻게 할까에만 마음을 썼고 일상에는 배려없는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난 속으로 많이 울어야 했고 쉬 외로워졌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모르고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 됐지..
넌 욕심이 많거나 아니면 행복을 담을 수 없는 우울증에 빠진 거라고 쑥덕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내가 사랑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나의 최선의 사랑을 나타내었고
그 결과에는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나의 감정에는 충실하는 것이 내 인생에 억울함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살아보니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사람들이었다.
난 그런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