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화려한 꽃
가라지 숲에서 자라오르는 ..
이름 모를 화려한 꽃.
덩굴은 하늘을 향해 뻗혀 올라가면서 꽃을 내고 있다.
영적기근이 들어
알곡들에게도 겨우 연명할 양식이 주어지고 있는 이때..
가라지 숲에도 기근이 단단히 들었다.
그것도 때에 적절한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일까?
그 탓에
다 자라버린 무성했던 가라지 숲은
규모만 가졌지 앙상한 제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곳에서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영혼들은
더 이상 가라지 숲의 그늘에서 그나마의 쉼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자신이 가졌던 가장 기초적인 믿음이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새로운 길의 모색의 필요를 앞두게 생겼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듯이 ..
상실된 충만함에 의한 공허감을 겨냥이라도 하려는듯
화려한 꽃이 싱싱하게 하늘로 향하는 덩굴 군데 군데에 피어오른 것이다.
나는 본다.
하와를 꾀었던 자의 달콤한 유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인간의 지혜로 신에게 다가가보려는 하와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의 노력과 ..
순수하고 건강한 복음의 씨에서 발아되어 자라난 믿음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사랑의 표현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별력을 얻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아픈 대속의 희생에 우리들의 죄를 씻어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이기적인 육체의 옷을 벗고 선하신 거룩함에 하나되고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구원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둘째 아담의 후손들이 된 작은 예수들의 발걸음을 ..
일곡과 가라지가 다 자랄 때까지 허락하신 세월동안 ..
우리의 속성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가라지가 순수한 복음과 혼재되어 자랄만큼 다 자란 것 말고는..
죄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이 무엇이라는 것이
그간의 세월동안 충분히 드러났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 수는 없었고..
과학이 제 아무리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죽음을 극복할 해 낼 그 어떤 방법도 구할 수 없었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그 시절에도 ..
그 시대의 정통으로 여김을 받던 자기 의로 구원을 이루려 했던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유사하나 교묘히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던 무리들도 있었고..
천사들의 말을 따르던 무리들이 있었던 것 또한 감안한다면
이천 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의 믿음의 세계에서도 크게 다를 바도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추수할 시절이 되었는가?
더 이상의 믿음의 양식들로 몸을 키우기보다
자기의 본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시절이 왔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의 흔적을 찾아 가슴에 품는 이들이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나던지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 아래에서
깨끗함을 입고 죄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었으나 ..
발아되지 않는 믿음을 안고 그 안에 생명력의 부재를
눈에 보이는 영의 작용과 능력의 현시에서 부인할 근거를 찾고
인간적 지혜의 산물이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영적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 영의 가르침에서 죄에서나 죄의 그림자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치유받고 자유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가고자 하는 '자기 의'를 이룬 창조물의 실체로 나서던지 ..
어느 쪽이든 자기 본 믿음의 모습을 보다 확연하게 드러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과
그분을 통한 죄사함에 이르러 거룩하게 이르는 길을 따르기보다 ..
그분의 피를 통하지 않은 어떤 지혜를 통해
지혜로워지고 그 지혜로 인간사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그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속삭임 ..화려한 꽃의 유혹..
그 달콤한 속삭임의 본질은 '자기 의'나 '자기 지혜나 노력'을 통한 신에게로의 접근이라는
하와의 후손다운 발걸음 이라고 나는 본다.
그 발걸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 길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선한 우리들의 노력이라며
그 길 또한 하나님을 찾아가는 지헤롭고 열심있는 자들의 선한 발걸음이라 확신하면서
그 발걸음들이 가라지 숲 밖으로 ..새로운 길을 또 만들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