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1/5

세월의 공백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08. 4. 6. 15:36

사랑하는 자매가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옷을 겹겹이 입고 있었지만 그 질문의 본질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현 믿음의 형태를 하나님께 인정하시는 인증정도로 스스로 강한 확신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사라고 불리워지는 방언, 병고침, 이적, 기적, 환상, 예언 더 나아가 영의 현시등이..

일 세기 때 부어졌던 성령의 능력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또,

만일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탄에 의한 교묘한 술책인 강신술에 의한 것이라면 

일 세기 때 이루어졌던 진짜 성령의 역사는 언제 끝났는가?

더 나아가, 일 세기 때 우리 눈에 보이게 내렸던 이른 비 성령의 기적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천 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동안 성령의 활동은 어떤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여 왔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또,

일 세기 때의 이른 비 성령처럼 늦은 비 성령은 앞으로 또 내려질 것인가?

그렇다면 늦은 비 성령의 기적은 언제 어떤 시기에 내려지게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달고 있었다.  

  

일 세기 때 내려졌던 이른 비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우리 주님의 능력의 선물이었고..

유대 자국민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나는 처음부터 배웠고 그리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뒷바침하는 나의 생각은

일 세기 때 내렸던 성령이 머물었던 자리는, 

믿는 자들에게, 주님과 믿는자 서로의 관계에서의 인정으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능력을 보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자리에

그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절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율법적인 생활로의 귀결이 되는

뫼비우스 띠 선상의 신앙생활의 나의 모습에 나름 넌더리가 나던 때였다.

믿음 생활에서의 방황인지 ..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홀로신앙을 고수하는 것인지조차

스스로도 가름이 되지 않던 때이기도 했다.

 

나의 정체성 혼란에 빠질 때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과

그 행위로 나의 하나님 사랑을 증명하려는 나의 노력이 

결국 자기 의의 실현이라는 ..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 현실 앞에서 공항상태에 빠지게 될 때가..

 

나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슬픈 일 앞에서보다 더 힘이 들었다.

그리고 힘든만큼 우리 주님이 더 못 견디게 더 많이 그리워졌었다.    

 

나의 정신적인 중심이 흔들리는 그 시간에 나에게는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내 피난처가 될 수 있었다.

그래야 억울하지가 않을 것 같았고..

그분의 도우심이라야 더 이상 길없는 길에서 나를 도와 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우울한 시간..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기도처가 된다고 여기고 있기에

약국 가까이에 있는 장로교회로 향하곤 했고.. 그러기를 몇 번..

교파에 매이기 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의 가치로서의 이유로 그곳에 머물렀다.

규모가 있는 교회였고 성도들의 열심이 대단하여 나날이 부흥되는 교회이기도 했다.

  

그 날은 유난히도 머리가 맑지 않아 하나님 생각까지 전혀 나지 않는 날이었다.

늘 가슴 저리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명을 잃은 것처럼 무덤덤해지는 날이었다.

나에게 그런 날은 죽은 날과 같았고 나는 음부에 갇힌 시체모양 육신이 무거운 날이 되었다. 

그리움에 지친 아이..더 이상 울지도 않고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처럼 하루를 살다가

해질 녘이 되자 어머니 생각이 새삼스레 나 어머니를 찾아 나선 아이처럼..

난 다시 하나님이 그리워졌고 그래서 기도를 하기 위해

평소에 참석을 하지 못하던 금요일? 예배에 참석을 했다.

 

통성기도 시간이 오자 촛불이 켜지고 전등은 꺼졌다.

강단 앞의 목사님은 기도 반.. 방언 반..이 섞인 기도를 하셨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 방언을 최대한 억제하려 하는 노력이 느껴졌었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그 기도는 모두가 다 알아 듣을 수 있는 기도가 되질 못하였다.

 

개인 기도 시간이 되고 옆 사람은 큰 소리로 몸을 흔들며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예배에 익숙지 않아서 눈을 뜨고 계속 있다가 그래도 기도가 하고 싶은 생각이 나길래

눈을 감고 조용한 소리로 기도를 하려는 순간..

내 의지와는 다르게 혀가 말리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혀가 말려 오르고 혀가 떨리면서 말이 아닌 소리가 나올 것 같았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고 나는 바로 일어나 그곳을 나와버렸다.

그 때의 솔직한 느낌은 .. 그 느낌은 .. 나도 몰래 은밀하게 강간을 당하는 것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너무도 불쾌한 기분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결한 은사가 아닌 더러운 힘 임이 틀림없다고 내 몸은 칼처럼 분명하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곳에 다시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

믿음이 좋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내 오랜 지인에게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방언을 받고 있으며 목사님이나 기가 센 사람 옆에 있을 때

방언이 잘 터진다는 소리을 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렇게 방언 함으로 

성령을 받은 자신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던 믿음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난 미안하게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난 내가 체험한 것이 이런 세계에서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것은 넓은 해변가의 모래 알갱이 하나 정도의 수준밖에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부언하지만 일 세기 때의 이른 비 성령은 그 당시에 내렸던 분명하고도 고귀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성령이 내린 곳에는 빛이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믿음에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이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이유로

성스러운 능력인 성령이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설사 하늘에서 내린 성령이 맞다고 한다치더라도

한 성령 아래 여러 가르침과 다른 이해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성령 안에 여러 말씀이 있고 여러 믿음의 형태가 있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고 본다. 

 

.....

 

많은 이들이 불쾌한 감정을 가지겠고 돌을 던지겠지만..

난 감히 현대에 일어나는 그런 방언과 기적들이

예수님께 속한 진리에서 시작된 믿음이 아니라 조직사상이나 교리에 머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성스러운 복음의 거름이 되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만족이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에 머문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 아닌 조직교리와 조직사상을 이땅에 뿌린 자의 그림자라고 본다.

 

그렇다면..하늘에서 내리는 진정한 성령은

하나님께 속한 당신의 시간이자 ..성서에 언급된 이 땅에서의 그날에..

혹은 마지막 때인 이 땅에 우리 주님께 속한 진리가 이 땅에 세워지고 밝혀지는 날에.. 

 

일 세기 때  복음의 알곡이 골고루 잘 뿌려지기 위해 주님의 일꾼들에게 성령이 내렸듯이

마지막 날 뿌려진 알곡들을 추수하기 위한 일꾼들에게 또다시 그 때와 동일한 성령이 다시 내려짐으로,

 

가라지 덤불 속에도 순수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살아남아 있는 알곡들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고..

진리의 빛을 더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로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시키기에 충분한..

큰 능력의 빛으로의 역할을 하실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복음의 씨가 뿌려졌던 일 세기 때로부터 이천 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까지 세월의 공백은

무엇을 위한 공백이었을까?

난 감히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오르는 기간이었다고 여기고 있다.

순수한 복음과, 그 복음의 땅에서 함께 자라오른 조직과 하나되어 버린 변질된 복음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때가 되기까지의 소요된 기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의 공백동안

하나님과 뜻이나 사랑에서 이미 하나되신 우리 주님의 사랑의 표현인 성령의 도우심은

늘 순수한 복음을 지켜나가려는 매 시대때마다 불완전하나마 빛의 역할 해 왔던 의인들과 함께 해 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하나되신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 내신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강이되어

구원이라는 바다를 향하여 나아갈 때..

구비구비 필요한 자리마다 자신의 몸으로 잘못된 물길을 막아 바로 잡으며

물줄기의 방향을 바로 잡아 온 의로운 이들과 함께 해 오셨던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글이나 ..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로 정리하여 한 번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