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1/영화

영화 '오아시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07. 11. 23. 09:32

영화는 이 땅에서 소외받고 있지만

정녕 그들도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로서 나름대로는 전혀 손색이 없는 한 개체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맹인이 육감이 뛰어나다고 했던가..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쏟아야 할 부산한 신경들이 잠재워져서 일까?

 

그들의 감성은 세련되지는 않고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세상적 사람들이 보기엔 2% 부족하여 감옥에 간 경력이 있는 순수한 한 남자와,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을 마음대로 제대로 가눌수 없는 뇌성마비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만큼 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영혼들이었다. 

 

어떤 결함이 있어 날아 오르지 못하는 하얀 새 두마리가 한 웅덩이에서 만나  

그들의 날개짓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그들 나름의 인생들을 살아가지만..

 

들어오는 햇빛에 거울로 하얀 새를 만들어 날리면서

몸의 한계가 정신의 한계를 구속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고,

 

벽에 걸린 사막의 오아시스 양탄자의 그림 속 존재들을

외로운 시간 자신의 영혼 속으로 불러줄 아는 가난한 영혼들이었다. 

 

그러나, 저 높은 웅덩이 밖의 새들에게는 기형적인 날개짓과 기괴한 노래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웅덩이 속에 가둬진 두 마리의 외로운 하얀 새들에게

더러운 흙을 부리며 그들에게 허락된 기쁨들에게조차 억겨움의 눈빛과 조소의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나눠 놓았다.

 

하지만, 세상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는 그들에게 인위적인 방법들로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나무라고 하였지만,

순백색의 하얀 새들의 정신 세계는 그들에게 분노를 가지기 보다,

그 시간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해주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환경상 구속들 속에서

서로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도망을 쳤다.

 

밤마다 가로수 불빛에 가로수 가지가 드리워지는 그림자 때문에 무서워 잠을 잘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여자가,

자신이 없을 때에 무섭지 않게 잠이 잘 들수 있도록, 그 가로수 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고..

 

그 상황을 어렴풋하게 느끼다가 확신하게 된 육체의 한계를 가진 여자는 그의 자신을 향한 사랑에

자신의 사랑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늘 듣고 있는 라디오 보륨을 높이는 것으로 자신이 이 상황을 알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어둠에 가려진 사회의 소외된 계층들에게 빛을 조명하여 그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며

그들 또한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늘 그런 영화를 만들어 이 사회에서 바람직한 영화의 본래의 역할과 가치를 자리잡게 해주는

이창동 감독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