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사랑스런 동생같은 형제에게
제게 평소 도움이 많이 되었던 몇 편의 글을 보여 주었더니
신중하게 한 참을 들여다 보더니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고 그냥 받아들여야 할 글 같습니다."라고요.
공의롭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 친구는
자신의 지식의 걸름망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증폭시키는 건전한 글이면 일단 기뻐하며 열린 마음으로 즐겨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이같이 순전한 마음이 나비가 되어 쏟아지는 빛의 속으로 바로 날으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 친구와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 이야기에는 어떠한 거침이 없습니다.
그의 귀는, 자신이 믿는 공의롭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그는 드넓은 초원 위에 서서 한 낮의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신 빛을 헤아리고자 선 아이같았습니다.
담긴 지식의 크기는 달라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같아 그 친구를 보는 것은 제 기쁨입니다.
저는 어찌 된 일인지 이 기쁨 뒤엔 늘 같은 크기의 슬픔이 함께 떠오릅니다.
그와 같은 나이의 사랑스런 동생같은 형제의 얼굴입니다.
믿음 생활의 연수와 지식의 크기 면에서는, 앞서의 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울창한 인위적인 지식의 숲속에 서서 한 낮의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신 빛을 헤아리고자 선 아이같았습니다.
그 친구와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 이야기에도 어떠한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잣대에 비추어 재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기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의 토론과
자기 정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모습이 겸손이라 알고 있지만 그 본질이 교만이며 무신론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습관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여전히 말씀의 언저리에서 배회하고 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사실이 아직까지 제게는 슬픔입니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것은 성서의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그 사랑을 담고 싶어 궁굼해 하는 자들의, 마음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태양과 태양열 주택과의 관계처럼 말이죠.
해는 공평하게 하늘에 떠 있지만
그 에너지를 받으려 펼치는 태양열전지판이 클수록
에너지를 더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꼭 태양열전지판을 닮았습니다.
우리의 심장과 신장을 살피시는 당신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싶어하고 또 바라는 우리의 그 마음의 크기를 모르실 리 없으실 것이기에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기뻐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그 마음 속에
당신의 사랑의 역사와 약속들을 분명하게 새겨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