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의 자리
하나님께 여쭤보았더랬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자리는 누군가가 꼭 감당하여야 하였던 자리였다면
그 역시 희생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추호의 의심을 갖고 드린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어떠한 면에서도 이론적 충돌이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굼했었습니다.
가룟유다의 자리 말고서도 성경에 예언되어 있던 수 많은 악한 자리를
맡아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궁금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면 좋았을 것"이라는 연민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분노를,
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악한 일인지도 모른채
자기가 빠질 인류 역사상 최고의 비극의 구덩이를 파는 어리석음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인간적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은 나의 뇌리에 오랫동안의 숙제거리였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숙제는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유죄 판정에 성전에다 자신이 받은 은화를 집어 던지며 자살해 버렸던 양심,
마음 속에 힘 없이 존재하던 그 양심을 모른척 하고,
세상적 잣대에 속한 시각을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삼아 본디 있던 양심을 덮어 버렸을 때
그 악한 욕심이 그 즉시 그 상황에 기다리고 있던 악한 자들의 발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부되고 무시된 양심을 타고 악한 세력이 들어왔으며,
자신은 결국 악한 세력들의 발판이 되어준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고요.
저는 가룟유다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실들을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양심을 팔아 은화 몇 푼을 손에 쥐게 된 그의 악한 의도가
어느 정도까지 예상하였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돌아온 자신이 한 일의 결과는
자신의 의도한 범위를 벗어 나
이미 악한 자들이 그 뜻을 펼쳐 낸 후였습니다.
그는 악한 자들의 발판이 되어 주었습니다.
악한 자들의 악한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오로지 그가 내어준 악한 자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파란만장한 인간 역사의 흐름 중에 가룟유다만 그런 자리에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 처럼 악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많은 악한 자리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악한 자리는 수 없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의 비극적 인생을 생각해 보면서
영적인 세계에서 자기의 이성과 자신의 양심의 부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악한 세력의 다양한 발판들이 되어,
자신이 원치 않아도 악의 도구로 사용될 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