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1/5

그리운 길목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07. 6. 13. 14:04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종친회에서 주최한 야유회에 갔었다.

아버지의그리움의 그림자들이 아버지 앞에 실제감 있게 나타날 수 있는 그 모임은, 그 곳에서 한 번씩 열렸다. 

우이동 종점에서 한참을 올라가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우리의 모임장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산은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산이 깊어 골짜기도 깊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곳에서 그곳은 너무도 멀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 타고 나서도 한참을 가야했었다.

 

내 아버지를 보고 반기는 사람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까지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그 종친회는 본디 내 아버지 고향마을 사람들의 계나 마찬가지였었다.

청주 한씨들이 모여살던 그곳이었기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친할어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려서 돌아가신 내 고모 생전 이야기까지 나왔다. 

한 번도 본적 없어 나에겐 없는 존재와도 같은 존재들이지만

두런두런 흘려나오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분들은  세상 밖으로 살아 나오셨다.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께서 아끼고 아끼시던 사진

과수원 앞에서 찍은 아버지 어렸을 적 가족사진 속 얼굴들을 떠올렸었다.

 

어릴적이었으니 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내가 있음으로 또 내 아버지가 계심으로

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음이 실감나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당연히 원래 내 아버지로 계셨던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여러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의 어릴적 이름과 친가 식구들의 존재들이 내 현실 앞에 나타나면서,

내가 실제 보지 않아도

내가 살아 있음이 그분들이 살아계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었다.  

 

그 느낌이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았던 것 같다.

은근히 뿌리 의식을 느끼기도 했었고...

그래서 그 모임이 기분이 좋았다.

내 외가 식구들이 모였을 때보다 먼 친척뻘이 되기도 하는 아버지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서

왠지 더 뜨거운 내 뿌리의식을 느꼈다고 하면 내 외가 어른들께서 서운하시겠지만 말이다.  

 

난 역시 우리 아버지 딸이었다.

아버지가 기쁜 일이 내게 기쁜 일이었고,

아버지가 편한 자리가 내게 편한 자리였었다. 

 

야유회가 마칠 시간 오후 시간이 되면 

피 한방울이라도 좀 더 가까운 친지들끼리 모여졌다.

아버지의 숙모되시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촌형제들이 모이면

항상 목포에 계시는 내 작은 아버지에 대한 험담이 나왔는데

난 아버지가 그 이야기들로 아버지가 슬퍼질까 걱정스러웠었다.

 

야유회가 마쳐지고 내려오는 길은 멀고도 피곤했었다.

버스에 탄 기억만 있으니 그 이후부터는 잠이 들었나 보다.

 

그곳의 추억은 아버지와 내만  함께한 유일한 시간여행이라면 시간여행이었기에

기억에 더 생생하게 남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