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든 작은 새를 보며...
내가 사는 곳은 부산이란 도시의 지리적 끝자락이다.
쉽게 말하면 이곳에서 차로 얼마가지 않으면 경상남도에 속한다.
눈치 빠른 분들은 내가 사는 곳이 좀 시골스럽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가까이 산도 연결되어 있어 간혹 족제비도 가게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내가 근무하는 곳의 형태가 기억자로 길을 물고 있고
에어컨을 가동하기 전 시기인 이맘 때면 양쪽 방향 모든 문은 열어 두고 있다.
천장의 형광등 열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 때문에 하늘을 낮게 날던 새도 혹은 매미도 혹은 잠자리도 바람따라 들어와선
곤혹을 치루곤 한다.
그런데 한 번 들어와서는 나가는 매미나 잠자리 녀석들은 거의 없고
그나마 아기 제비나 아기 참새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여기저기 부딪혀서 날개에 많은 상처를 입어
기진맥진 해서야 겨우 나가든지 지쳐 주저앉아 버려 우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똑 같은 생명체이나 작은 새들은 아무래도 크기가 있어
생명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에
약국 온 식구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한다.
예전에 난,
날아든 작은 새의 처절한 몸부림을 볼 때마다
내가 그 작은 새가 된 듯 그녀석의 구속의 괴로움이
나의 것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의 기본적인 믿음은 야생에서 커왔었다.
아주 어렸을 적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는 사실을 교회에서 배우고 나서는
교회가 아닌 야생에서 그 어린 믿음이 뿌리를 내렸다.
매일 보는 늘 똑 같이 펼쳐진 하늘과 그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그것을 늘 잊지 않게 확증해 주었다.
죽음을 보면 아담의 코에 생기를 넣으시던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내 눈에 보이는 자연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늘 잊지 않게 해주었다.
그 야생의 믿음은 교회라는 작은 조직의 패턴에 맞춰지면서
우리 약국에 날아든 새가 천장과 벽에 이리 쿵 저리 쿵하고 부딪치는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조직의 교리들은 구속이었다.
조직에 속하여 배운 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조직에 속했던 것이었기에
그 배운 교리들이 완장 찬 기득권의 압제자처럼 자유인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를 구속하려 들었다.
음식물에 관한 교리를 배우면 그 교리에 어긋난 음식 앞에서 나의 영혼은 가두어졌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과 관련없는 교리들이 나의 바로 발 앞에서 발걸음을 조정하려 들었다.
안식일에 관한 교리를 배우면 그 교리에 어긋난 안식일 앞에서 나의 영혼은 가두어졌었다.
안식일의 의미와 사랑은 먼 하늘이라면 안식일의 교리들은 내가 발을 떼야 할 바로 앞의 현실이었다.
증인이 되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조직의 가르침에 밀접히 따르는 것으로 표현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었던 나는, 어지간하면 그 권고에 따르려 했었다.
집안 일을 제치고 봉사를 다니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호별 봉사에는 그다지 열심을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깊은 정을 나눌 사랑에 촛점을 맞추었다.
나의 생활이 건강한 것을 보이는 것과 그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가까운 이웃들에게 전할 복음전파의 기초를 닦는 일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건이 허락하면 그때 호별봉사에 열심을 내려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있었다.
봉사시간 1시간을 적어 낼 때면
조직의 기운은 날 누르기에 충분했다.
봉사시간 1시간이지만 나의 양심은 진정코1시간이 아니었다.
주변의 자매들과 장로형제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나에게 봉사는 사실 큰 의미가 없는 구속이었다.
하지만 그 구속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하여 나를 구속하려 들 것이었다.
그 즈음에 여증조직이 신권조직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난 단칼에 여증조직을 끊어 내었다.
내가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 온 새처럼
자연보다 더 강렬한 형광등 불빛과 같은 조직의 교리에 눈이 어두워진 것은 모르고
그 안에서 몸부림치던 나를 가두던 공간은 크게 두 군데였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와 여호와의 증인 조직...
다른 작은 교회들도 있었지만 앞서의 두 조직만큼
조직이란 인위적인 벽의 한계에 내 영혼의 날개가 상처입히지를 않았다.
난 그 조직이라는 깊고 딱딱한 벽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조직의 교리라는 울타리는
내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순전한 복음에서 변절된 조직이라는 인위적인 새장이었다.
난 그 깊고 단단한 새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과 내 하나님이 슬퍼하실 일들을 그들 조직의 교리로 배우지 않아도
내 하나님께서 내 양심과 내 심장에 새겨주신 약속으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새는 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태어나면 날 수 있는 것이었다.
새들이 태어나게 하신 분이 그들을 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