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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사랑, 에서와 야곱

   '형상과 글' 카페    자유게시판에 게시된 글

                                        휘오스님 글

 

자유는 의식이 자기 존재로 꽃 피기 위한 알파요 근원이다. 타자 지배, 타자 자아의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존재 자아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그로부터의 믿음이 찾아왔을 때만 비로소 자유가 깃든다.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으로 찾아올 때 비로소 자유의 둥지가 만들어진다. 

자유는 그로부터의 믿음이 찾아왔을 때만 비로소 자유가 깃든다.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으로 찾아올 때 비로소 자유의 둥지가 만들어진다. 

자유는 외피요 겉껍질이다. 자유가 자유로만 있을 때의 상징적 인물이 성서에서는 자유자 이삭이 먼저 낳은 쌍둥이 형 '에서'다.

자유는 소중하다 자유가 아니면 새로운 존재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존재의 기반이요 토대다.

자유가 아무리 소중해도 자유가 자유로만 있을 때, 자유가 팥죽 한 그릇에 시선이 가 있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자유의 외피에 속을 채우지 못했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쭉정이가 되고 만다.

자유가 아무리 소중해도 자유가 자유로만 있을 때, 자유가 팥죽 한 그릇에 시선이 가 있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자유의 외피에 속을 채우지 못했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쭉정이가 되고 만다.

자유의 외피에 사랑과 긍휼의 속을 채우지 못하면 존재의 꽃은 피어나지 못한다. 나만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존재의 토대가 자유라할지라도, 속알을 채우고 여물어가지 못하면 종국에 쭉정이는 아무 쓸 데가 없어 불에 태워지고 만다.

 

 

 

 

 

***

이 글은 이상하게 읽혀지지 않았다. 몇 차례 읽고나서는 '어렵지 않고 깊이 있는 이 글이 왜 그렇게 안 읽혀졌을까?'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는 내겐 묘한글이었다. 

왜 그렇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성경은 한 개인이 구원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 믿는? 믿고싶은? 마음과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드리워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사랑을 기록한 책이라는 머리에 주입된 관념이 딱딱한 돌이 되어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고, 태생적으로 지극히 체제순응형 인간이라서 '자유' '자유자'란 개념이 애초부터 없어 아주 생소한 영역이어서 그랬던 것 같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는 이 행복한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 볼 때가 되었나?는 희망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