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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 안식일 - 자칼과 네케바

      '형상과 글' 카페    창세기 1장 연구편

                                                   휘오스님 글

 

         일곱째 날 안식일 -  자칼과 네케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1: 26- 2: 3)

자칼(male)과 네케바(female)

자칼과 네케바는 창조의 질서를 유지해가는 하나님의 신비요, 신묘함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여기 자칼과 네케바는 말 그대로 남성과 여성을 의미한다. 앞서 바다의 생물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에게 생육하고(열매 맺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생육과 번성과 충만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천국을 비유하고 있는 복음서의 한 예를 들어본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 31)  여기 겨자씨는 자칼(남자)이다. 네케바(여자)는 겨자씨가 심겨진 밭이다. 자칼과 네케바가 하나가 되니 거기서 나무가 자라고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 그러므로 자칼은 겨자씨와 같은 로고스, 하나님의 정신과 얼이 자칼이다. 네케바는 바로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을 일컫는다. 우리들의 마음뿐 아니라 뿌려진 씨가 자라서 깃들이게 되는 공중의 새도 또한 네케바이다. 앎은 어떤 의미에서 자칼이다. 앎을 받아들이는 것은 네케바이다. 앎(知)과 행(行)이 합일되면서 삶을 이룬다. 인간은 양과 음으로 지어졌다.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생물의 세계,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질서는 암컷과 수컷의 관계로 유지되고 있듯이 우리의 내면도 다를 바 없다. 거기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여자는 하나님의 모양이다. 이 둘이 하나로 결합될 때 열매는 맺히고 번성하며 땅은 비로소 나무로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하나로 결합될 때 비로소 거기서 자란 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 공중의 새를 무슨 수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인생은 새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새를 다스리라는 것은 새를 길들이라는 말일까?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 그것이 공중의 새를 다스리는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 22- 24) 공중의 새가 깃들일 나무가 없는데 무슨 수로 공중의 새를 다스릴 수 있을까. 공중의 새가 깨달음과 합리적인 하나님의 모사를 비유하고 각종 동물이 사랑이 구현되는 사랑의 각양 모양을 비유한다면 이들은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창조된 창조물이다. 이들이 성숙할 때에 비로소 열매 맺는 땅이 된다. 땅이 땅으로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땅은 거기 로고스, 곧 하나님의 정신을 받아 발아시키고 열매를 맺으며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깃들일 때, 즉 아름다운 숲을 이룰 때 비로소 땅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칼과 네케바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하라'는 뜻은 거기 마음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정신을 받아들여 키우고 가꾸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자칼은 씨요 네케바는 씨를 받아들이는 밭이다. 로소스의 빛은 자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자칼이다. 그것이 마음에 비추일 때 그 마음은 네케바요 이를 발아시키고 자라는 것은 나무인 셈이다. 나무아래 동물들이 집을 짓고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날아드는 것, 천국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라고 복음서는 비유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서들도 유사한 이야기가 많다. 마음 땅에서 앎과 삶이 하나로 결합,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통하지 않고는 생육이나 번성, 땅에 충만하거나 그 안에 만물을 다스릴 수 없다. 우주 만물은 자칼과 네케바로 구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의 속사람도 자칼과 네케바의 두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늘 따로 따로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분리되어 있다. 깨달음 따로 움직임 따로. 그러다가 지식이 정과 욕심과 결합하면 죽은 시체를 양산하고 사망을 낳는다. 이 또한 자칼과 네케바의 관계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는 하는데 어둠의 그림자, 스스로는 영롱한 깨달음의 빛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컴컴한 그림자가 배회하고 있다. 따라서 자칭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정복당하는 셈이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사 62: 4)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모양과 하나로 만나는 거기에 결혼의 비밀이 있다. 신랑이 신부를 취함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땅들이 만나지지 않으면 생육과 번성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정신을 잉태한 태는 참으로 복이 있으리라. 잉태한 자녀는 낳는 자도 복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나무가 무성한 숲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 4- 5)

안식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 2: 1- 3)

천지의 만물이 다하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마무리되었다. 일곱째 날! 안식은 창조의 마침이다. 창조의 마침은 새로운 일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생의 수고를 멈추게 하는 데에 있다. 인생의 수고가 멈추는 그곳에 하나님도 안식하신다. 하나님의 안식은 곧 인생의 안식이며 안식에만 거룩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생의 모든 소욕과 수고가 멈추는데서 깃든다. 우리의 분주한 손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곱 나팔과 일곱 재앙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그때마다 일곱 날의 창조가 하나씩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마침내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이루었다. 이제는 인생의 수고에 의한 삶이 아니라 안식의 삶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안식은 그냥 쉰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 이상 애씀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원리, 생명의 원리가 마침내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면 인생의 수고가 멈추는 것일 뿐이지 거기 생명의 심장박동이 멈춘다는 말이 아니다.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의한 삶이 전개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성은 창조의 아름다움이 피어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나의 함'을 멈추게 하지만, 함이 없는 함이 왕성하게 시작된다. 내가 일하기 시작한다. 애고의 일은 멈췄다. 거기 참나가 하는 일이 이제 시작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 의한 날들을 거쳐 마침내 일곱째 날에 당도했다. '날'(욤)은 시간 개념이 아니다. 언어의 표현상 일곱째 날이라고 하고 있지만 일곱째 날에 이르는 동안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그 모든 날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상태를 일컫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날들이며 창조되는 피조물의 관점에서 보면 곧 각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날은 시점이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 '나'의 실존이 진화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생명의 진화이지만 견고한 성의 해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창조가 진행되는 때마다의 상태다. 날(욤)을 시간 개념으로 보려는 것은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시 51: 13- 16)   

하나님이 하늘을 지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정작 모른다. 교리적인 고백으로만 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창조의 손길에 나를 내맡긴다. 우리는 그걸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곧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과정이다. 스스로의 삶을 살려는 것을 심판하는 심판이며 하나씩 새로운 세계를 빚어감이다. 우주는 질서정연한 창조의 원리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창조는 거기 그렇게 있는 자연 만물이 아니다. 물론 저 우주에 펼쳐진 자연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한 게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 그렇게 있는 창조는 나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창조가 지금 중요한 것은 거기 있는 그 하늘과 그 땅이 아니라 여기 나의 내면에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을 지으신 그는 내 속사람을 만들어 가고 내 안에 땅의 기초를 세우고 하늘의 장막을 펼치며 만상과 만물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내가 힘을 보탠 일이 없어도 부족한 것이 없었듯, 여전히 내 안의 세계에 지어가는 하나님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땅의 기초를 세울 때 한 삽이라도 보태거나 협력할 수 있는 줄 아시는가. 우리는 도리어 방해자다. 힘을 보태기커녕 생각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고 대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곧 나의 창조와의 대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심판이며 분쇄이며 해체이다. 이전 것을 해체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인생이 스스로 세워놓은 견고한 성을 와해시키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세워감이다. 인생은 스스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같은 것에서 염려와 불안이 있다. 거기에 창조주를 철저히 부인하는 부인이 있다. 그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그치라. 그 모든 것이 안식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마침 부호를 찍기 전에는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의 날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끌어내려 내 안에 채우려고 하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하나님 나라를 이 다음에 얻으려고 오늘 그렇게 부단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끌어 내리려는 수고에 불과하다.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그 열심을 이제 멈추자. 나를 나 되게 한 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정직하자. 그런데도 여전히 그 같은 사실을 외면한다. 내 속사람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걸 못하는 인생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겉을 가꾼다. 얼굴을 화장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인다. 속에 하나님의 창조가 없는 사람들이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겉을 화려하게 꾸며보는 것일터. 그렇게하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허망함을 속히 인식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네게로 돌아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수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코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사 45: 11- 18)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 7)

안식일과 사사로운 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4: 13- 15) 

내가 계획하고 내가 구상하고 기획하는 것, 삶을 염려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안식을 범하는 것이다. 동시에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가 곧 사사로운 말이다. 그리스도가, 창조주를 아직 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요 창조주를 거절하는 행위다. 내가 나의 삶에 대하여 내려놓은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금식하는 것이나 찬송 부르는 것, 성경을 연구하는 재미에 빠져있는 것, 이 모든 일이 에고의 즐거움을 고취시키는 것이라면 오락이 아니고 무엇이랴. 과부와 고아는 한가롭게 금식하며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이미 주리고 있고 헐벗고 있다. 해체되어 있다. 언제 오락할 겨를이 있겠는가. 오늘날 젊은이들만 오락에 심취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제공하는 각종 형태의 오락은 거룩을 훼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헛되게 하는 것이며 안식을 범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의 날'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안식의 규례를 삼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락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전쟁과 다툼이 없는 하늘, 공중전이 없는 하늘, 전쟁이 떠나야 안식을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 날을 축복한다. 과연 그것이 거룩일까. 축복의 날로 맞이할 수 있는가. 날은 '나'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날(욤)은 나의 여러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일쑤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이제 내려놓고 또 내려놓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테니 좀 더 눕고 좀 더 자자. 내는 모르겠다는 식이다. 그러ㅓㅎ게 내려놓고자 하는 것도 스스로 하고자 함이다. 그것도 소위 행위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쉬려는 것조차 '함'이다. 그것도 행위요 전쟁이고 일이다. 그 때는 제 칠일이 아니다. 안식일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의한 삶이 전개된다는 의미다. 사사로운 삶, 즉 에고에 의한 애씀이 멈추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왕성하게 피어난다는 말과 다름없다.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하기 위해 예수는 쉼 없이 일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의 행적이 있었다. 예수의 창조 행위는 베드로의 아상을 들춰내고 거기 하늘과 땅을 짓고자 함이었다. 베드로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요한복음 21장에 당도해서다. 스스로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처절한 인식은 처음 예수를 만났던 그 때의 갈릴리 바다로 다시 돌아갈 즈음에서다. 그는 스스로 하려 했던 모든 것이 쓸데 없음이 드러났다. 비로소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안식에 들어가면서 예수도 더 이상 베드로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다. 예수는 베드로를 떠난다. 이제 베드로의 삶도 안식에 들어간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나 베드로전후서의 베드로의 삶은 안식과 거룩의 삶이 맺은 열매이다. 안식이란 에고의 발걸음의 멈춤이지 생명의 심장박동이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베드로의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것마다 그의 말씀이 흘러나온다. 더 이상 사념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념은 사사로운 말이며 오락이다. 이제는 아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곧 그의 말이며 동시에 자신의 말이다. 그의 움직이는 모든 것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하는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가 무엇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그 '일'이 어느덧 되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삶이다. 하나님의 쉼은 곧 베드로의 일함이다.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모든 것을 다 한다. 나(에고)의 함은 신을 대적하는 것이지만 나(참 나)의 함이 아닌 함은 일백 퍼센트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따지고 보면 내가 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농사도 내가 짓는다.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곧 나의 일이며 곧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일이란 야곱의 유업, 열두지파와 열두 제자의 이름이 있는 곳, 열두 진주문이 있는 성전을 들어가며 꼴을 덛고 나오며 골을 덛는 들며 나는 '사랑'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