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에덴의 네 강이 각각 의미하는 것

      '형상과 글' 카페    자유게시판에 게시된 글입니다.

                                                                        휘오스님 글

 

* 에덴의 네 강이 각각 의미하는 바

강은 어디서 발원하는 걸까? 이미 앞에서 살펴봤다. 성서의 다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는다는 점이 분명하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에덴이 그 발원지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흐르는 강은 마음의 동쪽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다. 발원지는 에덴이요 성소인 셈이다. 성소의 지극한 곳은 지성소(코데쉬 하호다심)다. 따라서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하늘이란 지성소를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의 서사에 따르면 성소와 지성소로 형성된 마음의 세계가 에덴이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창 2: 10)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 47: 12)

1. 비손강  

강이 흘러 동산을 적시고 네 강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신다는 뜻은 더이상 타인에 의해 그 의식의 세계가 지배받지 않고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물을 공급받는다는 점이다. 의식의 직립보행이 시작되면서 독립이 시작된다는 것은 갈증을 해소하는 물의 공급처가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지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비밀한 형태로 있으며 은밀하면서도 치우침 없는 지극한 마음을 향해 있는 것이다. 신약의 방식으로 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고" (요 7: 38)는 예수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이다. 샘의 근원이 더 이상 야곱의 우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흘러나와서 마음의 네 영역에 흘러든다는 말이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 13- 14) 여기서 내가 주는 물은 결국 그리스도 그 기름부음에 의해서 솟아나는 샘물을 일컫는다. 여기가 수원지다. 

비로소 하늘의 숨결로 숨쉬기 시작하면서 사랑과 생명으로 인생이 적셔진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생명의 강은 네 개의 강 근원(로쉬, 아르케)이 된다고 하였으니 동산은 네개의 영역 혹은 네 범주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다. 에덴의 이야기 방식에 의하면 마음은 네 개의 범주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비손강으로 흐르는 영역이다. 성서는 대개 가나안을 중심으로 지리적인 구분을 하고 있다. 남방과 북방과 동방과 서방이다. 그렇다면 비손강은 무엇을 비유하고 상징하는 걸까?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서 어떤 지점일까?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미노도 있으며 (창 2: 11- 12) 

'피숀'은 '푸쉬'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의미는 '자라다'  '살이 찌다'  '퍼지다'는 뜻이다. 하윌라는 '훌'은 꼬다, 빙빙 돌리다' 혹은 (특히 해산의) 진통을 겪다, 또는 두려움; 상징적으로 '기다리다' '곡해하다' : - 배다, 낳다, 새끼를 낳다, 춤추다, 몰아내다, (고통으로) 근심에 빠지다,등의 뜻이다. 에덴동산의 자연적 지명과 위치가 오늘날 어떤 특정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식으로 전재한다면 이 글은 정당성이 없다. 그런 가정이나 가설을 중심으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도리어 에스겔 47장의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글이 전개된다. 

생각의 세계가 생명의 지룃대에 의해 작동한다면 생각의 지혜를 일컫는 것이 비손강으로 비유된다. 생각의 세계에 말씀의 씨가 뿌려지면서 생명의 원리에 의해 생각이 작동, 작용한다는 것, 하여 지혜와 총명이 사랑의 원리에 따라 활동한다는 게 비손강의 흐름이다.

서방은 대해라 남편 지계에서부터 맞은편 하맛 어귀까지 이르나니 이는 서방이라( 겔 47: 15)  

하윌라 온 땅을 돌아 흐르는 비손 강이 흘러드는 곳에는 금이 나고 향료와 홍옥수와 보석이 나온단다. 무슨 뜻일까? 사랑에서 생명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생각의 세계는 말씀을 잉태하고 진통을 거쳐 새끼를 낳듯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보석같은 진리(말씀, 로고스)와 깨달음의 열매가 그 땅에서 생성된다는 뜻이겠다. 의식의 세계에서 보석이란 보석같은 깨침이다.  깨침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마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이해력은 지성의 활동이고 지성의 활동이란 단순한 기억을 넘어선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마음의 하늘에는 번개와 같은 예지의 빛이 반짝인다. 타인에 의해 전해진 지식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각성하는 지각은 의식의 세계에 빛이며 생수인 셈이다. 하여 하윌라 온 땅으로 흐르는 비손 강이란 그 밭에서 감추인 보화를 캐내는 것을 향하여 흐른다. 하필 강으로 표현할까? 깨침은 타자로부터 제공된 지식을 근거로 한 분별지를 넘어서는 무분별지의 지혜요 자각이기 때문에 기쁨을 수반하고 마음을 적셔주기 때문에 강물로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

반석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갈한 목을 축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달리 말한다면 황무지 같은 마음의 땅에 강물이 흘러 (야웨의 비가 내리는 것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같은 표현이다)들고 법궤에 담겨 있는 로고스(깨침이 있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 보석과 같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는 의식의 왕성한 지성적 활동이다. 비손강이 하윌라 온 땅에 흘러드는 것은 이같은 의식의 왕성한 지성적 활동을 상징한다. 생각의 세계가 지성소의 빛을 지렛점 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이기적 관점에서 생각의 세계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숨겨있는 비밀의 세계(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에 작동한다.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단초가 시작되는 것이라 하겠다. 

성소에는 각종 성물들이 있다. 성물들은 조각목에 금을 씌워ㅓ 만든다. 인생들 일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장삼이 사의 지혜들로(?) 새로 태어난다. 비손강 물이 흘러들어 생성되는 금과 보석같은 진리로 조각목을 감싸서 성전의 기물이 되게 한다.(사 60: 6, 출 28: 12- 15, 겔 28: 12- 15, 시 72: 15 참고)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물을 드리듯 비손 강가에서 생성된 금이나 몰약 그리고 각종 보석은 찬양과 감사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에스겔은 두로 왕을 책망하면서 에덴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한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에덴에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실과를 먹는다. 에스겔도 같은 이야기를 두로 왕의 모습을 통해 그려낸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목에서 그것은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에덴의 비손 강과 네 개의 강을 이해하는 데 에스겔은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너는 온전히 인친 자였고) 지혜가 충족하여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강석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 속에 있는 불의 (아벨라타 바크)가 드러났도다.(겔 28:12- 15)

에덴 이야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에 대해 에스겔이 그리고있는, 두로왕 버전인 셈이다. 에덴의 첫 번째 비손 강은 각종 보석들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것은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2. 기혼 강 -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

성서에는 기혼 강이 구스 온 땅에 둘렀다는 간략한 표현만 나타난다. 옛 사람들은 당시 그들을 둘러싼 자연환경 특히 산이나 강을 빌어 이야기를 만들고 영성을 전한다. 구스 땅은 성서에서 에티오피아 그리고 스바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영어 성서들은 구스를 에디오피아로 번역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보면 구스 땅과 애굽은 남방에 해당한다. 하여 기혼 강은 남방을 향하여 흐르는 게 맞다.

남방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봇 기데스 물이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는 그 남방이요

기혼 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기혼은 그 어원이 '기하'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물을 내뿜다, 해산의 수고, 터져 나오다'라는 뜻이며, 솔로몬에게 기름이 부어지고 왕으로 선포된 예루살렘 근처의 계곡과 이름이 동일하다. 구스에서 스바의 여왕이 금은 보화를 선물하면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구하는 것을 보면 기혼 강에서 기름부음 받은 솔로몬의 지혜가 스바 여왕을 통해 구스까지 흘러 들어가는 것은 분명하다.

스바의 여왕과 같이 우리 내면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력이 결핍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혼 강은 구스 온 땅에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기혼 강은 구스 온 땅에 흘렀다고 한다. 구스 온 땅이란 성서에서 남방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남방의 상징은 생존을 우선하는 사고 방식이다. 가뭄과 기근이 들면 언제나 남방에 가서 식량을 구한다. 아브람도 그랬고 야곱도 그러했다. 애굽과 구스 곧 남방은 생존을 우선하는 사고가 지배하는 땅이다. 따라서 기혼 강이 구스 땅에 흘렀다는 것은 하늘의 영적 지혜가 생존 우선주의의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영역에도 흘러들게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걸 육체의 생존 관점, 빵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세계관이 남방을 지배한다. 빵이 얼마나 중요한가? 육체가 생존하려면 빵이 있어야 한다. 성서에서 애굽과 가나안은 늘 시소 게임하듯, 성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나타난다. 빵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늘 긴장 관계에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일갈한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는 육체의 세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애굽의 세계관이 가나안의 세계관을 지배할 수도 있고 가나안의 세계관이 애굽으로 흘러들어 이해력을 넓히고 있음을 비유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생명을 해산하듯, 말씀이 터져 나오고 지식의 세계가 확장한다. 물론 에덴에는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이 있다. 생명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선악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 그에 따라서 그의 마음의 세계는 전혀 다르게 기경된다. 선악의 관점은 늘 강팍하게 하고 황무지로 다시 되돌린다.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음은 타인을 향해서나 자신에 대해서 옳고 그름으로 나누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삶과 생명의 현상을 바라보며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한다. 에덴 이야기에서도 이에 대한 갈림길을 담고 있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어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 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여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그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핫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습 3: 5- 10)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사 43: 3)

3. 세째 강의 이름은 핫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보면 북방이다. 따라서 티그리스 강은 북방으로 흐르는 강이다. 앗수르 동편이라 하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북방으로 흐르는 강이다. 앗수르 동편이라 하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보면 북방으로 흘러 북동쪽으로 흐른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북방은 대해에서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스닷 어귀까지니 곧 하맛과 브로다며 다메섹 지계와 하맛 지계 사이에 있는 시브라임과 하우란 지계 곁에 있는 하셀핫디곤이라 그 지계가 바닷가에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요  그 지계가 또 북방에 있는 하맛 지계에 미쳤나니 이는 그 북방이요 (겔 47: 15- 17)

힛데겔은 헬라어로 티그리스라 표기한다. 힛데겔은 헤데크 곧 '가시나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유추한다. 오늘날도 살아있는 강 이름이다. 티그리스와 네 번째 강인 유프라데 강은 현재도 흐르고 있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앗수르는 니느웨와 함께 북방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성서의 전체적인 그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이다. 하여 애굽의 노예 상태로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순례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정시대를 거친 후 다시 북방민족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남방민족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인생이 자유와 생명을 찾아 가나안에 정착하는 것도 잠시, 또다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애굽은 생존 욕구에 속박됨을 의미하고 북방에 사로잡히는 이야기는 이론과 논리, 교리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북방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여전히 '가나안'을 중심으로 한 마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이성적 활동, 지식과 도그마(교리)적 노예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인생을 상징한다.

따라서 북방으로 흐르는 강물은 이성적 활동의 인식능력, 논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그 곳, 곧 북방으로 성전의 동편에서 시작된 강물이 흘러들게 된다는 점이다.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리는데 논리와 이성적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가? 모든 문명은 이론과 추리, 논리력을 바탕으로 발전한다. 현대 신박한 문물들은 논리력의 산물이다. 의식의 세계의 도그마도 논리력으로 조직한다. 과학 문물은 논리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지만 의식의 세계의 논리력은 대개 편견을 토대로 조합된다. 따라서 거기서 논리력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옳음을 주장하는 고집으로 작동한다. 종교적 편견을 낳고 자신이 갇혀 살고 있는 자신만의 동굴 속 우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와같은 정신 현상의 한 형태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선악의 나무이야기가 그 지점이다.

북방으로 흐르는 강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의식의 속성에 마음에서 타고 흐르는 지성소에서 발원한, 에덴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든다는 이야기다. 북방 민족이 활개치고 독재하던 그곳에 생명의 기운이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세 번째 힛데겔을 통해 옛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부분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4.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동방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이니 북편 지계에서부터 동해까지 척량하라 이는 그 동방이요

'페라트'는 히브리어요 유프라테스는 헬라 명칭이다. 그 의미는 '솟아나다'는 의미의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늘날 유브라데 강과 에스겔에서 말하는 동방은 방향은 맞더라도 에스겔에서 언급하는 지역과는 잘 맞지 않는다. 다만 4대강이 이야기에 상징적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반드시 특정 지역과 일치하느냐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이 이야기가 당시 주변 자연 현상과 그 시대의 강과 산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지리적으로 반드시 정밀하게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4대 강 이야기를 통해 순례기를 그리고 우리 내면을 그려내려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니할- 상징적으로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을 의미)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렘 2: 18)

창세기는 아브람 언약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기도 하다. 에덴의 4대 강 이야기가 아브람과의 언약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 18)

큰 강 유부라데는 가장 표면적인 인식과 지식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기억력을 통해 쌓아지는 표면적 지식의 세계에 생명의 지렛점이 작동하여 기억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보 집적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자신의 이기적 자아를 위해, 경쟁과 정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집적된 기억의 지식이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큰 강에서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갈증이다.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다. 누구나 열망하며 추구하는 바다, 이곳에 에덴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들면, 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들면 애굽의 하수가 새로워진다. 유브라데의 강물이 새로워진다.  죽은 물고기로 악취가 나는 죽음의 강을 되살리는 이야기들이 성서 곳곳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