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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형상과 글' 카페   자유광장에 게시된 글입니다. 

                                                          휘오스님 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 7)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등장한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적절치 않다. 에덴의 이야기 구성에서 아벨을 죽이는 자로 등장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상징 이야기 구조를 조금 세밀하게 들여다보자.

가인은 어원적으로 '얻은' 혹은 '소유'를 의미하고 대장장이, 장인, 전문가 혹은 기술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에덴 이야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상징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분히 심리학적 해석이라고 질타와 비판이 있을테지만, 현대 심리학에서 언급하는 언어를 빌어다 써본다면 다음과 같이 해볼 수 있겠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두 요소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생물학적인 성의 구분이 있지만, 생물학적 성과 관련없이 인생은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산다. 남성에게도 남성성은 물론이고 여성성을 가지고 있고, 생물학적 여성에게도 여성성은 물론 남성성을 지니고 산다.  XY 성염색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무엇이 더 우선 나타나느냐에 따라 생물학적 성의 구별이 생기는 것일 뿐이다. 고대인들은 특히 히브리인들과 희랍인들은 의식 활동의 결과물인 개념들, 명사 조차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주고 있다. 하여 남성명사의 어형변화, 중성명사의 어형변화 여성명사의 어형변화가 다 다르다. 한글 명사에는 성의 구분이 없지만 성서의 생산자들에게는 그같은 구별이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왔고 동시에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다수의 유럽과 그 주변민족들 언어는 그같은 영향아래 있어서 사소한 개념들조차도 여성과 남성 중성을 구분하는 언어적 습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 현대에서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수많은 새로운 용어들이 세분되어 생겨났다. 칼 융의 심리학 용어를 빌러보면 인생의 남성적 아니마(남성 속에 있는 무의식적 여성성)와 여성적 아니무스(여성 속에 있는 무의식적 남성성)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두 존재 양태가 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나는 두 존재 양태가 가인과 아벨이라는 점이다. 에덴 이야기의 등장 인물들 속에서  이같은 현대의 개념들을 읽어내는 것이 터무니 없는 것일까? 고대인들도 여전히 인간이고 더 깊은 영성의 지혜를 이야기 속에 담고 있다. 비록 덩어리로 이야기 해도 풀어보면 같은 것이 그 깊은 곳에 담겨있고 숨겨있다. 현대인들이 무엇이라 풀어내든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문제이고 옛사람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원형에 담겨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 속에 현대인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새롭게 개념화 된 것들이 원형적인 이야기 속에 담겨있으리라는 것은 사실 너무도 자명하다. 오늘의 언어로 옛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생동감이 훨씬 더 깊어진다.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역동적 활동으로 태어나는 처음 사람의 존재 양태는 반드시(?) 가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복해 말하지만 인생은 육체의 성의 구분이 있듯, 의식의 마음의 세계에도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남성성은 대체로 진취적인 의식이고 여성성은 수용적인 의식이라 하겠다. 남성성은 끊임없이 사냥하고 포획하고 무엇인가를 얻고 소유하므로 생존을 유지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의식의 여성성은 끊임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새로움을 잉태해서 생산해내려는 특성을 지닌다 하겠다. 의식은 그렇게 역동적으로 생명현상을 현출한다. 대표적으로 호크마 지혜가 남성이요, 아버지라면 비나 총명은 곧 이해력은 여성이요 어머니다. 

가인이란 소유로 자기 존재를 인식하려는 특성을 일컫는다. 창세기 1장이 엘로힘 문서라 하고, 창세기 2-3장은 야웨 엘로힘 문서이며, 그에 반해 창세기 4장은 야웨 문서다. 물론 같은 에덴 이야기지만 4장에서 갑자기 변주가 이뤄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는 다시 말하면, 창세기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엘로힘 하나님이 뒤로 물러가고 오로지 야웨로만 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주어가 야웨 엘로힘에서 엘로힘은 떨어져나가고 야웨가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구약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이 개념들이 곳곳에서 서로 다르게 배치되고 있지만, 창세기 4장에는 단독으로 야웨가 이야기 혹은 문장의 주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에덴 이야기의 구성이 참으로 놀랍다. 야웨의 등장은 "나"라고 하는 자의식의 발현이 가장 고조됨을 의미한다. 즉 야웨는 "그는 그다"와 함께 "나는 나다"로 이행될 때 나타나는 그 신성성이다. 그러고보면 "예히예 아쉘 예이혜, 나는 나다.(출 3: 14)의 실현이 에덴 이야기의 서사에서 마침내 창세기 4장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두 존재의 자의식이 등장한다. 에덴 문학에서는 처음 사람이 가인의 존재 양식이고, 두 번째가 아벨의 존재 양식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갖게 되는 두 개의 자아의식이란 말이다. 하벨은 어원학적으로 "텅 빔"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의 전도서 1장 2절에서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을 할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단수 하벨과 복수 하벨림을 연속해 사용하므로 헛됨을 극히 강조하는 강조어법이다. 따라서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이란 아담의 두 번째 정체성인 헛됨과 空을 의미한다. 솔로몬의 그 모든 영화가 인간이 처음 지향하는 가인이라면 그 모든 영화의 헛됨을 발견하고 티끌과 재와 같음을 다시 재발견하는 것이 아벨이란 점이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다시 예언한 바 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위대한 예언이 아담에게서는 창섹 4장과 5장에서 성취된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 또 아벨을 낳는다. 두 번째 정체성이 혼재되고 투쟁과 전재의 시기를 거쳐 다시 셋을 낳고 있다. 여기서 뱀의 유혹을 통해 큰 자를 지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던 아담이 다시 작은 자의 정체성인 아벨을 거쳐 셋을 낳게 되는 것, 이것이 아파르(흙)였던 아담이 다시 아파르(흙)로 돌아가는 위대한 순례의 여정이다. 에덴 이야기는 따라서 고전 중의 고전이요 문학 중의 문학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예언을 단지 장례식장 주례사로 읽는 이들은 성서 문학의 진면목을 전혀 읽어내지 못한 사람들의 소치다.

에덴 이야기에서 주 자아의식 곧 가인과 아벨이라는 정체성이 비로소 창세기 4장에 가서야 뚜렷하고 선명하게 싹튼다고 보면 된다. 처음 사람이 가인이라는 뜻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오로지 소유(재물, 지식, 명예, 기타 인간이 탐하는 무엇이든)를 통해 강력한 자아의 상을 갖게 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을 가인의 이미지로 인식하며 살았더라도 가인으로 만족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인의 형상으로  구축된 자아 인식에 대해 회의하게 되고 가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모든게 헛되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이 존재가 바로 아벨이다. 하여 아벨은 헛됨, 텅빔, 空, 이라는 의미를 이름에 담고 있다.

대개 인생은 어느덧 이 두 개의 자아의식이 혼재되어 '이런 존재가 나이다'라는 다툼과 갈등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하여 창세기 4장은 '야웨' 문서로 기록되고 있다. 본래 야웨란 모세에게 "나는 나다"로 계시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창세기 4장은 우선은 가인이 득세함을 말하고 있다. 인생은 덧없다거나 소유를 주장해 본들 그것이 나의 본질이 될 수 있겠는가와 같은 자아의식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소유에 목을 매고, 더 큰 이익을 추구하며 선(善)을 실현하여 자신을 키워가려는 본능적 자아, 선악의 세계에 더 큰 지배를 지배하게 마련이니, 너도 나도 큰 자의 상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때가 있다는 의미다.

하여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인생이 흙(아파르)이라는 의식이 한 켠에 찾아왔다 하더라도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가인의 제사 양식은 가인의 존재가 펼치는 삶의 양태를 반영한다. 가인의 제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해 살게 되는 존재 양식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네가 좋은 것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로 고쳐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의 형용사 '토브'(좋다)가 처음 동사로 쓰였다. 창세기 1장에서 형용사지만 서술형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 7절에서는 사역동사로 쓰인다. 따라서 "하로 임 테티브"를"네가 선을 행하면"으로번역하면 곤란하다. "네가 좋은 것을 하게 하면 " 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것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인의 삶이 그러했다. 처음 사람의 삶의 방식은 대개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이 이야기에 담겨 있다. 반면 아벨의 제사 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삶의 방식을 제물로 드리고 좋아서 하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비록 가인의 득세로 아벨이 죽임을 당하지만 에덴 문학은 아벨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마치지 않는다. 다음 이야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