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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형상과 글' 카페     자유광장에 계시된 글입니다.

                                                                       휘오스님 글 

 

원시복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에덴의 이야기는 창세기 2장 4절부터 시작된다. 에덴의 이야기는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복음서다. 성서엔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에덴의 이야기가 다목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거기서 전하고자 하는 천로역정(天路歷程)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신화적 서술 방식을 띠고 있지만 이 짧고 간결한 이야기는 수많은 메세지를 담고 있는 최고의 복음서라 해도 무방하다.

에덴 이야기는 하늘과 땅으로 비유된 인간내면의 변화를 계보로 표현한다. 하늘이 새로나고 땅이 새로 태어나는 이야기다.

에덴의 이야기는 천지의 낳고 낳음(계보)이라(창2: 4)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에덴이야기에서는 그 마음의 형상이 동물의 약육강식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아다마(땅, Ground)로 비유한다. 비록 사람은 사람이로되 마음의 형상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그 마음의 형상이 짐승이라는 의미이며, 정글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마음의 형상을 일컫는다. 이때 사람의 마음은 야웨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는 상태요, 경작할 사람이 없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시고 있는 상태라 비유한다.(창 2:5- 6) 단지 생존을 위한 본능을 중심으로 마음이 작용하는 상태라 하겠다. 야웨 하나님, 곧 "나는 나다"인 인식의 눈이 작동하지 않은 원시상태의 마음이다. 사람은 본래 처음 부득불 초기화된다.

창세기 2장 7절의 주어는 야웨 하나님이다. 야웨 하나님이 아다마로부터 흙사람을 창조(아파르민 하아다마)하신다. 여기서 아파르란 우리말로 티끌과 먼지와 같이 잘게 부수어진 분토를 의미한다. 굳은 땅을 쟁기질하고 돌맹이를 골라내어 기경한 고운 밭의 흙가루와 같다. 마태복음 13장 마음의 땅에 비유에 등장하는 옥토와 같은 땅을 일컬어 '아파르'라 하고 이를 일러 비로소 아담(사람)이라 칭한다. 아담은 아다마로부터 나온 흙가루(아파르)이다. 

아다마가 그 마음이 짐승의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아파르 아담은 그 마음의 형상이 비로소 사람의 형상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나는 티끌과 같습니다"라는 아브라함이나 시편 기자들의 고백처럼 그렇게 낮아진 마음을 일컫는다. 자신은 티끌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의식이 찾아오는 때를 일컬어 비로소 '사람'이라 칭하고 '아담 아파르'라 한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루아흐)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마음이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던, 하여 오로지 생존본능에 충실해 약육강식의 상층부를 지향하고 있던 존재에게 생기(니크마트 하임)의 바람이 부니 야웨를 향해(레) 서 있는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새나 동물도 네페쉬 하야이다. 산 혼이다. 성서는 본능에 충실한 생물을 일컬어 네페쉬 하야라 한다. 다만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마음의 상태가 야웨 곧 자기의 자신됨을 지향해 서 있는 존재의 이행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레네페쉬 하야라 한다. 이를 성서는 거듭 태어났다고 한다. 다시 태어남이란, 마음의 상태가 짐승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의 변화가 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구원(소조)이라는 성서의 독특한 명칭이 등장한다. 무명이란 사람의 사람됨에 눈뜨지 못하고 오로지 동물의 형상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짐승의 형상을 일컫는다. 여기서 구원은 단회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명사이기보다는 동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마음이 짐승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거듭 태어났다면, 이제는 사람의 됨됨이의 꼴을 갖춰가고 사람의 삶을 살아내야 하듯, 구원이란 사람의 삶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 있다. 이를 일컬어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성서는 말한다. 아울러 사람의 아들을 낳을 때 사람은 또한 사람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다. 창세기 2장은 마음의 땅이 기경되어 아파르 아담이라는 새로운 사람의 형상을 에덴동산으로 비유한다. 에덴동산이란 동쪽에 세워진 동산이다. 동쪽은 지리적으로는 해가 뜨는 곳,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동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유대인들의 동쪽은 언제나 시온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리적 동쪽은 아다마가 지향하는 동쪽이나 아파르 아담이 지향하는 동쪽은 언제 어디서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동쪽이다. 야웨 하나님을 향하여 (레) 서있는 존재이니 마음 깊은 곳 지성소의 빛을 향하여 서 있는 마음의 땅을 일컬어 에덴동산이라 비유하는 것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동산지기가 되었다. 그 땅은 아다마와 달리 각종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있고 동산 중앙에도 두 나무가 있는 동산이다. 동산지기가 된 아파르 아담은 아내를 맞이하게 되고 아내를 향해 갈비뼈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다. 성서는 사람의 형상을 지닌 아파르 아담이 되었다 해도 사람이 사람다움으로 자라가야 하듯,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야웨 하나님의 의로 옷 입고, 사람다움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애굽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비록 기쁘고 행복하다해도 광야에서 애굽의 습성을 모두 벗어버려야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 출애굽이야기가 전해주는 바다. 광야는 애굽의 옷을 벗는 장소요, 벌거숭이가 되는 고난의 장소이기도 하다. 출애굽이야기의 애굽은 아다마와 짝을 이루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하는 것은 아파르가 되어가는 과정과 같다. 출애굽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인 셈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에덴 이야기와 그대로 평행이론이 적용된다. 에덴에서 아담과 여자가 벌거벗은 채 있으면서 부끄러워 아니하고 있을 때 동산의 뱀이 선악의 지식으로 유혹해 미혹에 빠트린 것과 같이, 왕의 제도를 도입하여 야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몰아내었을 때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고 마침내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만다. 동산에서 야웨 하나님을 선악의 하나님으로 변모시키고 영적 지식의 노예가 되어간 것같이 이스라엘 땅에 영지주의가 판을 치고 깨달음이 우상이 되어가는 줄 모르는 상태에 머물게 되었을 때 곤고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나서야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에덴의 이야기에서는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열매를 먹고나서야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부끄러움이 드러나자 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한다. 따라서 선악의 나무는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인생은 누구나 이같은 질곡을 겪게 된다.

광야에서 애굽의 모든 속성을 벗어던진 후에 가나안에 입성했다 해도 새로운 옷을 입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지식으로 옷 입었다. 지성소의 야웨로부터 흐르는 기름부음 곧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름부음을 외면한 채(벌거벗은 채)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로 양식을 삼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입었다. 인생도 그러하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의 칼아래 짓밟히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의 예언을 만나게 된다. 창세기 3장 19절은 에스겔의 예언을 방불한다.

전에는 내가 그들로 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겔 39:28)

네가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 14) 

이는 다시 번역해 볼 필요가 있겠다.

네가 흙(아다마)으로 돌아가는 동안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 네가 그곳에서 취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키) 그러나 (키) 너는 흙(아파르)이다. 그러므로 (키) 흙(아파르)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 번역 성경만 보면 3회 등장하는 '흙'이 동일한 '흙'인 줄 알게 된다. 아니다. 처음 흙은 아다마(아다마)요, 그 다음 두 번은 (아파르)다. 황무지 곧 거기가 애굽이든 바벨론이든 아다마에 머물게 되면 수고의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비록 다시 아다마의 덧 (바벨론)으로 잠시 빠졌다 하더라도 너는 아파르였기 때문에 아파르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19절에는 히브리어 문장어는 '키'라는 접속사가 3회 등장한다. 참고로 키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키):는 히브리어 키는 (함축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접속사 또는 부사로 사용됨. '아래와 같이' '이기 때문에, 이므로' '확실히'  '제외하고는'  이므로 

창세기 3장 19절에는 천로역정의 긴 여정 중 만나게 되는 위대한 예언이요, 위로다. 기나긴 바벨론 포로 생활중에 듣게 되는 에스겔의 예언이요, 마른 뼈다귀에 새삼 새 살이 붙게 된다는 에스겔 골짜기이며 예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덴 이야기에서 "아파르(흙)가 되리라"는 예언은 고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다. 아파르는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기 위해서는 아파르가 있어야 한다. 아파르는 누구든 각자의 자기됨이 시작되는 비밀이다. 비로소 야웨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파르에 숨겨있다. 아파르는 성서 전체의 키워드다. 뱀의 먹이가 아파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뱀은 아파르를 먹이로 삼는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 14) 

따라서 창세기 3장 19절의 아다마는 애굽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땅을 비유한다. 비록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된다는 점에서 애굽과 바벨론은 비슷한 유형을 띠지만 그 형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에덴 이야기에서 애굽은 2장 5- 6절 안개만 올라오는 땅 하아다마(황무지)에 머물고 있는 상태라 하겠다. 창세기 2장 5- 6절이 출애굽기 이야기에 대응시켜 본다면 애굽에 상응한다는 말이다. 애굽에 비해 바벨론의 하아다마는 선악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고 있어서 더 강퍅한 상태라 하겠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보면 북방민족이고 고대문명의 지혜와 지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선악의 지식이란 북방민족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야기와 구조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에덴이야기 속에는 출애굽 이야기와 바벨론의 포로 이야기, 그리고 출바벨론 이야기, 포로 귀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스룹바벨 성전의 이야기까지 함축되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따라서 에덴 이야기의 변주에 불과하다. 신약의 이야기조차도 에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들인 셈이다. 그런점에서 모든 이야기의 원형 곧 아르키 타입이 에덴 이야기고 또한 창조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되새기에 된다. 에덴 이야기는 성서 모든 이야기의 밑그림이고 바탕이며 원형이다. 그 외 모든 이야기들은 에덴 이야기의 변주곡이고 그 시대마다의 새로운 버전일 뿐이다. 사복음서는 물론이고 요한계시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