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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 창조

   '형상과 글' 카페  요한계시록 한글주해

                        김 창호 님 글

 

여섯째 날 :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계 19: 1- 20: 14)

***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 

*육신의 첫 사람을 땅의 새로운 사람으로 새롭게 지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새 창조다.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길을 걷는 자에게 새 창조는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되어 계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계시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떠나는 것이 죄요 자기의 길을 걷는 것이 악이다. 바벨론은 자기의 생각을 좇아서 자기 길을 걷는 자들이 이 땅 위에 세우는 나라다. 사람이 시험에 빠져들면 자기 생각을 좆게 되고 자기 생각을 좇는 자마다 자기 길을 걸으며 악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생각과 길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인줄 오해하고 있다. 종교, 도덕, 윤리, 사회정의, 철학, 권세, 교리 등등은 사람의 생각이요 길이다. 이것들은 육신의 첫 사람에게 속한 것일 뿐이다. 영의 마지막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좇아서만 지어진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좇아서 사람이 새롭게 지어지는 일에 대하여 이미 창세기에 자세히 계시 되었다. 그 계시를 좇아서 육신의 첫 사람이 어떻게 새롭게 지어지는 지를 살펴보자.

첫 창조의 여섯째 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하셨고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 안에서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였다. 하나님이 육신의 첫 사람을 창조하시고 다시 영의 새 사람으로 지으시는 창세기의 계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있다. 먼저 창조(바라)와 새롭게 지으심(아사)의 관계가 무엇인지 형상과 모양의 관계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그 알파는 육신의 첫 사람이요 그 오메가는 영의 나중 사람이다. 첫 창조는 '바라'이며 새 창조는 '아사'이다. 창세기 1장 24절과 25절을 잘 읽어보면 땅의 생물도 창조된 후에 다시 완성 되었다. 여섯째 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베짤메누 키드무테누)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것 안에서 다스리게 하자"하셨다. 위 말씀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드시는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그가 사람을 창조하시면 어떻게 새롭게 지으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이것이 분명히 이해되지 않았다. 창조(바라)는 알파요 새롭게 지으심(아사)은 오메가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 그의 모양과 같이 지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사람을 다시 새롭게 지으신다. 그러면 그 육신의 첫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는 일은 언제 있었는가. 창세기 1장 28절부터 그 일이 시작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그의 형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을 우리의 형상 안에서 만들자(아사)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지으려는 하나님의 생각은 그의 마음의 일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의 마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창조되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마음을 생명과 거룩과 사랑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런즉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다. 형상은 알파요 모양은 오메가다. 형상은 알파요 모양은 오메가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지어지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본받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닮는 것이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지어지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을 닮는 존재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창조된 것은 첫 창조요, 그 마음을 닮은 실존이 되는 것은 새 창조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닮도록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다스리는 일(reign in man)과 사람이 모든 생물 안에서 다스리는 일(reign in living creatures)이 하나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 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 '안에서 다스리라' (resin in)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마음 안에서 창조하신 것은 알파요, 그의 마음을 닮게 하시는 것은 오메가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다스리고 사람은 모든 생물 안에서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다스리고 사람은 모든 생물 안에서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은 그와 하나된 아들들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사람 위에 군림하고 (reign over) 사람은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알았다. 사람들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자를 신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들 역시 모든 것 위에 군림하게 하며 그것을 선으로 여기고 좇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사람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자녀의 마음과 실존이다. 그러나 선악지식은 실존을 버리고 소유를 취하게 한다. 캄캄한데 있는 자에게 빛이 비취어 오면 그 빛 안에 거할 뿐 그 빛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선악지식으로 사는 자는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리하게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 한다.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이 비취어 오면 영의 나중 사람은 그 안에 거한다. 그러나 첫 사람은 그 욕심을 좇아 소유할 수 없는 그것까지 소유코자 하며 짐승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 복되다.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존재다. 모든 물고기는 물이 아니지만 물과 하나된 존재다. 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과 같다. 물은 물고기에게 생명이요, 거처요, 운송 수단이요, 그의 모든 것이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죽음에 직면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은 그의 자녀의 생명의 근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그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버린 자는 누구든지 즉시 멸망에 직면한다. 물고기가 물과 일체적 관계에 있는 것 같이 사람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일체적 관계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며 그의 마음을 닮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의도 아니며 종교도, 도덕도, 윤리도, 권세도, 그 무엇도 아니다. 세상의 가치는 세상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의 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를 좇으며 하나님의 의를 좇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사람의 의는 바벨론을 세운다. 

*창세기 2장 7절에 "야웨 하나님이 땅으로부터 '하아담 아파르'(먼지 같은 존재인 그 사람)를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산 혼으로 되었다." 하셨다. 창세기 2장 7절은 그간의 번역 성경들에 크게 오역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창조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창조되었으나 그는 땅에 속한 자다. 그러므로 그를 하늘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시려고 그를 다시 '하아담 아파르'로 빚으셨다. 이것은 야곱은 창조된 자요 이스라엘은 빚어진 자라 함과 같다. 창조된 아담은 이제 새 창조를 위하여 '하아담 아파르'로 빚어졌다. 그 코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산 혼으로'(레네페쉬 하야) 존재하게 되었다. 모든 생물도 산 혼(네페쉬 하야)이다. 그들은 산 혼일지라도 육체의 삶을 산다. 사람만이 이때에 그 생명이 육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산 혼에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숨쉬는 산 혼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영과 생명으로 새롭게 하나님이 아들의 실존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창세기 1장과 2장 이후의 기록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1장은 E 문서에서 비롯되었고 2장은 J 문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학자들의 자의적 구분일 뿐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알파에서부터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일관 되어있다. 첫 창조와 새 창조는 하나님의 일관된 계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창세기 1장은 엘로힘의 창조기록이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존재적으로 소통할 사람이 없었다. 존재적 소통은 존재와 존재의 소통이므로 1장에서는 불가능하다. 창세기 2장에서 비로소 존재의 하나님(야웨 엘로힘)이 계시 될 수 있었다. 이는 마치 아기가 태어난 후 어머니와 대면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어머니를 아는 것과 같다. 창세기 1장과 2장 이후는 두 하나님을 말하는 것도 두 문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새 창조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엘로힘은 야웨 엘로힘으로, 아담은 하아담 아파르로 불리웠다. 그리고 '하아담 아파르'는 아담이 자기를 흙가루로 드려서 야웨 하나님께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는 정체성이다. 

*어머니는 아기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알파는 아기가 그의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요 오메가는 그가 태어난 후의 일이다. 그 기억이 매우 상이하다고 해서 두 어머니의 일도, 두 아기의 일도 아니다. 다만 처음과 나중의 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또 새롭게 지으신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의 중복기사가 아니라 첫 창조와 새 창조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창조된 자요 하아담 아파르는 빚어진 자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첫 사람 때의 이름이 있고 둘째 사람 때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적 변화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이해되지 않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죄 사람을 받았다는 이들이 하나님의 마음 밖에서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 죄(하타)란 원래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다. 그러면 하나님이 산 혼으로 있게 된 '하아담 아파르'에게 주신 과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라 하신 것이다. 그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도, 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이 아니며, 내 길은 너희 길이 아니라"하셨다. 인생이 스스로를 세우고자 하는 모든 종교, 도덕, 윤리, 사회정의 등등은 사람의 생각이요 길일뿐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 죄다. 자기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길을 버린 것은 악이다.  사람은 스스로 그 욕심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인 그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다. 아담의 죄도 이것이며 모든 사람의 죄도 이것이다. 육신의 첫 사람이 죄인인 것은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근원 밖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게 하려 함인데 도무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죄사함을 받았다 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며 그 마음을 닮는 일이 그 과녁 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라고 주신 것이다. 이름은 알파요 실존은 오메가다. 알파는 오메가를 위하여 있고 오메가는 알파를 온전케 하면서 둘이 하나를 이룬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어떻게 새롭게 지으시려 했는지 인자의 기도를 좇아서 다시 살펴보자. "야웨 하나님이 땅으로부터 (땅에 속한 자를) '하아담 아파르'를 조성하시고 그 코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산 혼으로 있게 되었다"(창 2: 7) 하였다. 사람은 이미 1장 27절에서 창조되었다. 여기 2장 7절은 흙에 속한 첫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기 시작한 기사이다. 땅에 속한 자 아담은 야웨 하나님께 흙가루(아파르)와 같이 온유한 존재로 변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가루와 같은 낮아진 존재로서 하나님께 맡겨 질 때 새롭게 빚어진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시자 그는 '산 혼으로 있게 되었다.' 이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다.

모든 생물도 산 혼이다. 그러나 그들은 육체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들의 숨을 받고 산 혼의 정체성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숨쉬고 있다. 야웨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조성하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 하나님은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 에덴에는 네 강이 흘렀고 각종 보화가 매장 되어 있었다. 이 때에  아담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왔다. 

"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시고 일하며 지키게 하시고 야웨 하나님이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15- 17)하셨다. 하나님은 각종 들질슴과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내를 데려오셨다. 둘이 한 몸으로 있게 되었다. 이때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인자들은 인자의 기도를 좇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기도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셨다. 그 나무의 실과는 아담의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내와 함께 그 실과를 먹었다. 그 실과를 먹게 된 이유가 매우 선명하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선악을 아는 하나님처럼 될 줄을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었다."(창 3: 1- 6)하였다. 뱀이 말한 바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 '우리의 모양과 같이 되는 것'에 대하여 여자도 아담도 무엇이 어떻게 다른 지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하셨다.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하여 아담도 여자도 알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닮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것'은 사람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선하다하고 불리한 것은 악하다 하는 지식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뱀이 말한 유익한 것을 좇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주는 대로 먹었다. 그는 생명을 버리고 사망을 취했다. 그는 뱀이 말한 선악지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죽게 하려는 것 임을 알지 못했다."너희가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뱀의 말은 하나님께 대한 교묘한 표현이다.뱀이 말한 선악지식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뱀이 말한 것은 육과 생존의 일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첫 사람을 영의 둘째 사람으로 지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셨다. 그런데 뱀은 그들에게 육신의 정욕 ,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악행을 해야 너희가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놀라지 말라.  첫 사람의 종교, 도덕, 윤리, 사회정의 등등의 가치는 육과 생존을 좇는 선악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새 창조와는 상관이 없다. 아담은 육신의 탐심을 좇아서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을 선으로 삼았다. 그가 택한 선은 하나님께 대한 악이다. 그는 그 실과를 먹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고 생명대신 사망을 택했다. 그의 육신은 살아있었으나 하나님이 그 안에 지으시고 있던 영과 생명의 둘째 사람이 죽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아담은 이것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동산나무사이에  숨은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말하기를,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야웨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 여자가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 11- 13) 하였다. 욕심을 좇는 선악지식으로 사는 자에게는 유리한 것이 선이요 불리한 것이 악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내가 먹고 싶어 먹었습니다."하지 아니하고 그는 악한 마음으로 여자는 물론 하나님을 정죄하였다. 여자 역시 뱀을 탓했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마침내 그 입으로 하나님을 심판하였다. 이처럼 욕심으로 얻은 선악지식은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정죄한다. 이 일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장소가 어디건 간에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면 하나님이 이루시려던 새 창조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애 그것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존하려 할까 하노라"(창 3: 22) 하였다. 우리 번역 성경에서 'keahad mimenu'가 '우리 중 하나 같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과 생명의 흐름을 좇아 성경을 읽는다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번역이다. 어떻게 범죄한 자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중 하나가 된 것을 말한다.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번역은 뱀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뱀이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그 나무가 되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생명나무가 된다. 이 두 일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어난다. '메누'란 말이 '우리 중'으로 번역된 까닭에 창세기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려하는 자에게 악을 행하게 하는 뱀의 지식을 진리로 전하고 있다.

시험에 빠져든다는 것은 뱀의 선악지식에 빠져드는 것이다. 뱀은 언제나 육신의 첫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 뱀은 욕심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거리낌 없이 전개한다. 문맥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다. 영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면 다 거기에 속는다. 거기에 속은 자는 다시 그것을 정당화 하면서 악을 움켜쥔다. 그 모든 것이 육신의 첫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이요, 축복이다. 아담은 욕심을 좇아서 선악지식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모든 사람의 모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