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상과 글' 카페 요한계시록 한글주해
김창호님 글
1. 또 나는 보았다. 보라, 어린양이 찌욘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
*야웨의 길을 예비한 자는 144,000의 생명으로 역동하며 모든 사람이 함께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대로를 걷게 된다. 이들은 야웨의 길을 예비하였으므로 첫 열매가 되었고 다시 대로를 걸으며 나중 열매를 맺는다. 에클레시아는 숫자를 움켜쥐지 아니하고 그 숫자가 징조하는 바의 풍성하고 온전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자다. 7장에서 144,000인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다. 이는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질 것이란 예언이다. 그들은 짐승이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짐승을 이겼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린양의 생명은 넷으로, 거룩은 셋으로, 사랑은 둘로 징조 되고 있다. 이 생명과 거룩과 사랑이 어떻게 풍성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실존으로 지어지는가를 계시하는 것이 요한 계시록이다. 찌욘은 사막을 의미한다. 즉 짐승의 세상에 대하여 삼가이 된 자들 안에 하나님의 새창조가 이루어진다. 작은 자 안에 있는 네 생명은 스물네 장로의 실존으로 스물네 장로의 실존은 은혜와 진리 안에서 풍성하고 온전하게 144,000 의 실존을 이룬다. 이는 그 마음을 아버지께 드린 아들들에게 예비되는 야웨의 길이다. 너와 나와 그와 그와 너희와 우리와 그들이 함께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대로는 먼저 야웨의 길이 예비된 자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이 사랑의 대로를 좇아서 셀 수 없는 생명들이 하나되는 대동(大同)을 이루신다.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이 풍성하고 온전하게 그 자녀들 안에 실존으로 지어지며 확장되는 징조다. 누구든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그 숫자를 움켜쥐면 짐승의 대열에 뛰어든다. 숫자가 징조인 줄 아는 자는 작은 자가 되어 영과 생명의 삶을 살고 그 숫자를 실상으로 움켜쥔 자는 큰 자가 되어 육과 생존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즉 숫자는 어린양에게 속한 자에게는 징조요, 짐승에게 속한 자에게는 기사(테레타)이다. 우리가 사람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많은 생명들이 그 안에서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숨들을 쉬고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다. 이것은 징조다. 풍성함으로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온전함으로 보면 하나인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에클레시아의 실존이다.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가 쓰여 있는 자들은 사자 같은 승리와 송아지같은 섬김과 인자 같은 제사장과 독수리 같은 초월을 이룬 어린양의 신부들이다. 그들은 어제도 부활의 실존이었고, 오늘도 그러하며, 언제나 그러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처음과 나중이 하나되면서 고유하고 독특한 야웨의 길을 예비하였다. 야웨의 길을 예비한 작은 자들은 함께 대로를 걸으며 어린양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그의 나라를 무한히 넓혀나간다. 그러나 큰 자들은 큰 숫자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고 그들의 땅에 바벨론을 세운다. 큰 자들에겐 숫자가 클수록 은혜요 진리다. 그들은 하나님이 작은 자들 안에 들어내시는 풍성함과 온전함에 대하여는 무지하다. 그들은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받은 나라(6)도, 권세(6)도 영광(6)도 다 내 것이라 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666의 표를 그 이마나 오른손에 가지고 있다. 이들이 받은 심판은 작은 자들에 의거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144,000의 숫자는 7장에 처음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의 이스라엘로 새롭게 되면서 풍성하고 온전한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지를 징조로서 보이고 있다. 10장에서 요한은 펴 놓인 작은 책을 먹는다. 에클레시아는 요한이 보여준 징조를 좇아서 누구든지 작은 책을 먹고 작아져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증거하는 예언의 삶을 산다. 작은 자에게서 은혜와 진리는 하나 되며, 심판과 의가 하나 되며, 영과 육이 하나 되며, 처음과 나중이 하나 되며, 너와 내가 하나 된다. 작은 자는 영광과 고난이 하나된 길을 걷는다.
12장에 남자아이를 낳은 여인은 임마누엘을 낳는 작은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이름과 실존이 하나되는 길을 걷은다. 마침내 14장에 인침을 바등ㄴ 이들이 이님의 실존을 이루어 어린양과 함께 찌온 산에 선다. 에클레시아의 마음의 찌욘 산에 어린양이 144,000과 함께 서게 된 것은 이제 사랑의 대로를 곧게 할 때가 되었음을 징조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풍성함과 온전함을 그의 마음의 카메라에 선명하게 담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모든 에클레시아는 그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자 30번을 '보라'하였다. 요한이 본 계시는 알파요, 그가 본 계시를 우리가 새롭게 보는 것은 오메가다. 그 오메가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다. 처음은 우리가 계시를 받는 것이요, 나중은 그 계시의 실존을 이루는 것이다.
2. 나는 또 하늘로부터 많은 물소리와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거문고 타는 소리와도 같았다.
*요한은 하늘로서 들려오는 소리를 세 가지로 들었다. 많은 물소리와 천둥소리와 거문고 소리다. 이 소리들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의 마음을 닮은 작은 자들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의 소리다. 요한에게 그들의 생명은 많은 물소리 같이, 그들의 거룩은 천둥소리 같이, 그들의 사랑은 거문고 소리같이 들려왔다.
3. 그들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다.
*어린양은 그들을 자기의 피로 땅으로부터 사서 하늘에 속하게 하셨다. 그들은 짐승의 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초월의 실존이다. 땅에 속한 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다.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실존의 문제이다.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 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속량되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려진 첫 열매들이며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말씀인가? 17장에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이 기록되어 있다. 큰 음녀는 땅의 음녀들의 어머니다. 144,000 인은 영과 생명 안에서 음녀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였으니 순결하며 거룩하다. 그들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자이므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 그들은 짐승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르케'(근원) 안에서 익은 '아파르케'(첫 열매)이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아 볼 수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그 입에서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다. 또 그들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온전하게 지어졌으므로 흠이 없다.
6.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 가운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땅에 거하고 있는 자들 곧 모든 나라와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144,000 인은 영원한 복음을 전할 자들이다. 이는 그들 안에 영원한 복음의 실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실존으로 나라와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할 것이다.
7. 그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왔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지어오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
*요한은 10장 6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기를, "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창조하셨다" 하였다. 이때에 그는 '크티조'(바라)를 사용하셨고, '완성하다, 짓다, 만들다' 할 때에는 여기 7절과 같이 '포이에오'(아사)를 사용하였다. 요한은 '크티조'를 통하여 첫 창조를 말하고, '포이에오'를 통하여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은 하나를 이룬다. '포이에산티'(지어오신)는 새 창조를 계속하고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영원한 복음은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 되고, 처음과 나중이 하나 되고, 시작과 끝이 하나 되는 온전한 복음이다. 영원한 복음은 새 창조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 창조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144,000의 실존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 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이 근원을 새롭게 지으시고 계신다. 이제 첫 열매들을 통하여 영원한 복음이 전파되면 나중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수확에도 처음과 나중이 있어서 오순절에 첫 열매를 수확하고 초막절에 나중 열매를 수확한다. 에클레시아에게 144,000 의 실존이 이루어지는 것은 처음이요, 셀 수 없이 무수한 실존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메가다. 새 창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을 좇아 이루어지고 있다.
8. 또 둘째 천사가 그 뒤를 따라 말하기를,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그 여자의 음행으로 모든 민족에게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던 자가 무너졌다" 하였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에클레시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오기 위하여는 바벨론이 무너져야 한다. 바벨론의 무너짐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바벨론은 그 음행으로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은 결국 그 음행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다. 이것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알파다. 하나님은 음행하던 바벨론의 세력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이것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오메가다. 바벨론은 무너지고 무너진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니라 하셨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서 하나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서 하나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을 좆아서 사람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고난을 당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올 때에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길이 무너져 내린다.
9. 또 셋째 천사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자기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아무 것도 섞지 않고 부은 것이며 그는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고 그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것은 바벨론의 생각을 좇아서 바벨론의 길을 걷는 증거다. 하나님의 분노의 포도주는 하나님의 생각을 적대하던 바벨론의 생각에 대한 심판이요, 불과 유황으로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길을 적대하던 그들의 길에 대한 심판이다. 그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거룩한 천사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어린양을 대적하며 짐승의 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11. 그 고난의 연기는 영존토록 올라갈 것이며 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 고난의 연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다. 그는 멀리 있는 아브라함과 대화 하지만 매번 아브라함의 말을 부정한다. 그는 불꽃 가운데서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불꽃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는 이유이다. 그는 불꽃 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아브라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자신의 생각이 아브라함에게로 건너 갈 수도 없고 아브라함이 그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는 큰 구렁이 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그 자신이 음부를 만들고 거기에 빠졌음을 알지 못한다.
* 세세토록과 영존토록
요한은 세세토록(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과 영존토록(에이스 아이오나스 아이오논)을 구분하여 쓰고 있다. 여기 14장 11절은 영존토록이다. 에클레시아는 크로노스의 처음 때에서 카이로스의 나중 때로 옮기운 생명의 실존이다. 그러나 첫 사람은 육신의 영존을 원한다.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옮기운 영과 생명이 아니라 크로노스가 지속되는 육과 생존을 추구한다. 부자가 유황불 속에서 영존하는 것은 그가 믿은 대로 된 것이다. 세세토록은 하나님의 길이요, 영존토록은 사람의 길이다. 영존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불꽃 가운데서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
12.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텐 피스틴 예수 (예수의 믿음을)
새 번역은 '예수 믿는 믿음을' 현대인의 성경은 '예수님을 충실히 믿는' 공동번역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이라 번역했다. 이 모든 번역은 '자기 믿음'을 말한다. 오늘날 자기 믿음으로 충만한 이들이 많아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흑암에 가리워졌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받은 자가 음녀가 되고, 짐승이 되고, 그 무리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자기 믿음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자기 믿음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부활한 자이다. 자기 믿음으로는 종교인 밖에는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종교인들의 자기 믿음은 강력한 교리를 탄생 시키고 또 그 교리는 자기 믿음을 공고히 한다.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믿음이 강력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강력한 자기 믿음을 좇아서 생겨난다.
13. 나는 또 하늘로서 오는 음성을 들었다. "거룩하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다."하였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일들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하였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자기 믿음을 못 박은 자들이다.그들이 수고를 그치는 것은 자기 믿음으로 사는 그 수고를 그치기 때문이다. 믿음과 일은 하나다. 주님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었으니 그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그 일들이 나를 따르며 내가 주님의 믿음과 하나였음을 증거한다. 성도들이 짐승을 이기는 것은 예수의 부활의 믿음과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영원한 복음을 이루게 하는 것이므로 복되다. 기록된 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으면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였다. 크로노스의 자기 믿음을 못 박고 카이로스의 예수의 믿음으로 부활하는 자 영원히 살므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14. 나는 또 보았다. 보라,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기를, 땅의 곡식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십시오." 하였다.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자 땅이 거두어졌다.
*인자같은 이는 원래 인자이셨다. 인자는 영원한 복음을 땅에 뿌리신 분이요, 인자같은 이는 거두시는 분이다. 그가 낫을 휘둘러 땅을 거두었으니 이제 그 땅은 하늘로 올려졌다. 이들은 심판이나 재앙이 다 지나간 알곡이다. 그러나 땅에는 알곡이 되지 못한 여자의 남은 씨 곧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거하고 있다.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그도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었다.
18.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을 가진 그에게 큰 소리로, "당신의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하고 외쳤다.
19.그 천사가 낫을 땅에 휘줄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 넣었다.
20. 포도가 성 밖 포도주 틀에서 밟히자 피가 흘러나와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일 천 육백 스타디온에(약 이백마일) 퍼졌다.
*일천 육백 스타디온
성밖 포도주 틀에서 흘러나온 피가 말굴레에 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진 것은 무엇을 징조하고 있는가. 말은 우상이요, 일천육백 스타디온은 이스라엘의 종단 거리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어린양에게 그의 신부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을 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북쪽 바벨론은 사람의 머리를, 이스라엘은 그의 마음을, 남쪽 애굽은 사람의 배를 가리킨다. 즉 머리의 우상, 가슴의 우상, 배의 우상이다. 이 셋을 합한 것이 네 번째 우상이다. 포도송이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워 밟힌 것은 어린양에게 부름을 받은 자들이 큰 자가 되고, 높은 자가 되고,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려고 우상을 숭배하며 음행한 것에 대한 심판이다. 포도송이들은 네 우상을 좇아서 사방에서 자신의 백체에 음행의 피를 가득 채웠다. 그러므로 그 포도송이가 성밖 포도주 틀에서 밟히자 거기서 흘러나온 피는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다. 하나님은 이 피를 그의 진노의 잔에 담아 바벨론에게 마시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