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과 글' 카페 요한계시록 한글주해
김창호님 글
1. 또 내게 지팡이같은 갈대 하나가 주어졌는데 그 때에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
2. 그러나 성전의 바깥뜰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그것은 이방인에게 주어졌으니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작은 자는 성전 안에서 예배하고 큰 자는 성전 밖에서 거룩한 성을 짓밟는다. 작은 책을 먹고 작아진 자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예배하고, 큰 책을 먹고 큰 자가 된 자는 성전 바깥뜰까지는 오지만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한다. 그들에겐 성전 안은 너무 작고 좁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과 생명의 자로 재어 그에 맞게 지어진다. 이방인들은 욕심의 잣대로 스스로 척량하며 큰 자가 되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다.
3. 나는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며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
마흔두 달은 날 수로는 일천이백육십일 이다. 마흔두 달은 달빛, 곧 큰 자가 육신의 빛을 좇는 크로노스의 때요, 일천이백육십일은 햇빛, 곧 작은 자가 영의 빛을 좇는 카이로스의 때이다. 큰 자는 육과 생존을 좇고 작은 자는 영과 생명을 좇는다. 작은 자는 낮에 속한 삶을 살고 큰 자는 밤에 속한 삶을 산다.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큰 자에게 거룩한 성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애통하고 있는 것이다.
4.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성경은 말씀하시되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하였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항상 둘이 짝을 이루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알파와 오메가로 하나님의 임재는 처음과 나중으로, 하나님의 일은 시작과 끝으로 짝을 이룬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로써 증거를 가진 두 가지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둘은 알파와 오메가요 영과 생명이요, 생명과 의요, 은혜와 진리요, 첫 창조와 새 창조다. 창세기는 첫 창조를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를 기록하고 있다. 10장과 11절에서 힘센 천사가 요한에게 말하기를, "너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대하여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하였다. 그런데 11장 3절에서 두 증인이 예언하게 되었으니 이는 작은 자가 두 증인이 되어 은혜와 진리로, 심판과 의로, 영과 생명으로, 영광과 고난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예언하는 것을 보여준다.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들을 해치려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날 동안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하는 때는 언제든지 여러 제앙으로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
*두 증인의 예언은 큰 자의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하는 예언은 하늘의 물이 땅 위에 내려서 땅의 물과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며, 땅의 물이 피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큰 자의 축복은 재앙을 부르는 것 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두 증인은 세상의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과 왕들에게 그들의 신지식(神知識)은 죽음의 피이며 그들이 누리는 영화는 재앙임을 예언한다. 두 증인의 예언은 큰 자의 세상에 대하여 눈이 차다.
7. 그러나 그들이 증거하는 일을 마치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과 같다. 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그들의 무저갱(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졌던 흑암의 율법)속에 있는 짐승에게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복음이 흑암의 복음이 되면 그것이 곧 무저갱이다. 큰 자들은 그 무저갱을 그들의 능력으로 삼고 있다. 첫 사람의 정욕이 복음의 탈을 쓰고 있다.
8.그들의 시체는 큰 성의 길에 버려질 것이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이 유대 땅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성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그 성은 여전히 거룩한 백성의 성이 되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 되었다. 이것은 징조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과 그 실존이 하나되지 못한 큰 자의 처소가 소돔과 애굽이다. 큰 자들이 거하는 성이 큰 성이다. 그들의 마음은 길과 같다. 그 길에 두 증인은 죽은 채 버려진다. 큰 자의 마음 안에는 은혜와 진리, 심판과 의, 영과 생명,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죽임을 당한 채 버려져 있다.
9.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면서 무덤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어린양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일에 미혹되어 두 증인을 무덤에 묻지 못하게 하고 길에 버려둔다. 이것 또한 징조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그 몸이 무덤에 두어졌다. 이것은 요나가 큰 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있었던 것같이 인자가 삼 일 낮밤을 땅의 마음속에 있을 것을 말한다. 땅의 마음속이란 부활될 자들(죽은 자들)의 마음 속이다. 예수는 언제나 거기서 부활하신다. 에클레시아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으면 인자는 그들의 마음에서 부활하시면서 그들로 오늘 여기서 부활한 인자들이 되게 하신다.
10.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에 대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예물을 보낼 것이다. 그것은 그 두 예언자가 땅에 거하는 자에게 시련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시니조(시련을 주다) - 땅에 거하는 자들이 시련을 겪은 것은 그들이 두 증인의 예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시니조'는 진위를 가리는 시험이다. 두 증인은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나누는 예언을 하였다.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늘에 속한 예언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련이 되었다. 큰 자들에게 작은 자가 되라는 그들의 예언이 큰 자들을 괴롭혔다.
11. 사흘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영이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은 발로 일어섰다. 그것을 보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인자같은 이가 스뮈르나 에클레시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죽기까지 믿음에 굳게 서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였다. 작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죽기까지 믿음에 굳게 선다. 그러나 큰 자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다만 육과 생존이다. 그들은 길에 버려둔 두 증인이 살아나자 크게 두려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 삼일에 부활하셨고 두 증인은 제 사일에 부활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알파요 에클레시아의 부활은 오메가다. 오메가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다. 그 처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자가 오늘 여기서 부활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12. 그들은 하늘로부터 "이리 올라오라"는 큰 음성을 듣고 구름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의 원수들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구름에 가리워 하늘로 올리운 예수의 승천이 그의 영적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두 증인의 승천 또한 징조다. 두 증인은 이제 구름같은 많은 증인들과 함께 은혜와 진리, 심판과 의, 영과 생명을 증거하게 되었다. "엔 테 네휠레'는 구름 가운데서이지 '구름을 타고'가 아니다. '엔 테 네휠레'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은 두 증인의 영과 생명의 실존을 보여주는 징조다.
13. 그 때에 큰 진동이 일어나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 명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사람의 마음은 그 열손가락으로 하는 일을 다스린다. 하나님은 사람의 열손가락을 다스리는 그의 마음을 십일조로 받으신다. 큰 진동이 나서 큰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진 것은 큰 자들이 그들의 마음을 제 것으로 움켜쥔 것에 대한 심판이요, 칠천 인이 죽은 것은 성령의 일곱 역사를 큰 자의 욕심을 좇아서 세상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에 대한 심판이다. 이것은 징조다. 천 배(103)?는 마음의 십일조를 드린 자에게 오는 영과 성령의 풍성함이다. 그러나 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푸엉함을 천배의 재앙이 되게 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큰 자가 사는 큰 성에 큰 진동을 일으켜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는 그 징조를 보는 자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려 함이다.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오고 있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되었으니 그가 세세토록 다스릴 것이다."하였다.
16.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은 스물네 장로는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하기를,
17. "옛적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신 주 하나님 전능하신 당신이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다스리시니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reign over)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그들 안에서 다스리시며(reign in) 그들과 하나 되신다. 군림은 붉은 용과 짐승과 큰 자들에게 속한 것이다.
18.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자 주의 진노가 내렸습니다. 이제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큰 자나 작은 자나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입니다"하였다.
*땅을 망하게 하는 큰 자들이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 나라들의 분노를 그치게 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카이로이기 때문이다. 초막절에는 부활을 거둔다. 초막절에는 그 마음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은 자 다시 살고 사람의 선악지식을 심은 자 다시 살지 못한다. 그 땅에 육신을 심고, 정을 심고, 욕심을 심은 자 다시 살지 못하고, 영을 심고, 거룩을 심고, 사랑을 심은 자 다시 산다. 아버지가 주시는 상은 생명의 면류관 곧 부활이다. 에클레시아가 작은 책을 먹고 작은 자가 되는 것은 알파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오메가다.
19.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으며 번개와 음성과 천둥과 진동과 우박이 있었다.
*언약궤 안에는 두 돌비가 있었다. 이 두 돌비는 사람의 두 심비를 징조하고 있다. 인자의 기도에서 처음의 세 부분은 아버지에게 속해 있고 나중의 세 부분은 그의 자녀들에게 속해 있다. 이와 같이 인자의 기도는 알파와 오메가의 둘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세 부분은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이다. 뒤의 세 부분은 그 세 절기를 풍성하고 온전케 하는 자녀들의 실존이다. 처음의 세 날은 나중의 세 날로 말미암아 풍성함과 온전함을 이룬다. 처음의 세 날은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날이요, 나중의 세 날은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대로(大路)를 걷는 날이다. 언약괘 안에는 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다. 만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용할 양식이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의 자녀들이 가진 제사장의 직분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빚진 자를 사하며 아버지께 자기들의 빚을 사함 받는 권세로 산다.
*4장 5절에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천둥이 있었고 8장 5절에서는 천둥과 음성과 번개와 진동이 있었고 11장 19절에서는 번개와 음성과 천둥과 진동과 큰 우박이 있었다. 하나님은 번개로서 그의 생명을 계시하시며, 음성으로서 그의 사랑을 계시하시며, 천둥으로 그의 거룩을 계시하시며, 진동으로 사람의 의식과 본성과 지식과 그들의 세상을 흔드시며 우박으로 그들의 땅을 치신다. 이것은 광야가 되고 사막이 된 그 땅에서 새 창조를 이루기 위함이다. 사람의 생각과 길이 번성하는 큰 자의 마음 앞에서는 하나님은 새 창조를 행하시지 아니한다.
*십일조와 한 이레의 언약
십일조와 한 이레 언약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다니엘서의 한 이레는 창조의 일곱 날을 징조하고 있다. 그러면 누구에게 한 이레 언약이 베풀어지는가. 그 순결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이다. 십일조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한 이레의 언약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자에게 일곱 날을 좇아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다.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하였다. 사람이 그 일생을 통하여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으면 그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에게 의무가 아니라 권세가 된다. 그에게 권세가 된 하나님의 계명은 그에게 복음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되었고,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행할 권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생의 년 수는 70년이요 그 십분의 일은 7년이다. 7년의 반은 삼년 반이며, 마흔 두 달이며 1260일이다. 7년의 반은 인자의 기도 전반부에 해당하고 나머지 반은 후반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은 징조다. 에클레시아가 그의 순결 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70년을 살면 70년의 십일조인 7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그 십일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의 7년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종말의 어떤 7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가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새롭게 창조되는 그 카이로스의 7년이다. 처음 삼년 반은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때요, 나중 삼년 반은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대로를 걷는 때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길을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에서 게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계시하신다. 누구든지 그 순결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으면 그는 7년의 언약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누구든지 사람의 에고비젼을 좇아 종말의 7년을 움켜쥐고 있으면 그의 70년을 헛되게 하고 있다. 새 창조의 때(카이로스)는 종말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귀 가진 자는 "때(카이로스)가 가까이 있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계 12: 1 - 14: 20)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
빛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생명의 양식이다. 창조의 넷째 날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들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들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춰라'하셨고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시어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그 빛과 그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의 일을 알파와 오메가로 계시하고 있다. 창조의 넷째 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들이 있으라"하였고 그대로 되었다. 이것은 광명들이 창조된 알파다. 그 광명들이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춰며 낮과 밤을 주관하며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는 것은 오메가다. 창조의 첫째 날 "빛이 있으라"하셨고 그대로 되었다. 넷째 날의 광명들은 첫째 날의 빛 안에서 지어져 나왔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날의 빛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넷째 날 우리 안에서 진리의 빛으로 비췬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서 말씀과 실존은 하나를 이룬다.
*성경은 징조서이며 징조 해석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징조서를 욕심의 눈으로 읽으며 스스로 무저갱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며 과학의 귀로 들으며 그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런즉 먼저 마음과 귀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징조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은 '바라'요 나중은 '아사'다. '바라'는 없던 것을 있게 함이요, '아사'는 있게 된 것을 온전케 함이다. 하나님이 두 광명을 만드신 것은 '바라'가 아니라 '아사'다. 하나님이 창조의 넷째 날 두 광명을 만드신(아사: 온전하게 하다) 일을 알면 새 창조의 넷째 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가 은혜와 진리의 실존으로 임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 (아사)하였다. 첫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형상) 안에서 창조된 자요, 마지막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모양)으로 지어진 자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창조되고 그 사랑으로 새롭게 지어진다.
*생명의 말씀(빛)을 받은 자마다 그 빛의 근원인 아버지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 이는 그가 그 빛의 근원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려 함이다. 이것이 새 창조다.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어지는 것이 새 창조다. 가령 새가 알을 낳으면 그 알은 해와 달과 별들의 빛 안에 들어왔지만 그 알은 껍질에 싸여 있어서 그 빛들과 풍성하고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으나 알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것이 가능하다. 갓 태어난 아기 또한 그러하다. 그의 부모는 먼저 있었으나 그는 아직 부모를 알지도 못한다. 그가 태어난 이후 자라나면서 그 부모를 알게 되고 그는 이미 부모의 사랑 안에 있었으나 자라나면서 그 사랑을 알며 그 사랑을 닮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닮고, 그 거룩을 받으며 거룩을 닮고, 그의 생명을 받으며 생명을 닮는다. 날마다 그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먹으며 자라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마음으로 알고 실존으로 드러낸다. 넷째 날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의는 세상이 말하는 정의나 공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는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며 사랑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를 닮는 것이다.
*예수 말씀하시되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서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는 자는 하늘로서 내려온 양식인 그의 살과 음료인 그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다. 그때에 그들은 '이것이 무엇이냐'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 만나를 육과 생존의 양식으로 삼고 말았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그와 함께 거룩하게 되는 것 임을 알지 못하므로 그의 살과 피는 영과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육과 생존의 양식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찬양하며 박수치고 있으나 그를 좇아서 십자가에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부활하는 거룩의 실존이 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예배와 찬양과 헌금과 봉사와 전도와 기도를 드린다. 그드릉ㄴ 그것이 그의 살과 피를 더럽히고 그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켜주는 붉은 용으로 섬기고 있는 것 임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붉은 용에게 삼키우며 짐승이 되고 있다. 그들의 믿음은 무저갱으로, 그들의 실존은 음부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난 네클레시아는 거룩한 양식을 매일 아버지께 구하며 먹으며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大路)를 곧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