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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주해

'형상과 글' 카페   요한계시록 한글주해 

김창호 글

 

3. (카이로스)가 가깝다.

크로노스는 처음이요, 카이로스는 나중이다. 크로노스는 육신의 때요, 카이로스는 영의 때다. 우리의 첫 사람이 어느 크로노스의 때를 살든지 간에 우리의 둘째 사람은 항상 가까이에 카이로스를 대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카이로스를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은 카이로스를 크로노스로 바꾼 것이다. 우리의 첫 사람은 항상 크로노스의 시간을 좇아서 살기 때문에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영의 눈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은 가까이 있는 그 카이로스를 보라고 하고 있다. 그 카이로스를 보는 것이 알파요, 그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오메가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오고 계신 이로부터, 또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로부터.

*에클레시아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에클레시아에 대한 대각성이 필요하다.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바꾼 그 모든 지식은 던져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새 창조의 징조를 볼 수 없다. 모든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천둥소리와 목소리를 그들이 귀로 듣고 번개불을 그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록은 새 창조의 계시가 되지 못하고 종말을 이야기하는 점서가 되고 만다.

모든 성경에 에클레시아는 '교회'라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본질을 잃은 지 오래다. 사실 교회라는 말 자체 빗나감의 알파요, 처음이요, 시작이다. 교회란 종교인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아무리 달리 해석하려 한다 해도 종교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큰 건물로 있고, 많은 사람이 모이며, 많은 돈이 모이며, 큰 행사를 행하며 큰 조직을 이루고 있어서 겉으로는 누구의 눈에도 감취어 있을 수 없지만 거기엔 영과 생명이 없다. 영과 생명이 빠져버렸으니 육과 생존을 좇아 움직인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전으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실존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관계성이다. 육신의 첫 사람은 큰 건물과 큰 조직과 많은 행사와 많은 돈 등에서 보람을 느끼고 큰 자, 높은 자, 부자, 유명한 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새 창조의 하나님은 작은 마음속에 거하신다.  오늘날 겉으로 드러난 교회는 사람의 생각(교리)을 좇아서 사람의 길(종교)을 걷고 있는 사람의 모임(종교인들의 모임)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걷는 종교인이 되라 하심이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길을 걷는 그의 아들들의 실존인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 아들들이 하나 되는 생명과 거룩과 사랑의 관계성이다. 에클레시아는 건물도, 그 조직도, 그 활동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에클레시아에게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으로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이들이 종교인(음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그 무리)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심판이요 경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되게 하려 함이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인이 되게 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종교인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날 때 우리는 이름과 실존이 하나된 에클레시아이다. 오늘날 교회라 부르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증거 되지 아니하고 종교와 윤리와 도덕과 사회정의와 교리와 기복 등등 첫 사람의 가치와 욕심이 말씀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에클레시아다.

*오고 계신 분(호 에르코메노스)

아버지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언제나 오고 계신 분이다. '호 에르코메노스'는 장차 오실 분이 아니라 오고 계신 분이다. 야웨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항상 오고 있는 분이다. 존재의 하나님은 전에도 창조의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언제나 오고 계신 하나님은 첫째 날에도 오시고 둘째 날에도 오시고 셋째 날에도 오시고 일곱 째 날까지 계속 오신다. 이렇게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으려 하심이다. 존재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으시는 시간은 카이로스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실존으로 드러난다. 예수 말씀하시되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하셨다. 그는 전에도 부활과 생명이요, 오늘도 부활과 생명이며 언제나 부활과 생명으로 오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과 생명의 증거로 오신다. 그는 크로노스의 미래에 부활과 생명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카이로스의 부활과 생명으로 오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하여 역사하신다. 그가 하나님의 일곱 날을 좇아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곱 영으로 계시되었다. 은혜의 성령, 영광의 성령, 진리의 성령, 성결의 성령, 생명의 성령, 약속의 성령, 영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 부활과 생명의 실존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5. 또 신실하신 증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나신 자요, 땅의 왕들의 근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화평이 있기를 바란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고

* 호 마르투스 호 피스토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충만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증인이시며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된 그의 믿음 안에서 부활의 실존을 이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는 오늘 여기서 부활의 실존이 될 수 없다. 이는 자기의 믿음으로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이 믿음과 하나 되면 그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부활에 동참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좇아서 크로노스의 미래에 부활할 것을 소망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오늘의 부활에 대하여서는 알지도 못하며 그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으면 살겠다." 하신 생명과 사망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오늘 여기서의 죽음과 부활이다. 자기 믿음은 알파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오메가다. 오메가의 믿음에 동참한 자마다 오늘 여기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실존을 이룬다. 그는 부활한 그 실존으로 몸의 구속을 바라본다. 알파가 없으면 오메가도 없다. 부활의 씨를 뿌린 자만이 부활의 열매를 거둔다. 이 일은 아무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이 일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어린양의 믿음이 우리 안에 계시되어 우리의 믿음이 되고, 그의 부활의 증거가 우리의 증거가 될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 믿음의 알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오메가로 옮기였다.

*땅의 왕들의 근원자(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예수 그리스도는 '땅위 모든 왕들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가 아니다. 그는 '땅위 모든 왕들이 본받아야 할 근원자' 이시다. 그는 진리의 왕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왕들은 그의 진리를 본받아야 한다. 그의 진리를 본받기 위하여는 모든 왕들은 그의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세상의 왕들은 군림하지만(reign over) 그는 우리 안에서 다스린다(reign in) 그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그가 진리로서 섬기기 때문이다. 계시록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세상의 군림 자(붉은 용)로 영접한 자이다. 붉은 용은 예수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온다. 진리의 왕인 예수가 군림자로 영접되면 그 예수는 누구에게든 붉은 용이다. 그 붉은 용은 우리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목마르게 부르는 그가 짐승이다.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아니하고 짐승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은 모두 헛되다. 이는 남을 가리켜 짐승이라 부르는 그 역시 짐승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서로를 잘 알아보고 더 높은 군림의 권세를 두고 다툰다.

*은혜와 화평

하나님의 새 창조는 죄 사함의 은혜에서 시작되어 부활의 실존에 이르며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의의 화평에 이른다.

*사랑과 피 흘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해방하셨다. 사랑은 알파요 피 흘림은 오메가다. 사랑과 피흘림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은 그의 형제들에게도 사랑과 피흘림의 실존이 되게 한다.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했으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는 자들은 예수의 사랑도 그의 피흘림도 모르는 짐승이요, 음녀요, 거짓 예언자요, 그들에게 속한 무리일 뿐이다. 우리의 피 흘림은 예수의 피흘림을 본받는 오메가다. 그 오메가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다. 우리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처음이요, 나중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죄 지은 자)를 해방하는 것이다. 처음은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나중은 우리 하나님을 향해 가는 대로(大路)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

우리의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죄 안에 머물게 된다. 우리의 죄란 하나님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요 악이란 하나님의 마음 밖에서 선악 판단을 행하며 인간의 가치를 좇아 자기를 세우려는 것이다. 세상에 허다한 죄와 악이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있는데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자는 하나님이 자기 모양과 같이 그를 새롭게 지으신다. 죄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밖에 있음이요, 악이란 그의 마음 밖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으려는 그 모든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풍성하고 온전하게 지으려 하신다. 사람들은 인간의 선악 판단을 좇아서 생겨난 인간의 가치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말씀은 종교와 도덕과 윤리와 사회정의 와 권세와 기복 등등 인간가치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첫 사람의 세상에 필요한 첫 사람의 가치일 뿐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으로 새 사람을 지으려 함이다.

 

6. 우리를 그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아멘.

* 토 데오(하나님에게로,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왕과 제사장으로 삼기 위함이다. 우리의 왕 됨과 제사장 됨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이 된다. 다음은 우리가 형제의 마음 안에서 다스리는 왕이 되고 , 형제를 섬기는 제사장이 된다. 야웨의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왕이요 제사장이며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에서 우리는 형제 안에 있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왕은 그들 안에서 다스리며 제사장은 그들을 섬긴다.

*영광과 능력을 그에게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그는 우리에게 왕과 제사장의 영광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실존이요 소유물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왕 된 것과 제사장이 된 것을 소유로 움켜쥐는 순간 짐승이 되고 만다. 솔로몬이 짐승의 원형이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세세토록(into the ages of the ages, 영원토록)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시다. 알파와 처음은 크로노스요, 오메가와 나중은 카이로스다. 세세토록은 크로노스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생존에서 카이로스의 생명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시와 시간과 일하심의 총체다.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항상 계신다. 첫 창조도 그가 행하셨고 새 창조도 그가 행하신다. 그는 처음의 세대에도 계시고 나중의 세대에도 계신다. 그는 첫 사람의 때에도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셨고 나중 사람의 때에도 함께 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과 하나됨의 실존이지 영존은 아니다.

 

7.보라, 그 구름과 함께 오신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아멘

*구름과 함께

구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구름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너무 심각하다. 기록된 바, 이 말씀을 마치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 9 - 11)하였다. 또 기록되기를,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화평이 있으라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요 20: 19- 20) 

징조와 실상을 잘 분별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징조를 실상으로 움켜쥐고 미혹에 빠져든다. 구름은 부활하신 예수의 영적실상을 징조하고 있다. 구름에 가리운 예수의 승천은 모든 사람에게 그의 하늘에 속한 초월의 실존을 징조를 통하여 보이고 있다. 징조가 주어지는 것은 육신의 눈에는 영적실상이 보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구름의 징조 없이 예수가 보이지 않게 하늘에 오르셨다면 아무도 그 일을 알 수 없고 증거할 수도 없다. 부활의 실존에게는 구름이란 이동 수단이 필요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구름이 나타난 것인가. 이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한계성 때문이다. 생존의 첫 사람에게 둘째 사람의 실상을 계시하는 징조가 구름이다. 이렇게 징조가 되어 있는 그 구름을 실상으로 붙잡은 자들은 구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줄 알고 이것을 휴거라 부르며 거기에 매어 달려있다. 말씀의 계시는 늘 징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징조(세메이온)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의 기사(테라타)가 된다. 징조는 이렇게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나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는 심판된다.

* 메타 톤 네웰론(구름과 함께)  

번역 성경들 중에는 '메타 톤 네휄론'을 '구름과 함께'로 번역한 것과 '구름을 타고'로 번역한 것으로 나뉘어 있다. '구름을 타고'는 구름을 이동 수단으로 오해한 것이다. '메타'는 함께(with)이다. 그러면 구름과 함께 오시는 예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구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실존을 이룬 허다한 증인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활의 증거를 가진 아들이다.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오신다. 우리 안에 부활의 실존이 이루어지면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이사야도, 요한도, 베드로도, 바울도,, 구름같은 증인으로 예수와 함께 와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초월성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면 그와 하나 되어 있는 그 증인들이 모두 내 안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기록된 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름과 함께'를 '구름을 타고'라 읽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탐심이나 교리를 좇아서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을 새들이나 자신들이 만든 기구 아래 두고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기 함정에 빠져든다.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은 알파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오메가다. 우리의 실존은 오메가에 달려있다.

* 그를 찌른 자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로마 군병이 그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기록을 보고 알고 있다.그렇다면 요한 사도는 여기서 그 군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 군병의 행위는 우리 모두의 행위를 징조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악의 창으로 그를 찔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창으로 찔렀을지라도 그의 죄사함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런즉 그 안에 들어온 자들은 그의 오심을 기뻐할 것이요, 밖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를 애곡하게 될 것이다.

* 이두, 에르케타이 (보라, 그가 오신다)

 '에르케타이'는 그가 지금 오고 있음을 말한다. 그의 오심은 크로노스의 미래가 아니다. 카이로스의 오늘에 항상 우리에게 오고 계신다. 요한은 오고 계신 그 분을 보라 하였으니 우리도 그가 본 것처럼 보아야 한다. 지금 오고 계신 그 분을 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그가 오실 것으로 알고 그 날을 점치고 있다. 우리가 요한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오고 있는 그 분을 본다면 그의 예언은 오늘 여기서 속히 될 일이다.

 

8.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오고 있는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신다.  

* 호 에르코메노스(오고 계신 자)

'호 에르코메노스'는 '오실 자'가 아니라 '오고 계신 자'다. 하나님은 한번 오셨다가 지나가 버리는 분이 아니며 또 미래에 오실 분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계속 새로움으로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카이로스는 항상 가까이 있다.  

 

9. 당신들의 형제이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파트모스라 하는 섬에 있었다.

*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 그의 환난이 나의 환난이요, 그의 나라가 나의 나라요, 그의 참음이 나의 참음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의 유월절에 동참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의 초막절에 동참한다. 새 창조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에클레시아 안에 이루어진다.

 

10. 나는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고 나는 내 뒤에서 울려오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요한 사도는 로마의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파트모스에 유배된 것이다. 그가 유배된 것은 기독교를 위한 것도, 자기 교리를 위한 것도, 사회 정의를 위한 것도, 권세를 위한 것도, 인간의 그 무슨 가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아닌 것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세상 사람에게 넘겨주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과 어린 양의 증거를 드러내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날이 주의 날이다. 주의 날은 가까이에 있다.

 

11. 그 음성은 "너 보는 것을 책으로 써라 에페소와 스뮈르나와 퍼가모와 뒤아테이라와 사르데이스와 필라델페이아와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보내라" 하였다.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편지가 보내진 순서를 좇아 선을 그어 보면 로마( Rome)의 R의 모양이 된다. 로마는 부활의 실존인 에클레시아가 그 생명의 말씀(레마)을 비추어야 할 세상이다. 여기서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징조는 무엇인가. 말씀(레마)도 R이요, 종교(Religion)도 R이요, 로마(Rome)도 R이다. 말씀과 종교와 세상 권세 가운데 요한이 증인으로 거기에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의 종교와 세상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다.  

요한이 여기서 증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길을 좇아서 짐승과 음녀와 거짓예언자와 그들에게 속한 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 징조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레마(말씀)을 받은 자들 안에 예수가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세상의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면 그들은 짐승이 되거나, 음녀가 되거나, 거짓 예언자가 되거나, 그들을 좇는 무리에 속하고 만다. 이것은 깨어 있지 않은 자에게 일어나는 두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읽으며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음녀와 그 무리가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나'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이 예언을 좇아서 눈으로 너희 자신을 보고, 귀로 너희 자신을 들으며, 마음으로 너희 자신을 살피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벗어나면 어린 양의 신부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짐승이나 음녀나 거짓 예언자나 또는 그들을 좇는 무리가 된다는 것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R자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점은 창조의 일곱 날이며, 성령의 일곱 역사이며, 어린양의 일곱 뿔이며, 인자의 일곱 기도이며, 에클레시아의 일곱 실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곱 점은 붉은 용과 짐승의 일곱 머리이며 음녀가 앉은 일곱 산이다. 붉은 용과 짐승과 음녀는 제 것은 없고 언제나 하나님이 청하는 일을 흉내내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1. 에페소 2. 스뮈르나 3. 페르가모 4. 뒤아테이라 5. 사르데이스 6. 필라델페이아 7. 라오디케이아

* 일곱 에클레시아가 처하여 있던 상황은 전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새 것이 아니다. 해 아래서 사람들이 처해 있던 상황은 전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새 것이 아니다. 해 아래서 사람들이 처한 그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나 처음 창조에 속한 것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아담 때의 상황이건, 아브라함 때의 상황이건, 이사야 때의 상황이건, 요한 때의 상황이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자녀에게 변함없이 새 창조를 위한 징조가 되고 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새 창조를 위한 징조다.

* 야웨의 길과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大路)

야웨의 길과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大路)는 이사야서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두 길이다. 야웨의 길은 알파요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大路)는 오메가다. 인자의 기도에도 이 두 길이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여 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알파의 길, 곧 야웨의 길이다. 오메가의 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사함 받으며, 우리가 시험에 빠져들지 않으며 악에서 구함을 받는 일이다. 알파는 각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이루는 일이요, 오메가는 그 실존들이 함께 우리 하나님을 향해 걸으며 하나 되는 일이다. 두 길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면 인자의 길이다. 앞의 세 점은 알파의 길이요, 뒤의 세 점은 오메가의 길이다. 마지막 점은 알파와 오메가를 온전히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의다.

두 길을 율법을 좇아서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알파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오메가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와 같이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알파는 오메가를 위하여 있고 오메가는 알파를 온전케 하면서 하나를 이룬다. 둘이 하나 되지 않는 것은 인자의 길이 아니며 새 창조의 길이 아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 되고, 처음과 나중이 하나 되고, 시작과 끝이 하나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하나 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의가 하나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이 증거가 하나 되고, 영과 생명이 하나 된다.

12. 나는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다. 그때에 일곱 금 촛대와 

13.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고

* 금 촛대는 순결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에클레시아를 징조하고 있다.

* 인자와 인자 같은 이

이사야의 토기장이 비유는 인자와 인자 같은 이의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토기장이는 흙을 퍼다가 고운 흙가루로 만든다. 그 다음 그는 그 마음의 형상을 좇아 그릇을 빚는다. 그 후 그것을 그늘에 말린다. 그 다음에 그 그릇의 형체를 불가마에 넣어서 알맞은 온도로 굽는다. 보라! 불가마에 구워진 그릇은 첫 형상 그대로이지만 그 그릇의 질은 처음 것으로부터 온전히 바뀌었다. 불가마 안에서 온전히 새 것이 되었다. '인자 같은 이'는 죽었다가 살아난 '인자'다. 인자 같은 이는 인자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셨지만 이제 인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인자들이 본받아야 할 인자 같은 이가 되셨다. 부활의 실존은 일곱째 날에 인자 같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다. 에클레시아가 인자가 되는 것은 알파요, 그 인자가 인자 같은 이가 되는 것은 오메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인자가 되게 하고 에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 인자들을 영과 생명 안에서 인자 같은 이가 되게 한다.

*그가 입으신 발에 끌리는 옷은 그가 하나님의 길에서 이루신 풍성하고 온전한 의요, 가슴에 띤 금띠는 그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가지신 순결하고 변함없는 믿음이다. 그 안에서 의와 믿음은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그의 믿음과 의를 본받게 하시는 징조다.

 

14. 그 머리와 머리카락은 흰 양털 같이 희고 눈 같이 희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인자 같은 이의 지혜와 지식은 순결하며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양털은 따뜻하고 눈은 찬 것 같이 그의 지혜와 지식은 죄인에 대하여는 차갑다. 또한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눈 같이 차고 아버지에 대하여는 따뜻하다. 그는 눈 같이 찬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세상을 이기셨고 양털같이 따뜻한 그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길을 나설 때 그의 손에 칼과 불을 들었던 것과 같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길을 불 칼로 지키심과 같다. 

인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눈 같이 차고 하나님에 대하여 양털 같이 따뜻한 존재다. 그러나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고 있을 지라도 세상에 대하여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자 같은 이는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뜻과 생각을 살피신다. 그의 불꽃같은 눈에 드러나지 아니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불꽃같은 눈에 드러난 자신을 보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놋쇠 같았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와 같았으며

*빛난 놋쇠 같은 그의 발은 그의 원수들을 이기시고 발등상으로 삼으실 징조다. 많은 물들의 소리 같은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세상을 이기고 그와 하나 된 많은 사람들의 풍성한 생명의 소리다.

 

16. 그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었으며 그의 입에서는 양쪽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의 얼굴은 해가 강렬히 비취는 것 같았다.

*인자 같은 이는 그의 오른손, 곧 그의 의로운 능력의 손에 일곱별을 가지고 계신다. 이 별들은 에클레시아 안에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일곱 날의 의,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곱 실존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양쪽에 날선 검은 인생들의 생각을 베고 또 그들의 길을 베신다. 이 검은 사람의 에고비젼과 자기 마음을 철폐하는 심판과 의의 검이다. 인생들은 첫 사람의 육신의 소욕을 좇아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 생각과 자기 길을 좇아서 좌우와 동서와 남북과 위아래로 나뉘어 서로 자기가 옳다며 싸우고 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에 심판되지 아니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해가 강렬하게 비취는 것 같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의 빛을 충성하고 온전하게 비추신다.

 

17. 내가 그를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것 같이 되었다. 그가 그의 오른손을 내 위에 얹고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며 나중이며,

*요한은 인자 같은 이를 보게 되자 그의 권세와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인자가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인자 같은 이가 되셨다. 요한은 산자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육신은 산 자 앞에서 죽은 자 임을 징조하고 있다. 에클레시아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사는 것은 알파의 부활, 곧 인자됨이요, 인자가 인자 같은 이의 영광에 이르는 것은 오메가다. 인자 같은 이는 그의 권능의 손을 죽은 자 같이 된 요한에게 얹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하셨다. 인자 같은 이는 누구인가. 그는 원래 요한이 잘 알던 그 처음 인자다.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인자는 알파요 인자 같은 이는 오메가이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인자인 요한에게 인자 같은 이의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요한은 잠시 어두움을 맞이했으나 영원한 빛으로 살아났다. 우리는 여기서 이 징조를 보아야 한다. 

 

18. 곧 산 자다. 내가 전에 죽었으나 보라, 세세에 살아있고 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예수는 말씀하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부활은 알파요 생명은 오메가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는 먼저 우리를 죽게 하신다. 이는 다시 살게 하려함이다. 육신의 생존에 매어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는 이들은 도대체 부활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이 가진 부활의 지식은 부활의 실존과 아무상관이 없다. 부활은 인자들 안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인자 같은 이는 죽었다가 부활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인자들을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하신다. 

* 사망과 음부

사망은 무엇이며 음부는 또한 무엇인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죽었다. 물론 그 육신은 살아 있었다. 그러면 죽은 것은 무엇인가. 영과 생명의 속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지어져야할 둘째 사람이 죽었다. 육신의 죽음은 속사람의 죽음을 깨닫게 하는 징조다. 요한 계시록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계시하고 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불리운 자가 자기 욕심을 좇아 살고 있는 그것이 첫째 사망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나면 둘째 사망은 없다. 사람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좇아 살고 있는 그것이 첫째 사망이다. 그 죽었던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던 육체와 정과 욕심을 못 박으면 영과 생명으로 살아난다. 이것이 오늘 여기서 일어나는 부활이다. 리의 부활은 알파요 생명은 오메가다. "나를 믿는 자는 죽으면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였다. 알파의 믿음은 예수 안에서 죽고 사는 것이요, 오메가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되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이 왔는데 그 복음은 말하기를 먼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식물인간이 될 것인데 무슨 수로 사느냐 하며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길을 고집한다. 계시의 말씀은 네가 죽으면 살리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라 하신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다. 사람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영과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말씀이 알파요, 오메가는 생명의 말씀을 좇아 그가 죽고 다시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가 부활의 실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믿음을 좇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음부에 처해 있다. 인자 같은 이가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것은 네가 죽으면 네가 살리라 하신 그 말씀을 믿고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살리려 함이요, 또 그가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것은 자기 생각과 자기 믿음을 좇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그 자신의 음부에서 놓아주려 하심이다. 음부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 안에 만들어 가진 감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자기 믿음의 음부에 갇힌 자를 놓아 주신다. 자기 믿음을 버리고 오늘 여기서 부활하는 그의 부활의 믿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하늘 나라의 열쇠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주신다 하였다. 베드로에게 주신 열쇠들은 그를 비롯한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주신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에클레시아를 이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하셨다. 즉 반석과 같은 믿음을 고백한 자 위에 반석의 실존을 세우시겠다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에클레시아 위에 왕이나 권세자나 무슨 조직을 두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클레시아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시고 원하는 자마다 거기서 해방하신다. 거기에서 풀려난 이들은 반석 같은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가지고 자신을 성령의 전으로 거룩하게 세운다. 성령의 전이된 그 실존은 땅에서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 에클레시아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맬 것은 매고, 풀 것은 푸는 인자들의 실존이다.

 

19. 그러므로 네 본 것들과 이제 있는 일들과 이 일들을 좇아서 될 일들을 기록하라.

*메타 타우타(이 일들을 좇아서)

'메타 타우타'는 단순히 일의 선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의 관계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선후를 바꾸어 일어나지 아니한다.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서 알파가 있는 후에 오메가가 있으며 처음이 있은 후 나중이 있으며 시작이 있은 후 끝이 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사람들은 자신의 새로움은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려 하며 알파의 부활 없이 오메가의 부활에 참여하려 한다. 은혜는 처음이요 진리는 나중이며, 심판은 처음이며 의는 나중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나중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받는 것은 처음이요 그 이름의 실존을 이루는 것은 나중이며, 에클레시아의 이름은 처음이요 에클렛아의 실존은 나중이다.

 

20. 내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이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에클레시아다.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

'현대인의 성경'은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을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번역하는 터무니없는 일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종교인들의 모임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 '천사들'을 '지도자들'이라 번역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혼잡스럽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천년 전 예수가 유대 땅에 복음을 전하는 메시야로 오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이 행했던 유일한 일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었다.전도자으 말과 같이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다. 오늘의 종교도 그때와 다름없이 예수가 보낸 천사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것은 종교가 가진 한계성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온 천사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요한이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와 있다. 그 편지야 말로 우리에게 온 천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편지를 천사인줄 알지 못하며 비록 안다고 할지라도 천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천사의 말이 우리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된지 오래다. 요한의 편지가 방언이 되다 보니 그 편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이 해석을 하고 있다. 이렇게 방언은 방언을 낳으며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예나 오늘이나 천사의 말을 듣는 자는 따로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하는 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해오기를 원하는 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아버지께 구하는 자, 시험에 빠져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원하는 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자가 천사의 말을 듣는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영 안에서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자는 다시 천사가 되어 그 자신의 실존을 통하여 좋은 소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