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과 글' 카페
김창호 글
'반지의 제왕'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등장인물을 실제 인물로 보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일그러진 권력의지의 다양한 욕망을 다루고 있어 독자와 시청자의 공감을 얻어낸다. 인간의 실존은 이야기다. 말하다와 이야기하다는 동의어다. 말은 이야기로 한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방식으로 말한다. 즉, 이야기로 말한다는 점에서 말하다와 이야기하다는 동의어에 가깝다. 인간은 이야기 존재라는 말이다.존재는 언제나 이야기로 존재한다. 인간은 이야기의 바다속에서 산다. 오늘도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나오고, 인생은 이야기를 써가는 존재다. 요한계시록은 이야기다. 예수와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이야기다. 마음의 세계를 그려가는 이야기다. 묵시문학(상징문학)의 기법을 동원한 이야기다. 크로노스의 미래에 일어날 이야기가 아니라, 절기를 따라 자기 존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다. 그 정신이 짐승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가는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다. 히브리인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성전 이야기라는 말이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인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요 20: 11- 16)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눅 24: 3-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자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 8- 11)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야기 속의 두 사람 혹은 두 천사,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무덤 그리고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 한 가운데 등장하는 두 사람, 두 천사 이야기 속에 두 증인의 흔적이 지나가듯 그려져 있다. 물론 스가랴서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와 스룹바벨도 두 증인의 흔적이고 그림자가 된다. 스가랴서에는 두 감람나무 이야기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관을 통해 등잔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올리브유(감람유)인 것이 명확하다. 따라서 두 감람나무는 기름부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임이 분명하다. 두 증인은 작은 책을 받아들고, 혹은 받아먹고 다시 예언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두 증인과 어떤 관계인가? 예수의 무덤에 등장한 두 사람과 하늘로 올라갈 때의 두 천사, 이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베드로에게 두 증인은 언제 등장하는가?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 16, 17)라고, 이후에 광야의 마귀의 시험 이야기를 마태는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 예수는 기름부음(감람유)에 의해 산상수훈을 말하고, 다락방 강화 등 수많은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증거한다. 제자들은 수많은 예수의 증거를 듣는다. 그리고 예수를 따른다. 이 때 예수의 증거는 비록 기름부음에 의해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고 가르치지만, 그리고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그리스도는 명백하게 세상 임금 그리스도였다. 물론 이는 예수 자신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자들의 생각과 현실 속에서 좇는 그리스도였다. 예수는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증인의 삶을 살았지만, 제자들은 마흔 두달 동안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채 예수를 세상 임금 그리스도로 삼는다. 성전 밖의 지배자, 해가 아니라 어둠의 빛 곧 달빛으로 삼는다. 큰 자 이데올로기에 빠져 예수의 증거를 큰 자의 복음으로 삼는 현상이다.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짓밟히고 있는 때다. 산상수훈과 다락방 강화가 증거되고 선포되어도(성전 척량) 제자들의 겉사람의 욕망 아래서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히고 있는 때다. 이게 인간의 실존이다. 아브람이 언약을 받지만 아브람의 때에는 단지 약속일 뿐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산상수훈의 주옥같은 증거를 받아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큰 자의 귀로 듣고, 큰 자의 눈으로 해석하고, 큰 자의 눈으로 보고, 큰 자의 입으로 말하려 하기 때문에 예수의 증거를 듣고도 듣지 뭇한다. 하여 성전 밖에 머물며 성전 마당만 밟는다. 마흔 두 달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의 고백은 모두 큰 자의 욕망을 분출시키는 것이었고, 성전 밖의 이야기요, 돌 성전 이데올로기 일 뿐이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 20- 21)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 33-34) 그러므로 예수 자신과는 상관없이 제자들에게 예수는 세상 임금이고 메시야 또한 세상임금 메시야(그리스도)다. 그럼에도 감람나무의 기름부음 없이 산상수훈은 증거될 수 없다. 동상이몽, 듣는 이가 큰 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듣고 있어서 들리지 않을 뿐이다. 이 때는 다만, 산상수훈도 단지 약속이고 언약일 뿐이다. 여전히 꿈일 뿐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약이라는 용어가 그래서 나온다. 이 때는 큰 자(세상 임금)만 있을 뿐 작은 자의 증인은 보이지 않는다. 즉, 작은 자의 증인, 두 증인이 도래하기 전이라는 뜻이다. 큰 자의 이데올로기가 베어져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언약이기에 베르트 곧 언약(2 covenant)이고 할레와 피의 언약(카라트 언약 2)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오게 된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니 육체의 할례는 이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아직 이루어지기 전이니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라 해도 이면적으로는 이방인이다. 언제 그 마음의 양피가 베어지고 언약이 성취될까? 마음의 양피가 베이기 전에는 이방인이니 그의 관심사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통해 큰 자의 소망을 이루려는 것, 그것이다. 이 때의 예수와 이 때의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큰 자의 상징이다. 아브람의 때고, 이스마엘의 때고, 에서의 때다. 큰 자 베드로가 베임을 받는 것, 그것은 그에게 화가 임하는 것이다. 큰 자가 심판을 받는 것이고, 큰 자의 재앙이 임하는 것이다. 아브람이 화를 당하는 게 첫 번째 화다. 화가 임하기 전에 아브람의 수고와 아브람의 열심이 불의 임이 드러나야 한다. 베드로의 충성과 베드로의 열심이 불의 임이 드러나야 한다. 불의 임이 드러나는 게 아브람에게는 화이고, 불의 임이 드러나는 게 베드로에게는 화다. 닭 울음 소리와 비자 앞에서 에수를 부인하는 게 베드로의 첫 번 째 화다. 화를 당하여야 다음으로 나아간다. 화를 당한다는 건, 짐승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짐승의 형상은 계시록에 의하면 다양한 형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중 하나를 보면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계 9: 17- 19) 이는 일곱 번째 인을 뗄 때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서 들통난 인간의 마음에 그려져 있는 일그러진 괴물의 형상을 일컫는다. 큰 자 이데올로기를 따라 살다 보면 저 같은 형상을 만들게 된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자신이 이 같은 괴물이 되어 있음을 발견 할 수 없다. 이 같은 우리의 괴물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를 심판하고 극복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두가 큰 자 이데올로기가 창조해낸 창조물이다.
예수는 마침내 세상 임금으로 변형된(베드로와 제자들에 의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준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마침내 마음의 할례를 하게 된다. 아직은 혼돈이지만, 첫 번째 증인 예수가 있고 두 번째 증인 그리스도를 만난다. 아니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두 증인을 통해 베드로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두 번의 안수도 두 증인을 상징한다. 빈 무덤에는 묻힌 예수와 살아난 예수가 있다. 빈 무덤에는 세상 임금 그리스도를 묻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그리스도가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두 증인을 밖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흔적으로 갖고 있고 두 증인이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 때의 베드로도 베드로를 증거하고 있고 이후의 증거도 베드로를 증거한다. 두 증인을 만나 두 증인의 증거가 확연하게 된다. 비로소 큰 자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작은 자의 책을 지니게 된다. 죽은 그리스도가 없으면 살아난 그리스도는 거짓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의 증거가 없으면 아브라함의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려면 아브람 시대가 증거되어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증거가 참이 된다는 말이다. 성서는 언제나 두 증인이다. 이스마엘이 없으면 이삭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땅의 예루살렘 곧 종의 자녀로 살았던 세월이 없이 자유가 입증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에서가 없이 야곱이 야곱으로 증거될 수 없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다. 두 증인이라는 말이다. 두 증인은 큰 자의 세월이 들통나고 비로소 작은 자의 시대가 도래할 때 두 증인이다. 큰 자의 책이 작은 자의 책으로 다시 예언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성서에 두 증인이어야 비로소 증거능력이 있다는 뜻이 거기에 있다. 큰 자 이데올로기는 허위고 속임이다. 인생이 좇는 허위의 파랑새요 다툼이고 경쟁이고 짓밟음이고 괴물을 창조하는 행위다. 성서의 모든 책은 큰 자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좇아가는 그 모든 것을 심판라려는 때에 등장하는 게 두 증인이다. 비록 작은 책으로 예언할지라도 큰 자를 좇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큰 자를 꿈꾸게 한다. 하여 두 증인이 죽어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 죽음으로 작은 책을 온전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하여 마흔 두 달과 일천이백육십일의 양면성이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미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 드러났던 것, 묵시문학에서 순례의 길을 가는 개인에게 각자 자기의 대를 따라(절기) 이루어질 예언이다. 크로노스의 종말론 프레임이 아니다. 성서의 모든 예언은 아들로 수렴된다.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짐승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다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신성을 이루는 것을 향해 있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방식은 어느 때 어느 민족이든 유사하다. 화, 화, 화는 존재의 여행을 하려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큰 자의 유형을 심판하는 과정이다. 아브람이 화를 당해야 아브라함이 도래한다. 이스마엘이 광야로 쫒겨나야 이삭의 존재가 드러난다. 에서는 또 다른 나다. 또 다른 나 에서가 화를 당해야 야곱의 나가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이나 복음서와 무관하지 않다.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두 사람은 사도행전 예수의 부활 이야기와 더불어 구름과 함게 떠나가는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아직 큰 성 베벨론이 심판에 이르기 전의 이야기다. 두 증인은 요한계시록 11장 이야기다.
요한계시록은 노스트라다무스 유형의 책이 아니다. 미래 예언의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미래 어느날 자칭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두 증인은 베드로의 일생을 두고 앞에 있는 예수와 더불어 그 안에서 그리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생생히 등장하듯, 모든 인생의 순례길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외부의 원리와 더불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내면에 두 때가 있는 것이다. 아브람의 때와 아브라함의 때를 단지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개인 이야기로 읽는 게 아니듯, 아브람의 때와 아브라함의 때를 맞이하는 것은 두 종류의 믿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생에게는 자신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두 증인도 역시 자신 안에서 맞이하는 두 증인 얘기라는 뜻이다. 두 증인도 역시 자신 안에서 맞이하는 두 증인 얘기라는 뜻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도 소위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두 증인의 그림자를 상징한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두 증인에 해당한다. 요한계시록은 그 각각의 절기 모두를 함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11장의 때에 즉 일곱 번째 인을 떼고 여섯 번째의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될 때(절기)에 등장하는 두 증인이다. 천사가 나팔을 분다는 것의 의미는 기회가 허락될 때 다른 글에서 논하기로 한다. 요한계시록을 노스트라다무스류의 미래 종말론서로 읽으려는 모든 방식은 성서를 터무니 없이 읽어가는 종교병이 만들어낸 깊은 질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