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예랑 출판)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맥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 24)
아담은 두 아들을 낳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은 두 존재의 양태로 자신의 삶을 낳게 되는데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이 맺게 되는 두 열매며, 두 양태요, 두 계보며, 두 개의 형상이다. 아담의 두 형상이 곧 가인과 아벨이라면, 먼저는 땅에 속한 형상이니 가인이고, 두 번째는 하늘에 속한 형상이니 아벨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땅에 속한 형상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부정한 셈이다. 가인은 생명을 지향코자 하는 또 다른 형상인 아벨을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처음엔 누구나 그러하다. 생명을 부정한 결과, 생명과는 정반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가온다. 가인이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살려고 애쓴 애씀의 결과가 사망이고 죽음이며 두려움만 초래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선악의 삶이 가져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가인을 만나는 누구도 가인을 죽일 수 없다. 가인을 죽이는 것, 곧 심판하는 것은 심판하는 그 역시 선악에 속해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인보다 일곱 배나 더한 선악에 경도되어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인다는 것은 가인보다 더한 선악의 징표인 셈이다. 일곱 배의 화가 이미 거기에 머물고 있음을 나타내줄 따름이다.
가인은 쫓겨나 유리하는 자가 된다. 이때 이마에 표를 갖게 된다. 무슨 표일까. 선악에 속한 자임을 나타내주는 표다. 그것은 늘 얼굴에 나타난다. 자신과 다른 견해의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미간이 일그러진다. 이마에 나타나는 가인의 표다. 나의 견해는 옳고 상대의 견해는 틀리다는 표시를 미간의 일그러짐이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미단의 일그러짐으로 그가 선악의 사람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인의 칠대 손(선악으로 일곱 번 다시 태어난) 라멕이 있다. 칠대 손이니 선악을 바탕으로 한 힘의 질서 상위에 편입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선악의 질서 상층부에 있다는 것은 권위와 부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해놓고, 권위를 목숨처럼 여기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인의 칠대 손 라멕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위의 정점에 머무는 존재의 실존을 의미한다. 라멕은 말한다. 가인을 위해서는 칠 배였지만, 나를 상하게 하면 그 벌을 칠십칠 배로 갚아 주리라고. 라멕의 후예인 종교지도자들은 말한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같은 도전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자신에 대한 도전은 결코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협박하며 공갈한다. 듣는 사람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같은 힘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기독교 교회는 라멕의 고함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며 교인들을 억압한다. 소위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면, 영원한 징벌에 떨어지게 된다는 터무니 없는 논리는 스스로 라멕의 후예임을 웅변할 뿐이다. 선악의 세계는 힘의 질서체계다. 검찰 권위에 도전하며 누누든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현실 속 수 많은 사건이 라멕의 후예임을 온몸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가인의 후예인 우리 모두에게 있는 지독한 질병이며 속성이다. 권위주의는 늘 스스로 분노한다. 그리고 경계한다. 권위가 훼손당하면 칠십 칠 배로 응징하겠다고 소리친다. 소위 기득권의 체계를 유지하려는 관성은 그에 도전하는 세력에 칠십 칠 배로 응징하려는 속성을 드러낸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 같이 형성된 권위는 철폐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사망의 시스템이다. 종교 권력이든, 정치 권력이든, 검찰 권력이든 권력과 권위에 기생하려는 우리들의 속성이 곧 라멕이다.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가 진술하는 바는 선악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그 가치관으로 일곱 번 거듭난 인생의 실존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 인한 절망감도 잠시, 중요한 것은 비록 가인에 의해 아벨이 죽임을 당했더라도, 때가 되면 셋이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순례길은 이 두 존재의 긴 갈들의 여로(旅路)다. 에덴 이야기는 가인의 후손인 라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셋의 게보에 속한 '라멕'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 라멕은 노아를 낳는다. 이름은 같은데 존재 양태는 전혀 다르니 거기 우리의 나아갈 길에 대한 예언과 힌트가 있다.가인의 계보가 있고 셋의 계보가 있다. 성서의 이야기 속에는 늘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두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에덴 이야기는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 낳고 낳고를 이어가는 계보 이야기다. 사람(아담)의 이야기에는 두 계보가 면면히 흐른다.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다. 선악의 계보와 생명의 계보다.
가인의 계보 ...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 16- 24)
아담(셋)의 계보 ...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을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 4: 25- 5: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