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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가인을 죽이는 자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예랑 출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 4: 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것이 성서 야웨의 말씀이다. 성서를 읽는 오늘날 독자들은 어떠한가 독자들에 의해 가인은 늘 죽임을 당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 43- 44) 

원수는 선악의 세계에 존재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 기준을 적용할 때 원수가 성립한다. 만일 선악의 기준이 떠나고 나면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은 원수가 없는 세계에 머물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즉, 선악의 세계를 넘어 생명의 세계에 머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너희를 핍박하는 그가 원수기보다는 그가 선악의 세계에 머물고 있어 그의 세계관에 따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면 그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가인으로 살 때가 있기게 가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처음 모습이라는 점을 알아차리자. 따라서 핍박하는 그가 또 다른 나라는 자각이 찾아오게 되면 핍박하는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뿐 원수로 대할 수 없게 된다. 더이상 원수가 아니라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인으로 살 때의 내 모습을 띠고 있는 가인들은 아벨의 가치관에 대해 콧방귀를 뀌고 핍박하게 된다. 아니 여전히 내 속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그가 원수가 될 수 없게 된다. 선악으로 분별하거나 나눠서 옳은 사람과 그른 사람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 마치 하늘의 해가 선인이나 악인을 구분해서 그 빛과 따스한 온기를 내려보내는 것이 아니듯,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은 선악의 세계에서 넘어서라는 경구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가인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다. 특별히 가인은 설교하는 사람들이나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늘 살해당한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성서의 예언은 과연 어떻게 성취될까? 성서를 면밀히 살피는 사람들도, 단어의 의미를 탐색하고 성서를 좀 더 성실히 읽고자 하는 많은 이들도 여전히 가인을 죽이는 데 앞장선다. 물론 가인을 경계하자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 12)

그러나 가인을 경계하는 일과 가인을 죽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가인을 죽이고 나면 스스로를 아벨과 동일시하고 가인에 대해서는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읽게 되고 성서에 대한 오독(誤讀)을 반복하게 된다. 전지적 작가의 관점으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한 번쯤 살펴보자. 도대체 작가는 가인이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단순히 권선징악을 교훈하려는 걸까? 그러한 이분법은 인생을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 거다. 가인은 악하고 아벨은 선한 자로 읽는 방식이야말로 선악 이분법으로 선악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로지 선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열망이고 소원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모범생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그 정신을 제한하고 빈약하게 만든다. 대개 독자들은 가인을 악으로 아벨을 선으로 규정하려 한다. 요한은 아벨을 선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의로운 자'로 묘사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의란 도덕적 옳고 그름의 의미가 아니다. 가면을 쓰고 타자 중심으로 사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자신을 향해 서게 될 때 그를 일컬어 비로소 '의롭다(본래의 자기 자신을 향해 서 있는 걸 일컬어 성서는 義라 한다)' 칭한다. 엄격히 하면 가인은 그의 '일'이 악했다고 기록한다. 하여 가인은 악한 사람이라 칭해진다. 선악에 속해 있으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악'이 된다. 그가 선이라고 여기는 선도 악이고 악도 악이다. 왜냐면 그의 '선'은  자긍심과 자신의 옮음 즉, 선민의식으로 이끌게 하는 선이기 때문에 선조차도 악의 씨가 되는 것이다. 선악에 속하여 행하는 사랑은 스스로 사랑을 베푼다고 여기며 배타적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사랑이기에 그의 사랑은 악의 씨가 되고, 타인을 살해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가인의 배역을 어떻게 생각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걸까. 처음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기반으로 그 정신의 형상이 형성되기 때문에 본질이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자아여서 생존의 세계를 살아낸다. 아담과 하와는 우리 내면의 두 실존이다. 남자와 여자의 두 속성이 결합하여 태어나는 정신의 아이덴티티, 그 처음 속성이 '가인'이다. 따라서 가인은 '나'를 일컫는다. 소유와 권력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닌 존재를 일컬어 '가인'이라 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역시 '나'의 두 실존이다. 아벨은 두 번째의 '나',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깊은 인식 속에서 찾아오는 '나'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부터 자유하고 자재(自在)하면 어떨까? 아집에 사로잡혀 있고 법집의 고집에 갇혀 있는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아는 것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아는 것은 힘인 동시에 감옥이다. 앎은 자유와 희열을 잠시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근원이다. 자신의 앎에 사로잡혀 그 밖의 것에 대해 경계하게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는 원천이다. 하여 법집(法執)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조차도 터무니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앎을 고집하지 않는다. 비로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이르게 된다. 아공과 법공으로 형성된 새로운 '나'의 실존 인식이 '아벨'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다는 드라마를 담고 있는 게 에덴 이야기다.이공이니 법공이니 쓸데없는 말로 인생을 현혹하지 말고 그대의 입에 풀칠이나 제대로 하라는 엄혹한 생존 현실에 내몰리게 되고 그로 인해 언제나 아벨은 죽임을 당하고 순간순간 살해당하는 것이다. 그대와 내 안에서의 아벨은 그렇게 죽임당한다. 그러므로 이야기 속 가인을 질타하며 가인을 심판하고 가인을 죽이고 나면 듣는 이나 심판하는 이는 시원하고 통쾌하겠지만, 정작 자신 안에 있는 '가인'의 속성은 보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 안에서 가인이 더욱 기승하고 있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가인을 심판하는 그 기세로 자신 안에 있는 '아벨'을 죽이고 수많은 타인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여 가인보다 칠 배나 더한 형편에 머물고 만다. 수많은 사람의 정신을 결박하고 죽여놓고서도 죽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자신의 의로움에 갇혀(특히 성서나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소위 法執에 사로잡혀) 가인을 심판하고 타인들을 향하여 가인 같이 살지 말라는 목소리를 높인다. 거기서는 종교 권력을 구가하는 즐거움은 만끽할지 모르나 그 스스로 얼마나 강퍅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가인을 살게 하고 아벨을 죽이는 셈이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이는 가인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가인은 죽여 없엘 존재가 아니다. 성서는 그 스스로 두려움에 떨고있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다고 기록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도리어 가인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욱 강퍅함에 머물고 있다. 가인은 죽여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가인을 통해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해야 한다. 가인이 곧 '나'라는 사실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 가인은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존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가인의 기록과 그 족적이 이미 '나'라는 사실, 더구나 가인은 두 번째의 '나'인 '아벨'을 죽이는 존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가인의 기록과 그 족적이 이미 '나'라는 사실, 더구나 가인은 두 번째의 '나'인 '아벨'을 죽이는 존재임을 속히 깨달아야 창세기 4장의 그 모든 이야기도 '나'를 증거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인을 죽이는 성서 해설가들과 설교가들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로 읽고 있으며 단순히 가인과 아벨로부터 교훈만을 취하려는 선생들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