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예랑 출판)
바울은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으니 유대교에 정통한 인물이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임을 기록할 정도로 모세오경에 정통했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전승되어오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 펙트 체크를 통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선양하고 노래하는 유대교적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모세오경을 대한다.
신약성서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서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뮈토스)를 단지 이야기로 읽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로고스'를 읽어내는 전범(典範)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아내와 가족들의 배역을 의식계(意識界)의 각종 요소로 해석한다. 그 모든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비유로 보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람 시절 하갈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요 종에 속한 자라고 해석한다. 사라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며 어머머니라고 일컫고 이삭을 약속의 자녀, 언약의 자녀며 자유자라고 해석해 버린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읽어내는 '로고스'라 하겠다. 단지 이야기로만 읽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처럼 우리는 에덴의 뮈토스에서 로고스를 읽어내려 하는 것이고, 그것은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갈라디아서를 써내려가는,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의 가족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 바울의 방식이 좋은 사례라는 말이다. 모든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꾸며진다. 항상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이야기에 녹아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족장 시대의 문화적 배경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야기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야기를 해석하는 이들은 역사적 배경과 구성 요소가 작가에 의해 과장 혹은 축소된다 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역사적 배경을 서술할 때조차도 그 배경은 이야기꾼의 해석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절대적 객관을 담보할 수는 없 다. 소설 박경리 '토지'는 한국의 근세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각종 취재와 근거를 갖고 배경을 꾸몄고 그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하더라도 논픽션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장면마다 팩트 체크하며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오류냐 비오류냐를 첨예하게 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각각을 상징과 비유로 해석하고 있다. 유대교적 시각, 곧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하고 그러므로 배후에 있는 위대한 신을 숭배하고 찬양해댜 한다는 방식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과 영성의 발달단계의 각종 요소에 대한 상징으로 이야기 속 인물들을 해석해 놨다. 갈라디아 4장은 대표적인 사례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 22- 26)
기독교는 예수를 숭배하며 예수를 배반하고 바울신학을 강조하며 바울을 배신하고 있는 역설에 머물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결국 반유대적이었다. 기독교는 바울을 배우기보다는 도리어 변형된 유대교요, 바울이 떠나왔던 자리를 향해 서 있는 역사적 퇴보, 오늘의 기독교가 바울 이전의 유대교나 중세의 그것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교황 중심이 아니라는 게 달라진 거라고 강변할 수 있을까? 유대교의 그것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저 각종 제사 양식이 다르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다. 이러한 비판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종교 개혁가 루터는 카톨릭에서 분가하며 이삿짐을 너무 많이 갖고 나왔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형식만 조금 달리할 뿐, 변종 유대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바울 서신이 신약성서에 채택된 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바울을 앞세우며 바울을 거세했다. 기독교가 바울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작금의 모습으로 머물 수 없다. 기독교는 예수와 바울을 독점하며 그들을 배신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 방식을 일견해보자. 아브람은 아브람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의 좌충우돌이 전기 아브람의 이야기다. 아브람은 비록 아브람이지만 그에게는 약속이 주어졌다.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언약이 있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척박한 땅 가나안은 본향이며 약속이며 소망이다. 히브리인들에게 가나안은 자주 기근이 들어 먹거리조차 해결할 수 없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유업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중심에는 언제나 가나안이 있고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중심에는 언제나 가나안이 있고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중심인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하다. 야곱의 막둥이 요셉은 출(出)가나안, 입(入)애굽의 상징이다. 이유야 어떻든 약속의 땅을 벗어나게 된다. 가나안에서의 기근과 가나안에서 겪게 되는 형제들의 아비규환으로부터 탈출, 애굽의 풍요에 귀속되는 주인공이 된다.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과 더불어 그 형제들이 애굽의 풍요 속에 귀속되며 바로의 노예가 되어가는, 가나안을 잃게 되는 얘기다.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의 푹복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서를 겉으로 읽는 방식이다. 요셉 이야기는 가나안의 상실을 의미하고, 애굽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 동시에 바로의 노예가 되는 첩경임을 읽어야 한다. 성서를 전체로 읽기보다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읽고 침소봉대한다.
아브람 언약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고, 가나안에서의 좌충우돌이 아브람의 전기라는 점, 이때의 아브람은 75세로 기록되고 있으니 오늘날 나이와 셈법이 다르다 해도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라 하겠다. 75세 이전의 아브람에 대해 성서는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 대해 간단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 대해 간단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 즉, 75세 이전은 성서의 이야기에서 중심 주제가 아니고 이야기의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이야기 구성 요소에 전혀 비중이 없다. 모든 이야기 중심에는 약속(언약)이 있고 가나안이 중심 주제다. 약속 혹은 언약이라는 성서의 독특한 개념 뿌리를 짚어봐야 하겠지만, 언약이라는 성서의 독특한 개념 뿌리를 짚어봐야 하겠지만, 언약의 주어는 언제나 야웨다. 오늘날 언어로 풀어보면 본질적인 자아의식의 깊은 곳에서 찾아오는, 혹은 주어지는 자기 근원에 대한 소망과 됨됨이를 향하여 서게 된다는 게 언약의 핵심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의 이상적 삶의 모습, 존재의 본향에 대한 형상이 언약으로 표현된다. 누구나 품게 되는 삶에 대한 이상이라 해도 좋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가장 근원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 갖게 되는 자아상이 곧 언약이다. 이때의 주어는 야웨고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이미 타자화된 또 다른 자아 곧 타자 자아(others ego)다. 아브람의 지난(支亂)한 이야기를 거쳐 아브라함이 찾아와야 성서의 이야기는 비로소 이야기 꼴을 갖추게 된다. 모든 이야기는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요소가 담길 때 이야기가 된다. 아브람 때의 아브라함은 약속으로만 있고, 현실이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주체(주어)였던 야웨가 비로소 현현(顯現, theophany)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는 진행된다. 야웨가 비로소 드러나고 나타났다 하더라도 야웨와 아브라함은 여전히 둘이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여인들, 그리고 가족사를 바울은 어떻게 읽고 있을까. 아브람으로 있을 때 금과옥조와 같은 멘트가 있다 해도 그것은 이야기 구성 요소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성서의 이야기는 내러티브, 곧 서사를 통해 발언하는 책이지 한 부분을 통해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조차도 예수의 서사에 속한 한 부분일 분,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산상수훈도 읽어야 바로소 전체를 통해 부분이 조명된다. 동시에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인생은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각자는 각자의 이야기를 남기게 된다. 그때 단지 아브람의 이야기만을 쓰게 되면 이야기가 구성되지 않는다. 아브람의 이야기가 없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립 불가능하다. 누구나 아브람을 거쳐 아브라함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야기가 제대로 구성되려면 이 같은 구조가 있어야 하고 거기엔 누구도 예외가 없다. 다만, 장미는 장미의 모양으로 가시나무는 가시나무 모양으로 그 이야기를 써내려갈 뿐이다. 모든 경전은 이야기 형태다. 금언 모음집은 경전이 될 수 없다.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금언은 이야기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의미로 작용한다. 삶의 의미 물음과 가치는 한 편의 설교나 금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일 수밖에 없었던 삼류에서부터 시작, 처절한 인간실존이 담겨 있고 이를 극복하며 존재로 나아가는 수많은 여정을 통해 전승되는 법이라 하겠다. 저 혼자 고고한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저 혼자 옳고 그밖에 모두는 틀렸다는 악다구니만으로는 이야기가 구성되지 않는다. 바울은 이야기에 담겨 있는 영성을 탁월하게 해석해주고 있어서 그의 서신서들이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아울러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남겨 놓았기에 오늘도 전승되고 있다. 우리도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이야기꾼인 셈이라 하겠다. 다만 이야기의 구성 요소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전승은커녕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는 이야기의 아름다운 구성으로 아브라함보다 더 진한 이야기를 남겨 놓을 것이다.
각자의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야웨'며 '자기 자신'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래와 사라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다. 바울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에덴의 이야기를 읽어보자는 거다. 나를 둘러싼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내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조연이다.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그대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대 자신이요, 신성으로 드러난 '야웨'만이 주인공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