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예랑 출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 18- 19)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성구는 장례식에서 무덤에 시신을 안장할 때 인생의 허무를 표현하는 주례사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장례식 주례 문구에 인용하기 위한 구절일까. 원시 복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에덴의 이야기는 창세기 2장 4절부터 시작된다. 에덴의 이야기는 창세기 2장 4절부터 시작된다. 에덴의 이야기는 창조 설화와 더불어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된 복음서다. 성서엔 수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들 이야기는 에덴의 이야기가 담고 잇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거기서 전하고자 하는 천로역정(天路歷程)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신화적 서술방식을 띠고 있으나 이 짧고 간결한 이야기는 수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최초, 최고의 복음서라 해도 무방하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나온 '아담 더스트(the man of the dust)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금 반복되더라도 한번 더 일별해 보자.
에덴의 이야기는 천지의 낳고 낳음(계보)이라(창 2: 4)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그 마음의 형상이 약육강식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아다마(땅, Ground)로 비유한다. 비록 사람은 사람이로되 마음의 형상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그 마음의 형상이 짐승이라는 의미며, 정글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마음의 형상을 일컫는다. 이때 사람의 마음은 야웨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는 상태요, 경작할 사람이 없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시는 상태라 비유한다.(창 2: 5- 6) 단지 생존을 위한 본능을 중심으로 마음이 작용하는 상태라 하겠다. 야웨 하나님, 곧 "나는 나다"인 인식의 눈이 작동하지 않은 원시 상태의 마음이다. 사람은 본래 처음 부득불 그렇게 초기화된다. 창세기 2장 7절의 주어는 야웨 하나님이다. 야웨 하나님이 아다마로부터 흙 사람을 창조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한다. 여기서 아파르란 우리말로 티끌과 먼지와 같이 잘개 부수어진 분토를 의미한다. 굳은 땅을 쟁기질하고 돌맹이를 골라내어 기경한 고운 밭의 흙가루와 같다. 마태복음 13장 마음 땅의 비유에 등장하는 옥토와 같은 땅을 일컬어 '아파르'라 하고 이를 일러 비로소 아담(사람)이라 칭한다. 아담은 아다마로부터 나온 흙의 가루(아파르)다. 아다마가 그 마음이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아담 아파르는 그 마음의 형상이 비로소 사람의 형상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나는 티끌과 같습니다."라는 아브라함이나 시편 기자들의 고백처럼 그렇게 낮아진 마음을 일컫는다. 자신은 티끌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 인식이 찾아오는 때를 일컬어 비로소 '사람'이라 칭하고 '아담 아파르'라 한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루아흐)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 마음이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던, 하여 오로지 생존본능에 충실해 약육강식의 상층부를 지향하고 있던 존재에게 생기(니스마트 하임)의 바람이 부니 야웨를 향해 서 있는 레네페쉬 하야가 되었다는 의미다. 새나 동물도 '네페쉬 하야'다. 산 혼이다. 성서는 본능에 충실한 생물을 일컬어 네페쉬 하야라 한다. 다만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마음의 상태가 야웨, 곧 자기의 자신 됨을 지향해 서 있는 존재의 이행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레네페쉬 하야라 한다.
이미 앞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 이를 성서는 거듭태어남이라고 한다. 다시 태어남이란, 마음의 상태가 짐승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의 변화가 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구원(소조, 구원하다)이라는 성서의 독특한 명칭이 등장한다. 무명(無明)이란 빛이 없음을 뜻한다. 사람의 사람됨에 눈뜨지 못하고 오로지 동물의 형상에 충실하게 되는 경우라 하겠다. 그 정신이 짐승의 형상이다. 여기서 구원은 단회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명사기보다는 동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will be saved)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 22)
마음이 짐승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거듭 태어났다면, 이제는 사람의 됨됨이의 꼴을 갖춰가고 사람의 삶을 살아내야 하듯, 구원이란 사람의 삶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 있다. 이를 일컬어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성서는 말한다. 아울러 사람의 아들을 낳을 때 사람은 또한 사람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다. 창세기 2장은 '아담 아파르'라는 새로운 사람의 형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비유한다. 에덴동산이란 동쪽에 세워진 동산이다. 동쪽은 지리적으로는 해가 뜨는 곳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동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유대인들의 동쪽은 언제나 시온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리적 동쪽은 아다마가 지향하는 동쪽이요, 아담 아파르가 지향하는 동쪽은 언제 어디서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동쪽이다. 야웨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니, 마음 깊은 곳 지성소의 빛을 향해 서 있는 마음의 땅을 일컬어 에덴동산이라 비유하는 것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동산지기가 되었다. 그땅은 아다마와 달리 각종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있고 동산 중앙에도 두 나무가 있는 동산이다. 동산지가가 된 아담 아파르는 아내를 맞이하게 되고 아내를 향해 갈비뼈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다.
성서는 사람의 형상을 지닌 아담 아파르가 되었다 해도 사람이 사람다움으로 자라가야 하듯,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야웨 하나님의 의로 옷 입고, 사람다움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애굽에서 벗어난 것이 비록 기쁘고 행복하다 해도 광야에서 애굽의 습성을 모두 벗어버려야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 출애굽 이야기가 전해주는 바다. 광야는 애굽의 옷을 벗는 장소요, 벌거숭이가 되는 고난의 장소기도 하다. 출애굽 이야기의 애굽은 아다마와 짝을 이루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하는 것은 아파르가 되어가는 과정과 같다. 따라서 출애굽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인 셈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에덴 이야기와 그대로 평행이론이 적용된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채 있으면서도 부끄러워 아니하고 있을 때 동산의 뱀이 선악의 지식으로 유혹해 미혹에 빠트린 것과 같이, 왕의 제도를 도입하여 야웨 하나님의 역할이 축소되고 보이는 왕이 다스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고 마침내는 바빌론 포로 신세가 되고 만다. 동산에서 야웨 하나님을 선악의 하나님으로 변모시키고 영적 지식의 노예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 땅에 영지주의가 판을치고 깨달음을 중심으로 왕을 세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왕으로 인해 안도하게 된다. 바빌론이 포로가 되고서야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부끄러움이 드러나자 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따라서 선악의 나무는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나무라는 말이다. 영적 지식의 자긍심은 교만하게 한다. 그것이 오래되면 마침내 부끄러움이 찾아온다. 인생은 누구나 이 같은 질곡을 겪게 된다. 부끄러움이 찾아오고서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더 이상 지식으로 인한 북극성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비움의 도는 그렇게 찾아 온다. 광야에서 애굽의 모든 속성을 벗어던진 후에 가나안에 입성했다 해도, 새로운 옷을 입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서의 삶은 잠시고, 북방 바빌론의 지식으로 옷 잆었다. 지성소의 야웨로부터 흐르는 기름 부음 곧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함에도 기름 부음은 외면한 채 (벌거벗은 채)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양식으로 삼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입었다. 인생이 그러하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의 칼 아래 짓밟히고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의 예언을 만나게 된다. 창세기 3장 19절은 마치 에스겔의 예언을 방불한다.
전에는 내가 그들로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겔 39: 28) 네가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 19)
이는 이렇게 다시 번역해 볼 수 있겠다.
네가 흙(아다마)으로 돌아가는 동안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 네가 그곳에서 취함을 입었기 빼문이다(키) 그러나(키) 너는 흙(아파르)이다. 그러므로 흙(아파르)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 3: 19절 번역 성경만 보면 3회 등장하는 '흙'이 같은 '흙'인 줄 알게 된다. 아니다. 처음 흙은 하아다마(아다마)요, 다음 두 번은 아파르다. 황무지 곧 거기가 애굽이든, 바빌론이든 아다마에 머물게 되면 수고의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비록 다시 아다마의 덧(바빌론)에 잠시 빠졌다 하더라도 너는 아파르였기 때문에 아파르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예언하고 있다. 에덴 이야기의 놀라운 점은 그가 취함을 입었던 바로 그 자리, 하아다마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여기 하아다마는 히브리인의 출애굽후 이야기에서는 바벨론이라는 점이다. 바벨론은 하아다마요, 마치 일곱귀신 이야기처럼 처음보다 더 악한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더욱 강퍅하게 된다. 그게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이야기의 메타포요, 여전히 에덴 이야기에 이미 담고 있다. 하아다마를 떠나서 에덴에 잠시 머물게 되지만, 다시 하아다마로 돌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예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아다마로 돌아가는 예언뿐만 아니라, 아파르니 아파르로 돌아가리라는 두 번의 예언이 창세기 3장 19절에는 담겨 있다.
* 19절 히브리어 문장에는 '키'라는 접속사가 3회 등장한다. 참고로 키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키': 히브리어 키는 (함축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접속사 또는 부사로 사용됨 (아래와 같이) 자주 첨가된 다른 불변사에 의해 크게 변형된다: ~ 그리고, +과 같이(이기 때문에, ...이므로), 확실한 (확실히), +그러나, 분명히, 의심없이, +그밖에, 조차도,+제외하고, 이는 얼마나.
창세기 3장 19절은 천로역정의 긴 여정 중 만나게 되는 위대한 예언이요 위로다. 기나긴 바빌론 포로 생활 중에 듣게 되는 에스겔의 예언이며 마른 뼈다귀에 새 살이 붙게 된다는 에스겔 골짜기의 예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덴 이야기에서 "아파르(흙)가 되리라"는 예언은 순례의 고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다. 아파르는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기 위해서는 아파르가 있어야 한다. 아파르는 누구든 각자의 자기됨의 시작이 되는 비밀이다. 비로소 야웨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파르에 숨겨 있다. 아파르는 성서 전체의 키워드다. 뱀의 먹이가 아파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뱀은 아파르를 먹이로 삼는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 14)
뱀이 아파르를 먹이로 삼게 되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 나무가 되어버린다. 영지주의에 사로잡히면 이는 마치 뱀의 먹이가 된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영적 지식을 탐닉하다가 지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고 영지(靈知)에 경도되면, 그를 준거로 늘 심판자가 되고 배타적이 되고 만다. 영적 지식을 도그마로 삼고 독단에 빠지게 된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식물을 먹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9절의 아다마는 애굽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 땅을 비유한다. 비록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된다는 점에서 애굽과 바빌론은 비슷한 유형을 띠지만, 그 형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에덴 이야기에서 애굽은 2장 5- 6절에 등장하는 안개만 올라오는 땅 하아다마(황무지)에 머물고 있는 상태라 하겠다. 창세기 2장 5- 6절을 출애굽 이야기의 구조에 대응시켜 본다면 애굽에 상응한다는 말이다. 애굽에 비해 바빌론의 하아다마는 선악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고 있어서 더 강퍅한 상태라 하겠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빌론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보면 북방 민족이고 고대 문명의 지혜와 지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선악의 지식이란 북방 민족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야기와 구조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 지식의 자긍심에 도취되는 게 곧 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결국 선악의 걍퍅함에 서서 배타(背他)적이 되고 만다.
에덴 이야기 속에는 출애굽 이야기와 바빌론 포로 이야기, 그리고 출 바빌론 이야기, 포로 귀환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스룹바벨 성전의 이야기까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는 따라서 에덴 이야기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약의 이야기조차도 에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들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야기의 원형 곧 아르키타입이 에덴 이야기고 또한 창조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되새기게게 된다. 에덴 이야기는 성서 모든 이야기의 밑그림이고 바탕이며 원형이다. 그 외 모든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변주고 그 시대마다 새로운 버전(version)일 뿐이다. 사복음서는 물론이고 요한계시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나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