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 지음-
출판사 예랑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라 네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 14- 15)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 17)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 9)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 18)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어떻게 상하게 할까? 베드로의 머리는 세상 임금 예수였다. 예수는 뱀의 머리인 베드로의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므로 베어 버린다.뱀의 머리가 잘려나가고 그곳에 그리스도를 이식(移植)한다. 남편을 내어주고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게 한다.(로마서 7장 참조) 장대에 올린 구리 뱀으로 인해 뱀에 물린 독이 풀린다. 단의 길이 뱀이라고 한다. 단은 심판을 의미한다. 선악의 지식은 늘 심판자의 자리, 판관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단은 야곱의 다섯째 아들이다.판관은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물곤 한다. 말에서 떨어뜨리려 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뱀의 씨(후손)는 말할 것도 없이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이다. 아담의 맏아들 가인만을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라. 가인이 뱀의 씨(제라)가 맞는가. 여자의 씨(후손)는 아벨이고 셋이다. 가인은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가. 아벨은 여자의 씨(후손)다. 정말인가. 에덴의 이야기는 디테일에도 주목해야 한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 1)
여기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였고,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서술한다. 하와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뱀의 씨를 받았다. 뱀의 말을 들었다는 말이다.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는 뜻은 뱀의 씨를 받았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뱀은 여자와 대화를 하며 뱀의 신학으로 여자에게 그의 씨를 뿌렸다. 아담도 같이 뱀이 준 열매를 먹는다. 아담의 씨주머니 그 정신의 정낭엔 이미 뱀의 씨를 갖고 있다. 여자는 뱀의 씨를 잉태할 뱀의 자궁을 갖고 있었다.뱀의 씨를 가진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니 뱀의 씨 가인을 낳은 것이다. 창세기 4장 2절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다는 말이 없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벨을 낳았다. 하여 아벨은 여자의 씨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 4: 2)
신약성서의 동정녀 탄생 신화가 에덴 이야기에도 담겨 있다는 말이다. 에덴 이야기는 모든 다른 이야기의 원형이다.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다. '헛됨의 인식(아벨)'은 씨를 받아서(동침) 낳는 게 아니다. 동정녀 탄생 신화는 육체의 이야기로는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얘기나 정신의 세계에서는 허구일 수 없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동정녀 탄생 설화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아들을 낳는다는 메타포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은 비록 남편 다섯이 었었더라도,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 육체의 순결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즉, 남편이 있지만, 혹은 정혼자가 있더라도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명을 주는 자'의 의미로 산자의 어미 하와의 이름이 부여된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마침내 살해 당한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의 주인공 예수도 역시 뱀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그의 일생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의 대립이었고, 예수는 그들을 향해 자주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쌍욕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쌍욕이 아니라 근거 있는 욕이다. 에덴의 비유법이고 히브리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그들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벨이 가인에 의해 살해당한 것처럼, 예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유대 민중에 의해 십자가에서 살해당한다. 가까운 거리 제자들의 우유부단도 한몫한다. 물론 베드로의 우상을 죽인 것일 뿐 실은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벨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아벨은 비록 죽었으나 셋으로 부활한다. 셋은 결국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되살아난 신약의 '그리스도'다. 새롭게 태어난 아담이다. 그러므로 뱀은 여자의 후손과 늘 원수로 표현되지만, 결국 원수가 없이는 이 일이 하나도 진행될 수 없다. 뱀은 발꿈치를 물어야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베어야 하는 거다.
에덴 이야기에서 아벨은 동정녀 탄생을 정조 하지만, 셋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동침은 뱀의 씨를 낳는 동침이고, 두 번째는 사내를 통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니 아벨이고, 세 번째는 뱀의 씨를 잉태하는 동침이 아니라, 하늘의 씨로 다시 낳는 동침이다. 이때는 뱀의 씨가 아니다. 뱀의 씨는 이미 가인으로 드러났다. 가인으로 인해 아벨이 죽임을 당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뱀의 씨는 가인을 낳고 가인의 계보를 통해 이어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시 동침하였을 때에 비로소 셋을 낳게 되니, 생명의 계보가 이어져 간다. 여기 아담과 하와가 다시 동침한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 아벨이 죽은 후 다시 셋을 낳기 위한 동침인듯, 예수가 십자가 달려 죽은 후,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서 만나게 되는 예수 이야기와 그림이 같다. 이때의 예수는 세상 임금으로 나타난 예수가 아니다. 죽은 후 부활한, 예수의 정신이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이다. 예수의 정신 곧 기름 부음이 베드로에게 나타나게 되고 그리스도는 비로소 베드로와 하나가 되고(동침에 비유된다), 한 몸을 이루게 된다. 남이 네게 띠 띄우고 가게 된다. 기름 부음과 한 몸을 이루면서 마침내 새로운 베드로로 다시 태어난다. 셋이고 비로소 '사람의 아들 하벤 하아담)'이다. 두 번째 다시 태어난다. 아벨 대신에 다른 씨다. '제라 아헤르'는 남겨둔 씨며, 다른 씨(another seed)ek. 헬라어로는 에테론 스페르마다. 생명의 계보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말이다. 아벨의 죽음은 배임 당한 상수리나무며 다른 씨는 그루터기에서 솟아난 새로운 나뭇잎이다. 따라서 하벤 하아담(그 사람의 그 아들)은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다. 오직 셋을 일러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 한다. 여기서 그 사람이란 황무지에서 벗어나 아담 아파르로 다시 태어난 '아담'이다. 하여 '하아담'이라 칭한다. 그 아들은 사연을 거쳐 다시 태어난 '셋'이어서 정관사가 붙어 있는 그 아들이다. 셋은 아담의 새로운 정체성이고 결국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을 일러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인자'라 칭했다. 인자 예수는 구약에서 '셋'이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삭'이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예수에게 한정된 게 아니다. 그는 징조요 상징이다. 새 언약은 모두 '그 사람의 그 아들'에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사람의 그 아들'을 향해 있고 그가 우리 각자의 됨됨이고 구원이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개념은 성서의 독특한 기호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따라서 이천년 전 예수에게 여자의 후손을 한정해 놓으면 계시는 닫히고 만다.새로운 우상만 덩그러니 남게 되고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사라지고 만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니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 25).
그의 근본된 토지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 3: 23)
그의 근본된 토지란, 루타 미샴을 그렇게 번역했다. 미샴은 천치사 미와 부사 '거기'를 의미하는 샴에서 비롯된다. 즉, '그곳으로부터' 요, 라카는 취하다는 의미인데, 본문은 수동태다. 다음과 같은 뜻이다.
라카 - '취하다'(매우 다양하게 적용됨) : ~ 받아들이다. 데리고 오다, 사다, 취하다, 빼낸, 가져오다, 얻다, 접다, 썩이다, 두다, 받다(받는 일), 지정해 두다, 잡다, 보내다, 취하다(빼앗다, 탈취하는 것) 사용하다, 얻다, 결혼하다, 아내를 취하다, 잡아채다, 소유하다, 지도하다.
하아다마로부터 나와서 아담 아파르가 되어 비로소 사람이 된 후 그는 본래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서 있게 되고, 그럴 때 하아다마는 경작하고 다스릴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다시 선악에 경도되어 하아다마로 돌아가게 된다. 하아다마로 돌아가서 그 땅을 경작하는 것은 에덴의 경작과 다르다.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요, 거기서의 경작은 결과물이 가시와 엉겅퀴이기 때문이다. 3장 19절 앞부분의 성취다.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얻고 필경은 흙(하아다마)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 19)
따라서 여기 근본된 토지란, 근본이라기보다는 비롯된 곳, 떠나왔던 아비 집 하아다마로 다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로쉬(머리, 근원)나 아르케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