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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돕는 배필

 

'에덴의 로고스와 뮈토스'

                      

                                       김창호 지음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 18- 23)

 

에덴의 풍요가 흐르는데 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할까.

에덴에는 네 개의 강이 흐르고 달마다 맺히는 각종 과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할까.

좋은 것도 나눌 사람이 없으면 좋음이 아니라는 뜻일까.

 

돕는 배필이란 또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돕는다는 것인가.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

인생이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가?

성립 불가능한 명제다.

도리어 인생은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은 도울 수 있는 이가 도움을 베푸는 것다.

여자가 남자를 도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속설은 여기서 성립하지 않는다.

돕는 배필이란 따라서 우열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돕는 배필과 결혼을 비유로 에덴의 이야기는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울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나눠 말한다.

로마서 7장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속사람과 죄의 법을 좇고 있는 겉사람의 갈등 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속 사람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 기지개를 켜고 그 안에 강이 흘러나온다.

마음 땅이 기경되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도 겉사람과는 늘 겉돈다.

영적 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늘의 영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독처한단다.

 

독처하는 것이 왜 좋지 못할까.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타나야 함에도 겉사람이 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겉사람은 여전히 옛습관에 젖어 있다.

돕는(에제르 남성명사 단수) 베필이란 무엇일까.

 배필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돕는 배필(에제르 케네그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실 '케네그도'는 ' ~ 앞에, 면전에서'의 의미를 갖고 있고 에제르가 핼퍼라는 뜻이다.

 

아담은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아담을 돕게 되는 주체는 여자일까?

헬퍼는 여자를 통해 아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만 보면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아담에게 먹게 하니

돕기는 커녕 훼방하는 게 아닌가?

따라서 에덴의 이야기는 대하드라마다.

어느 한 부분만을 읽게 되면 왜곡될 수밖에 없다.

성서 대부분의 헬퍼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생을 향하여 도움을 주는 이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시 54: 4)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그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창 2: 21)

 

갈비뼈는 심장과 폐를 보호한다.

심장은 피돌기 공장이고 폐는 호흡기관이다.

갈비뼈는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한ㄴ 원천을 보호하는 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갈비뼈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콩을 예로 들어 보자.

콩은 빛을 온몸으로 받는 순간 그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자기 속을 감싸고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보호한다.

또한 생명을 보호하는 동시에 껍질 안에 있는 생명의 요소들을 우주와 분리시키고 소외시킨다.

이 예에서 콩의 껍질이 바로 갈비뼈이고 갈비뼈는 곧 에고를 의미한다.

에고는 하나님의 은헤의 빛이 비취면 비췰수록 더욱 견고해져 그 속을 감싼다.

콩이 빛을 차단하며 자신 안에 생명의 씨를 숨기고 보호하듯

갈비뼈는 에고인 동시에 생명의 기운과 씨를 보호하는 신비의 보호막 역할을 한다.

 

껍질은 즉 모든 에고는 보존되어야 할 때와 와해 되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즉 껍질은 어느 시간 동안 보호를 위해 그 속을 만유로부터 분리하지만,

그 상태로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껍질이 와해 되어 보존된 씨눈과 배젖이 비로소 땅과 만나고

하늘을 만나게 해야 한다.

생명을 두껍게 보호하고 있던 껍질이 와해 되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하나의 생명은 소유하고 있으나

전체와 합일되지 않는다. 산 존재로 있을 뿐 전체와 합일되지 않는다.

와해되지 않으면 영원히 분리된다.

와해 될 때 땅과 만나고 하늘과 만난다.

땅은 나의 처소요, 하늘은 나의 지붕이며 지향해야 할 곳이 된다.

 

'나'는 참으로 신비한 존재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폐기처분만을 주장할 이기심의 존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이기심이 자신의 육체와 생명을 보호한다.

자아는 육체를 튼실히 보호하면서 거기 영성의 싹을 감춰놓고 생명의 씨눈을 박아 놓는다.

신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전 생애를 자아가 주장한다면 아무리 깊숙한 곳에 씨눈을 박아 놓았다고 해도,

씨눈은 햇볕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껍질에 갇힌 체, 에고에 갇힌 채 스러져간다.

'나'는 '나'를 보호한다. 에고의 '나'가 '나다운 나'를 잉태하고 출산한다.

나의 에고가 나의 본질을 감춰놓고 때를 기다린다.

갈비뼈는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폐를 보호하고 피돌기를 주관하는 심장을 보호한다.

때가 되면 자아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향하여 세운다.

에고의 단단한 껍질을 와해시켜 여자를 향해 세운다.

이때 비로소 여자와 하나를 이뤄 나다운 나를 새로 탄생시킨다.

그러나 서사(敍事)는 계속된다.

여자가 아담에게 뱀이 먹으라고 하는 선악의 열매를 먹게 한다.

사연을 거쳐 가인을 낳고 또 아벨을 낳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1)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와 살, 생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른 뼈는 바릴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한다.

바빌론은 어떤 나라인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한다.

바빌론은 어떤 나라인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인생이 마음의 터전인 가나안을 빼앗기고

선악(영지)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에 사로잡혔다는 말이다.

지식과 지혜를 지상 가치로 여기는 바빌론, 흔히 사람사는 세상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방식은

흔한 말로 포장마차 먹거리의 한잔으로 해소되는 갈등이다.

그러나 에덴의 선악의 지식나무는 영적 지식이다.

이를 근거로 나누는 선악은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하여 영지주의고 이스라엘로 하면 북방 민족 바빌론 포로로 잡혀가는 이야기와 상응한다는 점이다.

북극성에 올라 좌정하는 두로왕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마른 뼈다. 지식을 추구하고 율법에 머무는 것은 뼈다귀만 앙상한 에고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살도 없고 생가가 없는 그냥 마른 뼈다.

영지주의(그노티시즘)란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에 목매는 현상이다.

영적 지식과 깨달음에 사로잡히면 그 지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영적 지식을 무기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혹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살이 없고 근육이 없다.

 

그노티즘은 마른 뼈다귀에 불과하지만 인생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고서야 고토인 가나안을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영적 지식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분리한다.

두로 왕의 형상을 하고 북극에 좌정하는 모습에 자로잡힌다. 북방의 포로가 되는 자화상이다.

 

속사람이 에덴동산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마음의 땅, 꽃이 피는 곳으로 들어갔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씨알이다. 하나님의 얼이고 하나님이다.

그것은 곧 남자요, 아담이다. 겉사람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대로 씨가 뿌려져야 할 밭이며, 우리의 에고고 곧 여자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돕는 자가 될 것인가.

이는 에고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사람이든 의식 곧 정신의 세계에는 생명에 앞서 오는 것이 이기적 자아다.

에고는 어떤 역할을 하기에 '본질의 나'에 앞서 오는 것일까.

이는 무엇이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껍질이다.

우리의 겉사람과 육체가 아니면 그 속에 생명이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가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생명에 앞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이란 육체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의식의 세계에 펼쳐지는 생명의 속성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의식은 생명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사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의식활동은 생명으로 활동할 수도 있고 사망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의식이 단지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생명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모든 것을 선악으로 나눠놓고 바라보는 의식 활동은 사망의 의식 활동이다.

의식이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선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라보며 의식활동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단지 의식 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의식 활동은 사망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선악을 넘어서서 생명으로 그 의식 활동이 진행될 수도 있다.

즉 존재 자아로 살게 하는 의식 활동을 일컬어 존재케 하는 의식 활동이니 생명이라 하는 것이다.

 

속사람이란 마음에서 새롭게 빚어진 존재를 말한다.

속사람이 본래의 '나'다.

겉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속사람과 결합해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속사람의 씨알을 받아 겉사람의 살이 채워지고 하늘의 기운으로 겉사람의 모습도 바뀌어야 한다.

겉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즉 겉사람과 속사람은 둘이 아닌 하나로 합일이 되어야 한다.

모비우스의 띠는 그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겉인가 하면 속이고 속인가 하면 겉이다.

 

성경은 '내' 이야기를 뜮임없이 하고 있다.

밖의 원리는 내안의 내적 원리의 연장일 뿐이다. 따라서 밖을 알기 전에 먼저 내적 원리를 알아야 한다.

밖은 안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원리가 내 안에 내재하고 있다.

내 안의 우주를ㄹ 알기 전에 저 밖의 우주를 알기는 더더욱 어렵다.

우리는 밖의 우주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저 밖의 우주에 현혹되어 내 안의 우주를 보지 못한다.

옛사람들은 동녘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시온을 노해하고, 하늘의 별을 보며

의식 활동이 반짝이는 지혜를 노래한다.

자연을 통해 도리어 사람의 됨됨이의 길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란 곧 나의 속사람과 겉사람을 일컫는 개념이다.

겉과 속은 둘이 아닌 하나로 거듭니야 한다.

이것이 곧 결혼이고,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룰지라"는 교회의 비밀이다.

 

 

2)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

생명의 씨는 어디로 흘러드는가.

마음 깊은 곳, 에덴의 강 근원에서 흘러나와 겉사람(머리, 가슴, 배 , 다리)에게 흘러들어 가야 한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이고, 남방의 애굽 강에까지 흘러들어 죽은 애굽의 하수를 살려내는 것

그것이 결혼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겉사람이란 지성과 감성과 욕망과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의식의 표층까지 심연의 하늘 빛으로 물드는 것이다.

 

성리학으로 말하면 사단(四端)에서 나오는 인의예지(仁義禮知) 곧 사단(四端)이 지시하는 측은지심(仁)과

수오지심(義)과 사양지심(禮)이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에 흘러들어 원만히 다스리는 다스림이요

이(理)와 기(氣)가 혼융(混融)되어 서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활동하는 무위(無爲)의 도라 하겠다.

반야의 지혜가 오온 곧 색수상행식에 흘러들어 더이상 둘이 아닌 지경이라 하겠다.

이전의 모든 색수상행식은 공(空)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름하여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그 바탕에서 색즉시공이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화하는 것이

성서의 결혼 비밀이다.

 

여기서 먼저 찾아오는 색의 세계는 비록 후에 공으로 드러날지라도 색(色)이 앞서 오게 된다는 말이다.

색이 없고서야 어찌 공이 드러날까?

그런 점에서 색은 곧 공의 바탕이 되는 것이고 색과 공은 짝을 이룬다.

이때 색은 공에게 헬퍼요 공은 색에게 헬퍼가 된다.

인의예지는 희노애락애오욕의 말(馬)에 타지 않고서는 그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향기도 꽃을 통하지 않고 향기를 내보일 수 없다.

 

겉사람(안이비설신의)은 선악과를 따먹는 명수다.

겉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인간 이해다.

그것은 마침내 속사람까지 해치게 한다는 게 에덴의 이야기다.

비록 기쁨의 동산 에덴에 머물지라도 산 존재는 살리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담고 있다.

에덴 이야기는 산 존재와 살리는 존재를 명확히 나눠서 말한다.

 

다시 말하면 속사람으로 겉사람이 통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삶의 과제가

인생 앞에 놓여 있는데 도리어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역으로 속사람이 겉사람에게 점령당하는 과정을 에덴 이야기는 그리고 있다.

하와가 뱀의 소리를 듣게 되고

아담은 아내(겉사람)의 말(욕망)에 굴복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그것으로 에덴 이야기가 마치는 게 아니다.

산  존재라 하더라도, 에덴의 동산 안에 머물지라도 거기서 별 수 없이 선악의 열매를 통해

아담이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정신의 죽음이다.

선악에 경도된 정신의 죽음이다.

 

아담 아파르(흙사람, 먼지 존재)로 빚어진 아담(산 존재, 첫째 부활)이 아파르와의 동일성을 잊은 채

선악으로 밝은 눈을 갖게 되는 순간 두 번째 사망을 경험한다.

가나안에 입성해서 자기 이름의 땅을 분배받아 비로소 첫 번째 부활과 산 존재가 되어서 자기 삶을 시작한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바벨론의 포로를 경험케 되는 게 두 번째 사망이다.

인생이 그러하다.

직립보행이 시작되고, 그 의식이 타자 종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호흡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지만, 한 번은 제 꾀에 스스로 넘어지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제 꾀란 스스로 얻은 영적 지식과 깨달음이 선과 악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고 

타인을 심판하고 지긍심ㅇ 취해 비틀거리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에덴의 선악 이야기는 뼈다귀만 앙상한 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인생을 상징한다.

 

겉과 속이 속과 겉이 서로 순환하며 주인의 자리를 번갈아 차지하는 것이다.

시이소 게임을 하듯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결혼의 비밀을 터득해 가는 과정이다.

마지막 아담이란 살리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 스룹바벨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되는 것,

둘째 부활에 동참하는 이야기가 에덴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경은 여러 이야기와 여러 모양으로 반복하여

긴 순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결혼의 비밀도 결국 이 순례의 여정인 셈이다. 

 

 

3)부모를 떠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창 2: 24)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이 결혼의 비밀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베드로의 드라마는 아주 좋은 예가 되겠다.

 

예수는 남자요 베드로는 여자인 셈이다.

육체의 성으로는 둘 다 남성이지만, 정신의 젠더(gender)로는 예수가 남성성이고 베드로는 여성성이다.

요한복음 16장에 떠나려는 예수를 보며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는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바울도 자신을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의 고통"을 해산으로 표현한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 19- 22)

 

제자들은 '각자의 자아(에고)'를 가지고 예수에게로 온다. 에고를 가지고 예수에게로 온다.

에고를 갖고 예수를 좇는다.

그들 에고는 물론 세상의 에고보다 어쩌면 좀 더 차별화된 고상한 에고일지는 모른다.

적어도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던지 스스로에게는 예수를 좇는다는 종교적 대의가 있는 에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목숨을 주고도 바꾸지 않는 대의명분이다.

 

예수를 좇는 모습을 보라. 그들 속에 무엇이 흘러  들어가는가.

예수를 통해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주옥같은 산상수훈이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진귀한 일들이고 

광야의 오병이어의 표적이고 다락방 강화와 같은 놀라운 설교가 아닌가.

하늘의 기운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타고 끊임없이 그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때가 되니 베드로의 자아(에고)가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

그의 의식이 새로운 양식을 먹는다.그러면서 그 정신이 살아난다. 그러나 비록 산 존재(산 혼)는 되었으나

아직 살리는 존재는 아니다.

예수와 동고동락한다.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을 들으며 따랐다.

듣기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도망하는 중에도

"영생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뉘게로 가겠느냐"고 호언하며 예수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산 존재였다. 의식이 예수로 일깨워지고 또 일깨워진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서 선악과는 과연 무엇일까.

제자들에겐 예수가 곧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인 셈이다.

예수만이 선이고 삶의 명분이고 구원의 길이었다.

예수만이 그들의 왕이고 삶의 의미고 몸을 불살라서라도 내줄 수 있는 헌신과 충성의 유일한 근거였다.

예수 외에는 악이니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선악의 나무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선악과가 된다.

 

그러므로 선악과와 생명과는 같은 것이다. 다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둘로 나뉠 따름이다.

따라서 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다는 표현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다.

지식으로 바라보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로 보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거기 있는 것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요 과실로 나타난다. 

 

예수의 권세 있는 교훈과 그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위엄, 권위는

제자들이 그를 따르게 하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제자들, 그를 따르는 이들의 욕심의 투영이다.

노상에서 "누가 더 크냐? 논쟁한 것은 생명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식의 나무에서 그 같은 것이 나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의 세계만 넓혔다는 얘기고, 끊임없이 욕망의 계산기를 두드렸다는 증거다.

누가 더 큰 자인지 서로 먼저 인증을 받으려고 다투고 있다.

생명의 세계에는 그 같은 것이 없다.

 

제자들은 처음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형성된 자아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면서 또 다른 에고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자아(ego)는 여전히 자아일 따름이다.

겹겹으로 싸여 있어서 처음의 자아를 버린 것이 자아를 넘어선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를 좇으면서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대신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의 또다른 자아가 예수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고 있는 셈이다.

즉, 세상 임금 곧 가이사의 자리에 가이사 대신 예수를 앉히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곧 죄요, 선악을 알게 하는 자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행위다.

그러나 이 또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여기에 여자의 방황이 있고 인생의 혼돈이 있다.

베드로의 오해가 있고 오늘 우리들의 혼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여자(제자들)와 하나가 되기 위해 왕의 자리를 떠난다.

본래 남자의 씨알을 살려내기 위해 잘못 형성된 그 남자(율법)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거세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형성된 가이사의 자리에 서 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광야의 장대에 뱀을 높이 매달아 버린다.

 

누구든지 광야에 매달린 뱀을 보는 순간 살아나는 원리를 예로 들어보자.

나의 욕심이 곧 뱀이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고, 죽어야 할 죄악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생들은 여전히 보지 못한다.

십자가에는 기독교의 교리로 화려하게 채색된 예수, 그대들의 교리적 구세주만 달려 있다.

그대(그대의 자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황금 예수가 황금 십자가에 그대들의 임금이라는 표식으로만 달려있다.

이 얼마나 희극이란 말이냐.

지독한 에고의 죽음을 선포하는 십자가의 도가 종교화되어

구원받았다는 관념 속 구원을 위한 황금 십자가로 변모했고,

배타적인 정신세계의 필수 인테리어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통탄한 일이 아닌가.

자신의 죄를 매달아 높은 장대에 세운 것은 보지 않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라는 교리만 달랑 남아 있다.

그 같은 교리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 교회는 가르친다.

 

아담은 의도하는 자(멜론토스   롬 5: 14 참조)의 표상이다.

여기서 의도란 도덕경의 유위(有爲)와 상응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의도한다.

욕망을 좇아 끊임없이 욕망이 실현을 의도하고, 율법의 실천을 통해 자아 실현을 의도한다.

율법은 남편이고 남자다. 이의 실현을 통해 자아를 구현하려는 이는 여성이요 아내다.

겉사람은 끊임없이 이를 의도한다.

처음 사람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율법을 남편으로 삼고 자신도 율법적 남편이 된다.

율법의 남편이 죽지 않으면 두 번째 아담이 오지 않는다.

첫 아담이 죽지 않으면 마지막 아담이 오지 않는다. 누구든지 마지막 아담 안에서 모두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세상 임금 아담(예수)이 죽고 나서야 새로운 아담(그리스도)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다.

예수 아담으로 인해 베드로는 죽은 자가 된다.

오로지 예수만이 선이고 기쁨이고 구원자고 우리를 인도하는 임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는 바로

그가 신봉하는 예수로 인해 눈이 감겨 있다는 뜻이다.

예수에 눈 멀고 예수의 식민지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눈멀어 있는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즉 베드로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베드로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베드로의 예수란 베드로가 신봉하고 믿고 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는 베드로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두 번째 예수며 그리스도다.

이때의 베드로가 여자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자궁이고 처소고 성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는 베드로를 돕는 헬퍼다.

동시에 베드로 또한 예수이 돕는 베필이다.

첫 사람 아담을 죽도록 돕는 배필이며, 마침내 두 번째 아담의 정신을 배태하고 출산시키므로 돕는 배필이다.

하늘의 얼을 받아서 싹을 내고 꽃을 피워내는 존재이기에 돕는 배필이다.

예수의 정신은 그의 제자들에게서 비로소 세워진다.

산고를 겪게 되지만 마침내 그의 제자들에게서 예수의 정신은 부활한다.

아담은 돕는 배필을 향하여 처음 자아(에고)의 뼈를 세운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그런 여러 가지 여정이 있고 나서야 셋을 낳지 않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여기서 예수는 배드로에게 남편이자, 다른 한편 부모라는 점이다.

예수가 남편일 때는 여자요, 부모일 때는 남자를 향하게 된다.

부모로부터 떠날 때 베드로는 비로소 남자가 된다.

의식은 자립하게 되고 '씨알의 사람'이 된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가 되는 비결도 부모를 떠나면서부터다.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에게 "여자들은 생명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마리아가 우리를 떠나가게 만들자."라고 말했다.

예수가 "마리아가 남자가 되도록 나 자신이 마리아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도 너희 남자들을 닮은 살아 있는 영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여자는 모두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도마복음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