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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작과 지킴

 '로고스와 뮈토스'

                               김창호 지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 15)

 

경작과 지킴( to cultivate and keep it)

이 두 개념은 성서 전체를 관통한다.

'아바드'는 '일하다, 섬기다, 노동하다, 봉사하다, 일시키다, 경작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샤마드'는 'Keep'의 의미를 갖는다. 동산이 훼손되거나 훼파되지 않도록 파수꾼이 성문을 지키듯, 지키라는 의미다.

언제든 여우가 포도밭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에 경도된 이데올로기가 동산에 들어와 무화과나무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자가 되려는 우두머리 욕망이 동산에 침투해 언제든 황무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동산 지기란 집맡은 청지기와 같다. 누구나 공평하게 땅을 분양받았다.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 할 책무는 누구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자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의 세계를 넓혀가고(기경하고) 그곳에 허브향이 넘치는 각종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자라게 하도록 차별 없이 땅이 주어졌다.

 

 비록 한 뼘 땅이지만  우주의 천변만화가 있고 만물이 깃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와있는 땅이지만 그곳을 타자가 경작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영토에 타자가 등기를 해놓고 권리를 주장하려 한다.

즉, 내 마음을 타자가 원격조정하려 하며 리모콘으로 컨트롤 하고 있다.

하여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밭에서는 뇌물을 생산하게 된다.

타자는 당근과 채찍으로 나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지배하려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도리어 더욱 기승을 부리며 가산을 노략질해간다.

이것이 인생의 마음을 둘러싸고 주변에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전쟁이야기다.

 

아브람의 이야기에서도 가나안의 다섯 왕이 아브람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가고 영토 전쟁와 더불어

재산 쟁탈 전쟁을 치룬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과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와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창 14: 8- 9)

이제는 다시 되돌려 받아야 한다. 다시 양도받으려면, 등기 권리증을 이전하려면 타자를 과감히 내보내야 한다.

빼앗긴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

거기서 삶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경천동지하며 다시 설정된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마 5: 5)는 말씀처럼 '아담 아파르'에게 다시 재분양한다.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땅을 양도받아 다시 등기 이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는 땅을 기경하고 경작한다는 게 무얼 말하는지 알게 해준다.

동산은 마음 땅이고 네 개의 강은 땅을 적시는 물을 공급한다.

씨가 뿌려지고 돌과 가시를 걷어내고 옥토가 되게 하며 이곳에서 결실하게 하는 것,

경작하고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준다.

이를 위해 하아담(그처름 사람)은 동산에 머문다.

옛사람들은 존재에 눈떠서 새롭게 그 의식의 세계를 성숙시켜가고자 하는 인생의 이야기를 그렇게 그리고 있다.

 

경작한다는 의미의 '아바드'는 '섬기다, 봉사하다, 노동하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따라서 일하고 섬기고 봉사한다는 것의 참뜻은 모두 마음 땅을 기경하고 그곳에 씨를 뿌리며 그곳에 식물들이 자라게 하는 것, 그것이 이리며 섬김이며 예배요 경작이다.

재분양받은 땅에 각종 나무가 자라도록 경작자가 되는 것이다.

존재의 채소, 존재의 나무가 자라게 된다. 

 

에덴의 네 강은 에덴 언약이다.

그것은 후에 아브람에게도 같게 나타난다. 즉, 아브람과의 언약이기도 하고 모든 인생을 향한 언약이기도 하다.

채소가 나지 않고 열매 맺는 나무가 없는 그곳에 야웨의 비가 내려야 비로소 기경이 가능하다.

동시에 경작할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마음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밭은 기경된다.

경작할 사람이란 '아담 아파르' 곧 나는 가장 작은 자요, 재와 티끌이라는 인식이 찾아와야 그로 인해 비로소 밭을 기경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에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같은 자각이 찾아와야 비로소 동산지기가 된다는 게 에덴 이야기의 서두였다.

 

그런데 그 같은 인식이 한 켠에 찾아오더라도

여전히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은 이전 약육강식의 방식에 의해 정착된 땅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 원주민이 있고 선주민이 있다.

원주민은 타자가 뿌려놓은 씨로 인해 형성된 의식이고 삶의 방식들이다.

선주민의 삶의 시스템은 쟁투다. 다툼과 갈등을 토대로 삶이 운영된다.

 

욕망의 충족을 기본으로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은 각자가 기준이기 때문에 언제나 상반되고 갈등하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항상 수고가 있게 된다.

따라서 동산지기는 에덴의 언약을 따라 모든 곳에 강이 흘러들게 하고 새로운 영토로 기경해 가는 게 인생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땅에 강이 흘러들어 각종 열매 맺는 나무의 실과들이 주렁주렁 맺히도록 농군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마음의 땅에 생명의 씨를 뿌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맺히도록 각자 인생의 과제가 부과된 셈이다.

그리고 그 땅의 소산물을 먹거리로 삼으라는 게 에덴 언약이다.

 

다시 말하면 하아담은 자기 자신의 에덴동산을 기경하고 다시 그 땅에 각종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맺히도록 지키는

동산지기가 되게 했다는 점이다.

즉, 에덴의 네 강이 흐르게 하고 (야웨 엘로힘의 비가 내리게 하고) 경작할 사람 곧 '아담 아파르'를 그곳에 세웠다.

여기서부터 인생은 타인에 의해서 지배당했던 마음의 세계에, 비로소 스스로 주인이 되며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의 땅을 경작하고 각종 나무가 자라게 해서 열매 맺게 하는 동산 지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가 기경하고 지켜야 할 곳, 동시에 그가 머무는 집은 어디일까.

'레네페쉬 하야(향하여 있는 산 혼)'가 머무는 땅은, 속사람이 머무는 동산은 새로 빚은 마음의 땅을 일컫는다는 말이겠다.

하아담은 어디에 머무는 걸까. 성서의 다른 곳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겔 36: 8- 9)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겔 36: 34- 35)

 

성서에서 기경한다는 것은 사람을 갈고 심는다는 얘기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사람을 기경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갈고 또 심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곳에는 이미 강이 흐르고 그 강은 네 개의 강 근원이 되어 사방으로 흐른다는 것이 에덴의 이야기다.

이는 새로 태어난 사람의 내면에 흐르는 생명의 구조를 가리키며,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음을 일컫는다.

우리 내면의 마음 땅에는 이미 만물이 그렇게 배치되었다.

 

하늘과 땅의 낳고 낳음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땅이 새로 낳고 나면, 즉 그 땅이 새로 태어나면

그곳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며,

땅에는 네 개의 강이 흐른다.

마음 땅에 각종 채소가 나고 열매가 맺을 수 있도록 경작하고 지켜가는

새로운 농부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농부는 생명의 지룃대로 동산을 경작하고 또 지켜야 하는 새 계명이 주어진다.

 

에덴의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여전히 동산 중앙에는 두 개의 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