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 지음.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 15)
야웨 하나님이 동방(옛적부터)의 에덴에 동산을 세우고 그가 빚은 그 사람을 그곳에 살게 하셨다.
그리고 야웨 하나님이 그 땅에(하아다마)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나무가 나게 하셨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의 좋고 나쁨의 지식나무가 있었다.(창 2: 8- 9)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흔히 이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들은 에덴동산을 시공간적 의미로 읽게 된다.
창조의 어느 시점 특정한 어느 공간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였고 거기서 최초의 사람이 머물게 되었다는
신의 창조 신화로 읽는다는 말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읽는 사람들에 의해 에덴동산의 고고학적 위치는 어디일까를 추론하는 이들도 다수 등장한다.
물론 이야기가 구성될 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연환경의 특정한 모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에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은 그러한 시공간적으로 특정된 물리적 공간일까?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지 않고 역사적 팩트로 읽는 방식을 따른다면 이는 신성모독이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위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 없는 소치라고 치도곤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에덴의 이야기를 그렇게 물리적인 세계를창조하고
물리적 인간을 창조하는 창업 과정에 대한 창조주의 이력서로만 읽는다면,
그것은 단지 창조주의 엄위하심을 경배해야 한다는 당위성 외에
에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그럴 때 이야기를 통해 전승하려는 옛사람들의 숭고함을 읽어낼 수 있다.
에덴동산은 '레네페쉬 하야(into living soul)'가 살게 되는 터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레네페쉬 하야'란 그 코에 생명의 숨결 곧 신적 숨결인 '네샤마'가 불어 넣고 신적 의식으로
숨쉬게 된 존재를 일컫는다.
신적 의식으로 숨을 쉬는 존재를 성서는 비로소 '사람' 곧 아담이라고 자칭한다는 게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에 대한 문법이다.
그가 곧 '레네페쉬 하야'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아다마 곧 황무지와 같은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아담 아파르(먼지 사람)라는 존재 인식에 머무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는 점이다.
이때에 비로소 그에게 주어지는 마음의 동산이 있는데, 그 마음의 동산이 에덴동산이라는 말이다.
기쁨 안에 있는 동산 혹은 기쁨 속에 있는 정원(garden)이다.
안개만 가득하던 땅에 야웨의 비가 비로소 내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아다마(황무지와 같은 마음)'로부터 '아담 아파르'가 나왔고 아담 아파르에게 생명의 숨결이 불어 넣어졌으니 비로소 하아다마(ground)를 경작할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아담 아파르가 동산지기가 되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하아다마로부터(out of the ground)
각종 나무가 나게 하신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함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옛사람들이 파악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고, 신에 대한 이해방식이다.
과연 그렇게 읽어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좀 더 살펴보자.
에덴동산은 '미케뎀' 즉, 해 돋는 데서부터 세워졌다.
미케뎀이란, '해 돋는 데서부터, 동방, 동쪽에서부터'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오래된' 혹은 '옛적부터'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레네페쉬 하야'인 처음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의 동산지기기도 하고, 동산을 경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 아담이 머물게 되는 에덴동산은 곧 아담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에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동산 안에는 아담 아파르(dust Adam)가 있고 동시에 하아다마(the ground)가 있다.
이 또한 인간의 마음의 상태요, 실존 아닌가?
솔로몬의 아가서에 동산에 대한 묘사를 보자.
아가서란 솔로몬의 노래 중 노래(song of song)라는 의미다.
남녀의 사랑을 비유로 영성을 노래하고 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황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아 4: 12- 16)
여기서 동산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비유다.
즉 동산은 시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우물도 마찬가지다. 샘도 마찬가지다.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오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
모두 신부의 아름다운 여러 속성들을 표현하고 있는 문학적 메타포다.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산의 각종 나무도 마찬가지다.
'아담 아파르'는 비로소 지성소를 향해 서 있고
그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지킴이라고 하는 점이다.
즉, 동산지기란 지성소를 향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그곳에서 자라는 각종 나무들,
예컨대 섥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을 식재료로 삼는 삶을 의미한다.
북풍과 남풍은 고난이 아니라 도리어 동산에 가득한 향기를 날리게 하는 거룩한 바람이 된다.
동산에 부는 서늘한 바람은 따라서 거룩한 바람이다.
성전을 예로 들면,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되어 있고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도 하려니와 그 성전을 맡은 자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머무는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우리가 더렵혀서는 안 되는 우리 자신이다.
이는 곧 '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땅은 자기 자신이고 그를 경작할 사람 또한 자기 자신이다.
거기서 지성소에 머무는 하나님이란 지극(至極)한 마음의 상태,
즉 동양의 언어로하면 무극의 상태에 있는 순수 창조 에너지를 가리킨다.
성서의 언어로는 신성이요 하나님이라 하겠다.
편견이 없고 사심이 없는 순수 존재의 상태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생명의 세계를 일컬어
하나님, 혹은 엘로힘과 얼의 세계라 옛사람들은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곳이 '동방으로(미케뎀)'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곳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에덴 이야기에서 '동방'이란 빛이 비추는 곳, 지성소를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흩어져 있는 히브리인들이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는데,
이스라엘에서 지형적으로 동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일 터이나 종교적(영적) 의미의 동쪽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시온의 영광이 비춰오는 곳이 그들에게는 동쪽이다.
따라서 동방의 에덴동산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자라는 각종 나무들 역시 물리적 나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인간의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다.
미케뎀(동방으로부터) 이라는 말은 성소가 지성소를 향하여 있듯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늘 지성소를 향하여 있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이란 그 마음이 지성소의 법궤를 향하여서 있는 마음의 지극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하겠다.
이를 일컬어 에덴동산이라 한다.
즉 '해뜨는 곳으로부터' 동산을 창설했다는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에 대한 이해요 해석이다.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좋음과 나쁨의 지식나무가 있다.
이는 지성소로 상징된다.
동산의 각종 나무는 결국 성소에 배치되어 있는 만물을 의미한다.
생명 나무와 지식나무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명나무 이기도 하고 지식나무이기도 하다.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어떤 이는 지식이고 추상적인 관념으로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를 생명으로 취할 뿐이다.
하여 이야기 속에서는 두 나무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하나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다만 생명 나무가 휘장(타자로부터 주입된 도그마가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결합해서 형성된 철옹성과 같은 선입관)으로
가려져 있어 지성소의 생명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생명 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으니 단지 캄캄함이며 어두움이다.
그에게 생명 나무는 생명 나무가 아니라 지식으로만 헤아리는 선악의 나무가 될 뿐이다.
따라서 언제나 선악의 나무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명 나무는 비밀로 남아있다.
선과 악을 나누며 시시비비를 따져 서슬푸른 심판의 칼을 휘두르고 있지만,
사실은 생명의 나무가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고 하는 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뚜렷한 관점이 있다.
마음의 세계를 작동하는 뚜렷한 두 개의 알키메디안 포인트 곧 지렛점이 있다.
생명의 관점인가 옳고 그름 곧 선악의 관점인가.
에덴 이야기에서 진단하는 인간 이해다.
자기 자신이든 타인을 향해서든 언제나 이같은 두개의 관점이 작용한다.
함께 맷돌을 갈고 있지만 한 사람은 하늘에 있고 한 사람은 땅에 있다.
비록 몸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서로 같은 말을 주고받건만 그 의식이 한 사람은 하늘에서 구만리 장천을 날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앞서 찾아온 지식을 근거로 땅에 배를 깔고 선악의 심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심판은 언제나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고 하는 사망의 칼이다.
따라서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인다.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도 해한다.
선악은 언제나 사망을 낳는다.
따라서 하아다마로부터 아담 아파르가 되었다는 것은 '나는 티끌과 재와 다를 바 없다'는 고백이고
그 같은 터에서 시작되는 삶의 그림이다.
이후 머물게 되는 마음의 상태와 펼쳐지게 되는 내면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 아야기라고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