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 지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 7)
야웨 하나님이 그 아다마로부터(민 하아다마) 아담 아파르(티끌 사람)를 빚었고
그 코에 산 숨(니스마트 하임)을 호흡하였고 그 아담은 산 혼을 향하게 되었다.( into a living soul )
성서에서 가장 아름답고 극적인 문장을 택하라고 하면 이 문장이 아닐까?
첫 단어는 조성하다는 뜻의 '야차르'다.
이는 바라의 아사와 함께 톨도트를 이뤄가는 세 번째 동사다.
'바라'가 낳음이라면, 낳음은 '아사'와 '야차르'에서 더욱 성숙되고 새로 낳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태어난 아이가 날로 자라며 부모에게 양육을 받는데, 이러한 양육이 '아사(make)'라 하겠다.
그리고 누구나 부모로부터 정신의 독립을 외치는 사춘기가 도래한다.
사춘기의 도래는 질풍노도와 함께 정신의 대변혁기이기도 한데,
이는 '야차르'에 비유된다. 야차르는 form(조성되다, 형성되다)
지금까지 쉬던 숨을 멈추고 새로운 숨을 쉬게 된다.
생기가 그 코에 불어 넣어지니 획기적인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다.
그 정신이 '비로소 사람'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비로소 사람은 처음 사람(The fist Adam)이다.
그런 점에서 계보의 첫 일성이 바라라면, 바라는 아사로 나아가며, 아사는 야차르를 통해 완성되어 간다.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는 톨도트에 포섭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사와 야차르는 바라에 포섭되는 개념들이기도 하다.
톨도트 > 바라 > 아사 > 야차르 라고 볼 수 있겠다.
계보(톨도트)는 낳음과 양육과 분리독립을 통해 진행된다.
예컨데 아이를 잉태하여 태어나면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성서의 '바라'는 낳다의 개념이다. '낳음(born)'은 곧 창조(create)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는 젖을 물리며 양육한다. 사람의 꼴을 갖춰가도록 끊임없이 돌보며 무한 애정으로 아이를 어렵게 양육한다. 이를 '아사'(made)라 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사람이지만 더욱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본다. 창조의 연속성이다. 낳음의 연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양육도 낳음에 포괄된다는 말이다.
양육 또한 행위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춘기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품으로부터 의식이 독립하려고 몸부림친다.
몸의 변화와 동시에 정신의 변혁기에 이르러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된다.
이것 역시 창조에 속하며 낳음에 속한다.
이때의 동사가 이를테면 히브리어로는 '야차르(form)'요, 조성됨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아사와 야차르도 바라에 포괄된다는 말이다.
양육 또한 창조 행위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춘기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품으로부터 의식이 독립하려고 몸부림친다.
몸의 변화와 동시에 정신의 변혁기에 이르러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된다.
이것 역시 창조에 속하며 낳음에 속한다. 이때의 동사가 이를테면 히브리어로는 '야차르(form)'요,
조성됨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아사와 야차르도 바라에 포괄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압축하면 바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누어 말하면 바라, 아사, 야차르로 세분할 수 있다.
사춘기를 거쳐 몸과 정신이 독립하고 마침내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부모의 창조 사역은 마무리된다.
더이상 관여나 간섭이나 돌봄이 필요 없게 된다.
육체의 세계에도 그러하듯 정신의 세계, 의식의 세계에도 그와 같은 끝없는 새로 태어남을 통해 온전한
한 사람을 이룬다. 여기까지는 처음 사람이다.
처음 사람은 그 정신이 독립하여 비로소 자가 호흡을 한다. 자가 호습을 하며 성인으로 성숙해간다.
마침내는 마지막 사람, 생명을 주는 아담으로 거듭 태어난다.
생명의 게보란, 바로 그 정신이 독립하게 되고 마침내 살리는 영으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의 계보를 말한다.
야곱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를 조성하신 하나님(사 47: 28)에서 알 수 있듯
야곱은 바라에 속하고 이스라엘은 야차르에 속한다.
야곱아 너를 창조(바라)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야차르)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
물론 이스라엘에 바라를 사용하는 경우도 다수 나온다.
어떤 개념이 하나로 고착될 수는 없다.
야차르는 바라에 포섭되기에 바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시편 104편 30절은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시인의 인용이요, 노래다.
거기서는 '야차르'가 아니라 '바라'를 사용한다,
야웨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창조(바라)를 진행한다.
야다마의 표면(지면)을 새롭게 하는 장면이다.
야차르가 아닌 바라를 사용하는 것은 야차르가 바라를 수행하는 과정이요,
바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목수가 집을 짓는다"는 표현 속에는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하고, 나무와 나무를 서로 이어 붙이고 건축하는
모든 동작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 30)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하아다마)
성서의 오역이 이 부분처럼 치명적인 곳도 흔치 않다,
에덴의 신화적 이야기를 더욱 신화 속으로 함몰시킨 것이 이 문구의 오역이다.
이 부분을 대개 역서들이 오역하고 있지만, 그 중 NASB 가 가장 원문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여긴다.
man of dust from the ground - NASB
man of dust of the ground - KJV
한글 번역서들은 하나같이 "땅(ground)의 흙(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다.
둘 다 오역이다. man of dust (하아담 아파르)에서 아담과 아파르는 동격이다.
여기서 of 는 동격의 of 로 보아야 한다.
민 하아다마에서 '민'은 from 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다.
민 하아다마는 '그 아다마로부터( from the ground)다.
따라서 그 의미는 '그 아다마로부터 아담 아파르를 조성(야차르)하고"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하아다마(the ground)나 아파르(dust)가 사람을 만드는 재료가 아니라는 의미다.
서구신학의 오류는 여기서도 결정적이다. 즉, 서구신학의 오류는 텍스트 해석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에덴 이야기의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텍스트 해석의 오류에서 신관과 인간관이 철저히 왜곡된다.
이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야웨 하나님이 황무지(the ground)와 같은 마음을 먼지나 티끌(dust)
곧 고운 흙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로 조성했다'는 뜻이다.
'아파르'는 단지 흙이 아니라, 그 마음이 강퍅한 동물의 형상(the ground)에서
그것이 결국 인생을 사는 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아파르) 실존 인식의 찾아옴을 의미한다.
성공을 추구하고 더 많은 힘을 배양하려는 모든 애씀이 약육강식의 동물적 속성을 확장하려는 몸짓에 불과하다는 인식,
즉 하아다마는 덧없음이라는 자기부정이다.
이를 '아파르'라 하고 비로소 '아담(사라)'이라 칭한다. 즉,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아담과 아파르는 동격이다.
민(from) 하아다마(the ground), 그 황무지와 같은 것으로부터 아담 아파르가 조성되는 것이다.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 보면 아담 아파르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 27)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 6)
티끌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 인식과 함께 '비로소 사람'이 새로 태어난다.
이를 에덴 이야기에서는 '아담 아파르'라 한다.
이것을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번역하게 되니 신화적 이야기를 그냥 신화 속으로 몰아넣고 만다.
여기서 존재와 무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서양철학의 본질적 주제인 있음과 있지 않음의 원형이 에덴 이야기의 벽두에 나오는 '아담 아파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존재자의 유무를 논하거나 현상계 배후 세계의 유무를 논하는 것은 끝없는 논쟁을 유발할 뿐 큰 의미 없다고 여긴다.
서양철학의 대부분 형이상학이 원인 무효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중세는 현상계 배후 세계로 신의 존재가 실체요 주체였다.
그러나 창세기 야웨 엘로힘은 현상게 배후에서 인간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야웨는 배후 존재로 있는 엘로힘이 아니라 나는 나( I am)로 인식되는 곳에 내재하고 있는 신성성과 얼인 엘로힘이다.
신약의 방식으로 말하면 성전 안에, 지성소에서 인간과 하나로 머무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존재가 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파르에서 비로소 아담이 긍정된다는 에덴에서의 아담 아파르 이야기가
그 원형이다. 무는 존재의 중심에 마치 벌레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서양철학은 이 주변에서의 산책이다.
이 원형적 이야기에서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서 논하거나 혹은 좀 더 가까이에서 산책아는 것 차이 정도다.
그러므로 무는 실존적 무다. 실존적 무의 체험에서만 존재(있음)의 긍정이 시작된다.
즉 정신의 세계에서 각 개인에게 실존적인 동물의 형상이 무(혹은 공)로 드러나, 그것의 허무가 철저히 드러나고 체험되며
부정되는 곳에서 현존재인 '사람의 형상(있음 I am)' 긍정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아담 아파르'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과 상통한다.
색즉시공은 이론으로 논해질 바가 아니다.
조견오온개공에 대한 히브리인의 통찰력이 '민 하아다마 아담 아파르'다. 거기서 '야차르'는 조견에 상응한다.
에덴 이야기는 이를 '바라'라 하고 땅이 땅을 낳는다고 전승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모세에 의해 에덴 이야기로 편집된다.
하아다마에서 아담 아파르를 낳고 조성하는 것이 곧 땅이 땅을 낳는 것으로 이야기 된다.
여기서 하늘 이야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천지창조의 계보요, 지천의 창조되던 날이라면서 땅의 이야기가 지속되고 있다.
땅이 거듭 태어나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황무지가 진토되어 아파르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하늘의 낳고 낳음은 어디로 간걸까?
하늘은 이야기 속에 깊이 숨어 있다.
에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늘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을까?
어느 땅에 속하느냐에 따라 하늘도 달라진다.
땅이 거듭 태어나면 하늘도 새로 태어난다.
애굽에 있으면 애굽 하늘을 이고 산다.
애굽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
광야에 하늘도 어느덧 광야의 하늘이다.
가나안에 있으면 하늘도 가나안 하늘이다.
바빌론에 잡혀가면 하늘도 바빌론 하늘 아래 있게 된다.
하여 천지의 계보는 지천의 계보와 동의어가 된다.
땅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도 다시 태어난다는 걸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