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님 지음-
여기서 잠시 신화는 언제나 그 주인공이 신이고 주어가 신으로 서술되고 있다.
영웅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영웅을 신격화해 놓고 영웅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왜일까? 옛사람들은 왜 이야기의 주체로 엘로힘 혹은 야웨 엘로힘으로 이야기를 구성할까?
그같은 신화에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이야기의 주어와 나와는 무슨 상관일까?
He is I and I am He
여기서 He는 누구인가? 대개 He를 3인칭 타자 곧 그 사람을 일컫는 게 일반적인 어법이다.
그럴 때 He는 내가 될 수 없다.
각각 서로 다른 개체이기에 He Equal I 의 성립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 문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반면에 TV 화면에 나온 저 사람, 사진 속의 그(He)가 곧 나(I) 라고 하면 성립이 가능한 문장이다.
이때 사진 속의 그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He 와 I 는 동일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때의 동일성은 사진 이미지의 동일성일 뿐이다.
Who is he? 각자 마음속에 존재하는 지극(至極)한 형태의 그는 누구인가?
이때 '그'는 3인칭이다.
이 지극한 존재로 있는 그가 누구일까?
질문의 대상으로 있을 때 그는 곧 3인칭 He가 된다.
누구인지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HE이기도 하다.
성서는 여기서 지극한 존재로 있는 He를 나를 낳는 자라 하며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라 칭하고
동시에 그(Him)를 데오스(신) 혹은 엘로힘이라 일컫는다.
독자들은 알 수 없는 것에 '데오스'라 이름해 놓고
전지전능의 신으로 상상하며 그 아래 부복한다.
그를 예배하고 숭배한다. 은총을 구하고 은혜를 구한다.
이때 그(HE)는 각자 마음의 궁궐 안에 지극한 존재로 존재하는 그(He)가 아니라,
마을 어귀에 있는 천하대장군의 진화된 형태로 관념이 지어 만들어
하늘 어귀에 세워놓은 그( HE)다.
신이라는 이름, 엘로힘이라는 이름, 지금까지 등장한 각종 좋은 이름을 입혀놓고 인생들을 굴복시키고 있다.
즉, 인생의 욕망이 낳고 키워서 영험하기 이를 데 없는 신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낳고 기른 신은 인생들 위에 군림하며 인생들을 굴종시킨다.
신의 대리인을 자칭하는 광란의 종교지도자들이 있고 상상력을 동원해 더 큰 신으로 물을 주며 키워가고 있다.
이름이 무엇이든 총칭해서 그는 '하늘의 용'이다.
번개와 천둥!
지상으로부터 형성된 고온다습한 공기층과 얼음 알갱이들로 형성되어 있는 차가운 구름이 갑작스럽게 만나면서
구름 아래 음전자를 형성하고 구름 윙 강력한 양전자층을 형성한다.
갑작스런 대류의 흐름 속에서 음전자와 양전자가 서로를 향해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격발하고 구름 속에서 강력한 전기충격을 일으키며 열을 발생시킨다.
강력한 전기충격은 빛과 소리의 현상을 빚어내며 뇌성벽력을 일으킨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층과 얼음 알갱이의 차가운 공기층이 부딪치면서 음전자와 양전자층을 형성하고 양전자와 음전자가 만나면서 질소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천둥과 번개는 모든 생명의 단백질 원천을 만들어내는 질소 공장인 셈이다.
땅에서는 공기 중의 질소를 흡착해 질소비료를 만들어내는 뿌리혹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이 있는가 하면
하늘에서는 천둥과 번개가 온 대지에 천연비료를 만들어 빗물과 함께 흩뿌려줘 초목이 왕성하게 자라게 한다.
생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된다.
의식의 세계도 이와 같다.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은 무엇일까?
끓어오르는 욕망과 생존의 욕구를 기반으로 형성된 열정의 기류가 고온다습한 공기층이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를 바탕으로 의식의 세계가 형성되고 활동한다.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안개라 하겠다.
아인, 그게 아니라는, 얼음 알갱이처럼 차갑고냉정한 기운의 기류가 위로부터 불어온다.
두 개의 기류가 부딪히면서 천둥과 번개가 발생한다.
아니 번개와 천둥이 몰아친다. 빛과 소리의 속도 차이로 번개 후 천둥이 이어서 들려온다.
두 개의 기류가 부딪히면서 천둥과 번개가 발생한다. 아니 번개와 천둥이 몰아친다.
빛과 소리의 속도 차이로 번개 후 천둥이 이어서 들려온다.
의식의 세계 역시 인식의 빛이 먼저고 소리는 뒤따라 오게 마련이다.
에덴 이야기에서 '하아담 아파르'(흙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와 상응한다.
번개와 천둥소리를 통해 시작된 의식의 새로운 싹틔움이 비로소 직립의식의 시작이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의식의 싹틈,
타자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고 스스로 직립의 시작이어서 성서는 이를 면류관이라 칭한다.
쌍떡잎으로 피어나는 지혜와 총명이 생명의 면류관이다.
서구의 지성 헤겔이 지적한 바대로 즉자존재(사물화된 존재)와 대자존재(~을 향하여 있는 존재)
가 서로 소용돌이 속에 강력하게 부딪히고 음전자와 양전자의 팽팽한 대립과 결합 속에서 번개를 일으킨다.
천둥소리를 내게 된다.
그다음으로 지양(止楊 aufheben)한다.
* aufheben - '파벌의식이나 지방색을 지양하시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어떤 말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파벌의식이나 지방색을 없애라 되도록 하지 말아라
하는 듯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지양이란 말은 그처럼 '완전 부정'이나 '부정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지양은 '아우프헤벤'이란 철학용어로서 '위로 올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지양은 이처럼 대립과 모순을 다시 한층 높은 명제로 조화, 통일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전 것에서 순간 멈추게 되고 새로운 것을 향해 서 있게 된다.
꽃이 지고 열매를 향하는 원리와 같다. 불가의 정혜쌍수 혹은 지관쌍수와 방불한다.
누구나 각각의 '그' 혹은 '나'는 각자의 정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고 동시에 그것은 현재를 중심으로
언제나 있고, 있어 왔으며, 동시에 현재 분사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야웨는 그런 점에서 즉자 대자적이다.
동시에 자기 존재를 향해 서 있는 인생도 언제나 즉자 대자적일 수밖에 없다.
즉자존재(即自存在)란 "그것이 그것인 바 그 것"을 일컫는 말이다.
즉 , 사물존재는 어제도 그것이고, 지금도 그것이고, 지금도 그것이고, 내일도 그것으로 있다.
따라서 즉자존재란 사물 존재와 같은 그런 정신의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에 이어 헤겔이 사용하고 샤르트르가 심화시킨 용어다.
하여 'in inself'라 한다.
인간은 지금까지의 나에 대해서는 다분히 사물 존재처럼 고착시키고
'그런 사람'이라고 사물화(즉자존재)시키는 것에 정신은 결코 고착되지 않는다.
비록 그렇고 그런 사람의 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모든 인생은 그렇고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보다 나은 자신됨을 향하여 서 있다는 말이다.
정신의 특성을 살펴보면 보다 더 자기 자신다운 자신의 본래 존재를 향하여 서 있게 된다는 점에서
대자적이라는 말이다.
정신의 그러한 특성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은 잘 묘사하고 있다.
"호 온(현재분사, 지금 그러함), 지금 존재하고 어제도 존재해왔고 지금 오고 있는" 이미 과거를 품고 있는
어제와 지금까지의 나는 즉자적(an sich 그러한 나 혹은 된 나, 혹은 될 나0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여기 서서 어제를 품고 동시에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어제를 품으면서도 동시에 그를 부정하며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기 때문이다.
내일도 오늘 여기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을 통해 맞이하고 있다.
그것이 생명의 특성이다. 꽃은 꽃봉오리(어제)를 부정하고 열매는 꽃을 부정한다.
부정을 통해 다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부정은 틀리다는 얘기가 아니다.
열매는 꽃을 부정하지만 꽃이 틀려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꽃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찌 열매로 나아갈까. 정신의 성숙은 이같은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부정을 통해 다음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서로 유기적이고 전체적이다.
생명은 늘 그렇게 역동적이다.
거기서 타자 지배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서는 존재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천둥과 번개가 공기 중에서 질소화합물을 만들어내듯, 두 개의 공기층이 강력하게 만나며 먹구름 속에서 번개 치고
천둥소리를 내며 의식은 진화한다. 즉자 대자의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
이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의식의 세계는 절대정신인 얼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지극(至極)한 정신의 사람을 일컬어 얼 사람이라 한다.
마침내 He는 I라는 사실이 관념이거나 도그마가 아니라 현실로 드러난다.
얼(엘 HE)과 나(I)가 둘이 아닌 하나로 창조된다. 그럴 때 HE IS I 와 I AM HE의 노래를 비로소 부르게 된다.
신은 더 이상 우상의 하늘에 머물지 않는다. 3인칭의 이야기는 1인칭의 이야기가 된다.
히브리 사상의 핵심은 He was 와 He will be 라면
헬라 사상의 핵심은 I was요 I am이며 I will be (is coming)다.
성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절묘한 조화의 책이다.
요한복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He is I 와 I am HE 가 성립되는 장면이 모노게네스(독생 혹은 유일한 존재)다.
거기서 신학과 인간학은 접점을 맞이한다. 모노게네스(독생)는 우뢰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