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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 빛의 창조

       '형상과 글' 카페

                     - 창세기 1장 연구 -     김창호님 글

 

 

 

둘째 날 - 빛의 창조

 

빛(하 오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 째 날이니라(창 1: 3- 5)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 6)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빛을 비추기 위한 토대요 바탕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인간의 실존 인식의 바탕이며 그 토대 위에 비로소 존재의 빛은 비출 수 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는 빛의 원리는 신약에서 구체적인 주석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듯 신약의 빛은 로고스에 거한다.

빛이 비추인 곳은 우리 내면 세계이다. 성경은 한결같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경의 독자들이 창세기 1장에만 고착하면 성경 읽기가 왜곡된다.

우주창조의 굳건한 믿음에 시선을 고정한다.

우주창조의 신화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우주의 세계, 그 신비는 예나 지금이나 인생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심어준다.

우주 질서의 오묘함은 인생의 지혜로 쉽게 풀리지 않는다.

고대의 점성술의 발달은 천체의 신비에 심취한 이들에 의해 이룩된다.

 

우주 가운데 충만한 모든 숨쉬는 것들은 우주의 천체 운행 원리에 종속된다.

그만큼 우주 운행원리는 인간의 생존에 관한 절대조건이다.

그러므로 창조자를 생각할 때 우주창조의 주체자로 신을 상정하는 것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는 우주 신비의 세계가 하나의 비유로 등장되고 있을 따름이지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비유는 소우주의 세계, 곧 인간 내면의 영적 탄생과 성숙, 그 인식과 세계의 분화, 홍합, 성숙의 전과정을

7일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히브리문학적 소산이다.

소우주에 대한 히브리적 선견자들의 비밀스런 서책인 셈이다.

요한과 바울도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나타나 있는 빛의 이해, 그리고 등장하는 비유들이 이를 잘 알려준다.

물론 구약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신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빛'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대목은 모두 인간의 내면에 비취는 로고스의 빛을 일컫는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네게 있는 '빛'이라는 말씀들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은 로고스의 좌소가 '아르케'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또한 이 로고스가 하나님을 향하여 (프로스) 계시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이 말씀이라고도 단언한다.

이 때 만물은 인간의 내면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창세기 1장의 내용 전체를 말한다.

이때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이라고 일컫는다.

창세기의 빛과 요한복음의 빛이 서로 다를 리가 없다.

이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바, 창세기 1장 3절을 인용해서 인간의 심전(心田)을 설명하는

고후 4 : 6절이라 하겠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 7) '마음에 비추이는 빛'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 말하는 까닭은 창세기 1장에 대한 수많은 왜곡이 있어 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빛이 있으라'는 이 선언은

깊은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깃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로소 처음 시작됨을 알려주는 새창조의 시작종이다.

수면에 운행하시는 창세기의 표현은 하나님은 곧 로고스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선언과 맞물린다.

 

이 점에서 동양의 할아버지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도 옳지만

서양의 한 철인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한 말도 참으로 옳다.

이 두 언어는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

도를 지식으로 정의라려 한다면 그 정의 속에 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는 로고스 속에서 존재한다.

이 때의 로고스는 결코 노자가 경계하는 지식의 옷에 머무는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빛의 체소는 로고스다. 마음을 일깨우고 그 땅을 경작하는 것은 도가 아니고서는 가능치 않다.

로고스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어를 먹고 산다.

정신은 언어에 깃든 존재의 자극과 충동에 의해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우리의 육체는 남녀의 결합에 의해 자녀를 생산하지만

정신은 로고스에 깃든 사람들의 빛에 의해서만 태어나고 또 계승된다.

언어가 정보의 매개수단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언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다.

로고스는 정신에 하나님의 얼을 배태케 하는 생명의 씨를 담아 전달하는 씨알이다.

정신의 씨알을 전달하는 다른 매개체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 비로소 창조의 나래를 편다.

하나님의 창조는 오늘도 바로 거기서 출발하고 열매 맺는다. 빛의 처소는 곧 로고스다.

흑암의 처소 또한 언어다. 흑암도 그 자신을 언어를 통해서 유포시키고 세계를 점령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뜻은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으로 있는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말씀은 말씀의 창조세계가 있다.

말씀이 빚는 세계, 곧 말씀은 근본 안에 머물고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며 하나님은 곧 말씀이다.

말씀은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창조해 간다.

인생은 말씀으로만 거듭나고 로고스에 의해서 정신이 살아난다.

 

성경은 말씀이 존재의 집임과 동시에 말씀의 창조 세계가 펼쳐지는 위대한 휴머니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인간이 신의 세계에 동참할 때 도달한다.

인간은 신격을 통해서 그 존재의 의미가 완성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 105)고 고백한다.

이 때 일컫는 말씀은 결코 정보전달 언어가 아니다.

침례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요, 빛이 아니다.

빛에 대한 증거는 빛 자체가 아니다. 빛은 빛이 빛이다. 그 빛은 각 사람에게 비췄다.

그 빛은 곧 흑암 가운데 '빛이 있으라'는 것으로, 다시 말하지만 각 사람에게 비추이는 빛이다.

인생들은 여기서도 빛을 그때, 거기 있었던 예수에게 고정시킨다.

그 때 거기 있었던 예수에게 고정시키고 있는 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의 비밀을 알 수 없게 된다.

종교적 예수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밖에 있는 존재다.

그를 일러 빛이라고 하면 그것은 새로운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빛은 인간의 내면, 곧 자기 땅에 오셔서 비추이는 빛을 일컫고 있다.

침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손가락이요, 그 빛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와 있다.

그러나 세상(자기 땅)은 그를 알지 못한다. 이 빛에 대하여 귀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자기 땅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접치 않는 것이다.

인생들의 신격과 비껴가는 엇박자의 삶은 늘 그렇게 되풀이 된다.

인생은 언제나 빛의 싹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

밖에 있는 빛을 영접하려는 것이 모든 종교가 범하는 우요, 우상이 만들어내는 일들이다.

예외 없이 하나님도 예수도 언제부터인가 밖으로 밀려나 있다.

요한은 말하기를 빛은 이미 자기 땅에 와 있다고 한다.

땅은 인생의 마음이다. 마음에 와 계신데 마음과 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혹된 마음의 세계다. 찢어내고 벗어내야 할 마음의 세계다.

속살이 드러나지 않은 표면의 세계다. 이면에 있는 빛을 영접치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있으나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0- 11)

 

제자들이 예수에게 "왕국이 언제 올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가 "왕국은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왕국이 여기 있다 왕국이 저기 있다고 떠벌일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왕국은 땅 위에 널리 퍼져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도마복음 말씀 113) 

 

'빛이 있게 하자'는 창세기의 선언은 비로소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창조의 첫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요한의 말대로 이것은 혈통(하이마토스)으로나 혹은 육정(데레마토스 싸르크)으로나 혹은 사람(아네르, 남자)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창조(바라)라고 한다.

혈통으로, 혹은 싸르크의 의지로 진행되는 것, 남자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인생들의 바벨의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과는 상관이 없는 저마다 인생의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제 날들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인생들의 날이 아닌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은 인생들의 그 날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시작되는 어느 한 날이 비로소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간섭되기 시작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 빛이 있으리로다(슥 14: 7)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 3-5)

 

빛이 있고서부터 하나님의 첫 날은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빛이 비추었다고 해서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겨우 하나님의 첫날이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빛의 태동과 어둠의 분리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는 생명의 싹을 틔워가며 튼튼히 하시려는 창조의 경륜이다.

 

모름지기 빛 가운데만 머무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두움과 빛의 반복 속에서만 생명의 싹은 틔워지고 튼실해져 간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속에서만 건강한 생명은 유지된다.

상대 세계의 한계상황 가운데 던져지는 것은 결코 신의 저주가 아니다.

빛을 비추고 어두움에 처하게 하는 것은 생명을 키워 가는 신의 강보인 셈이다.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빛과 어둠의 일정한 반복 사이클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추어보더라도

빛과 어두움은, 낮과 밤은 서로 상대적이며 동시에 서로를 떠바쳐주는 상호 존재의 기반이다.

 

빛은 어두움 때문에 빛이요 어두움은 빛 때문에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책망 받을 것은 곧 빛으로 나타나고 빛에 머물고만 있으면 곧 그 빛은 곧 어두움이 되고 만다.

생명은 고형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도 지으신 장ㅅ, 어두움도 창조하신 분이다.

빛과 어두움은 서로 극단에 머물면서 한가지로 생명을 키워간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생들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놓여 있따고 하는 실존적 자각이 시작될 때

그것을 토대로 하여 시작된다. 그같은 자각이야말로 처음 발광하는 빛이다.

어둠에 놓여 있다고 하는 절망과 한계.

 

경험 속에 빛의 씨눈은 배태되고 있다.

비로소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게 하자. (Let there be light)'는 선언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게 되는 상대 세계가 열린다.

구분과 경계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면서 인생들을 초극하게 하기 위한 나눔과 분리가 시작된다.

이는 상대 세계로 고착케 함이 아니다. 상대 세계에 머물고 있는 실존을 극복케 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뉨은 분리를 목적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비로소 공중의 권세 잡은 세계와 하늘의 빛의 세계에 대한 나누임과 분별의 눈이 열린다.

이것이 첫째 날 베레쉬트 안에서 하늘의 어두움을 찢고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개천,

곧 하늘이 처음 열리고 있는 시원(始源)이다.

하늘이 열리고 있는 천둥소리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7)

 

 

하나님의 둘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 1: 6-7)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남다와 여자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신체적 성의 구분은 있어도 정신적 성의 구분은 아직 분화되지 않는다. 다만 어린아이일 따름이다.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이성에 눈뜰 때부터 남 녀의 심리적 구분은 이루어진다.

이성에 눈뜬다는 것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빛이 아이들에게 비쳤다는 말이며

2차 성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성에 눈뜨면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같은 분리 징후는,

이같은 나뉨과 구별은 새로운 통일을 위해서다.

새로운 하나됨을 통해 생명을 탄생케 하기 위한 나눔과 구별이지, 서로 영원한 분리를 위한 구별이 아니다.

이성에 눈뜨면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같은 분리의 징후는, 이 같은 나뉨과 구별은 새로운 통일을 위해서다.

새로운 하나됨을 통해 생명을 탄생케 하기 위한 나눔과 구별이지, 서로 영원한 분리를 위한 구별이 아니다.

우리의 영성의 세계는 그같은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처음 하늘이 열리는 때를 다시 짚어 보자. 흑암이 하늘을 덮고 있다.

하늘의 빛을 가리우는 것, 그것은 곧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이 그 빛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 곧 사단이라고도 하는 옛 뱀의 지독한 권세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질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땅은 어두움이 그 깊이를 더해가고, 하늘의 빛을 따라 생명이 숨 쉬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을 따라 어두움을 경배하는 참상이 곧 인간의 실존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세상의 풍조를 이름한다.

 

세상의 풍조!

세상 풍조의 근간과 뿌리는 용이요, 뱀이다.

선악의 세계이며 실체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바람잡는 소리와 소문들.

쓰레기 정보가 참인양 떠돌아다니는 것들이다.

인생은 저마다 그 같은 것에 매몰되어 산다.

무엇이 참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흙을 먹이로, 배를 땅에 깔고 사는 에덴 동산의 뱀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계시록에 용으로 등장한다.

우리들에게 용은 뱀인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중의 주관자로 인식된다.

옛 사람들은 고대 생물 중 공룡을 인생들의 내면활동의 일정 현상에 대해 비유하였던 것 같다.

 

계시록에 특히 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드라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째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 7)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계 16: 13)  

하늘에 도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계 12: 3)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 4)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째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계 12: 7)

큰 용이 내어쫒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쫒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쫒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쫒기니라(계 12: 9)

 

현대인은 수많은 종류의 정신분열과 질환 증세를 겪는다.

정신질환의 주범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정보에서 기인한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생성되는 오염된 정보들, 직장 동료 사이에서 오고가는 각종 형태의 뉴스들,

언론은 바로 그같은 정보를 근간으로 생산과 소비, 소비와 생산의 매체로 존립한다.

인생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소식을 듣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흥분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모든 까닭은 전달된 소식이 무엇이냐에 의해 이루어진다.

삶이라는 것의 저변을 살펴보면 뉴스를 생성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희노애락은 소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언어의 힘이란 가히 핵폭탄보다도 큰 힘을 지닌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소유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함이니

타인에게 좋은 이름으로 칭송을 듣는 것으로 인생은 행복하다.

 

사람이 배만 부르다고 해서 살 수 있는가.

정신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인생은 원시 사회든 문명사회든 그가 속한 곳에서 무수히 많은 뉴스를 생성하고 소비하며 살아간다.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심리전에 이용되는 뉴스를 보노라면 소식이 미치는 힘은 첨단 무기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가공할 힘을 갖는다.

뉴스의 힘은 그것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와 전혀 상관이 없다.

최근 우리는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 사건을 목도하고 있다.

전국 교원노조의 주장과 유족들의 주장, 그리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주장들,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을 이끈 것은 결국 실체적 진실의 여부가 무엇이냐와 상관없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해 당사자들 간에 오고 간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뉴스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뉴스에 살고 뉴스에 죽는다.

우리의 정신은 빵을 먹고살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은 뉴스를 먹고 산다.

 

하늘을 가리우는 흑암의 실체가 무엇인가.

뉴스는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가지는 힘이 있다.

정보적 가치 이상의 힘을 가지고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힘 있는 사람일수록 정보를 독점, 자기 유익의 재료로 삼는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움의 세계는 곧 정보가 주름잡고 있는 세계다.

정보는 과연 가치 중립적일 수 있는가.

정보가 가치 중립적으로 작용할 때에는 정보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럴 수 없다. 자신과 관계된 정보는 결코 중립적 작용을 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게 되고 때론 바관하게 되고 때론 희열에 차서 행복해 한다.

 

여기서 공중권세자의 위력은 여실히 발휘된다.

하늘을 나는 용의 위력을 알 수 있다.

흑암이 깊음의 얼굴에 있다는 창세기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용은 하늘의 빛을 차단하고 땅을 지배하는 권세자의 실체이다.

진리의 세계가 아니다. 정보의 세계이다.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파괴력을 가졌다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다.

그대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나눈 무수한 대화를 뒤돌아 보라.

무엇을 나누며 기뻐했고 무엇을 말하며 노여워했는가. 거기에 무슨 진실과 어떤 사실이 놓여 있는가.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뉴스여도 상관없고 지극히 작은 이야기여도 상관이 없다.

그대가 흥분하고 있는 그 내용, 그 힘을 생각해 보라.

우리 인생이 무엇의 지배를 받고 사는지 여실히 알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모든 것은 허깨비일 따름이다.

진리를 가리우는 어둠의 세력일 따름이다.

하늘의 빛을 차단하는 차광막이다.

그 세력이 곧 옛 뱀이기도 하고 또한 하늘을 날아다니는 허깨비 '용'의 세력에 다름 아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다ㅏㄴ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계 20: 2)

누가 이 용을 때려잡을 수 있겠는가.

용은 끊임없이 인생들을 괴롭힌다. 용을 구주로 삼고 그를 경배하는 인생들을 성경은 '짐승'이라고 한다.

짐승의 세계에는 하늘의 빛이 없다. 공중의 권세 잡은 용과 짐승들만이 판을 친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며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계 13: 4)

 

하나님의 신은 공중에 운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곧 '물'에 그의 신이 깃들어 계신다.

하나님의 얼은 뉴스에 깃들어 있지 않다. 세상의 풍조에 그의 거처를 두고 있지 않다.

'소문'과 '아무개는 어떠 어떠하다'는 그 같은 것에 신의 정신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예인들의 가십 뉴스에 당사자들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뉴스의 소비자들은 키득거리며 하루를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같은 뉴스를 값을 지불하고 소비한다.

진리를 추구하고 순례의 길을 걷는다는 그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구주로 섬기면서 순례의 길은 무슨 순례의 길인가.

하나님의 신은 결코 그 같은 데에 머물지 않는다.

나의 삶에서 과연 용을 잡아챌 수 있겠는가.

성경이 또 하나의 종교 정보창고로 기능하고 있다. 종교 정보의 생산기지로 작용하고 있다. 

성경이 단순히 데이터베이스로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데이터를 꺼내서 사용하는데 집중한다.

진리를 말한다고 성경을 입에 담고 있지만 도무지 땅의 관심사에 머물러 있다.

육체대로 성경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물론 거기 감동이 있고 진실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육체의 언어는 육체를 살게 한다. 

영의 언어는 영을 살게 한다.

신령한 것을 속되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속된 것도 거룩케 하는 이가 있다.

마침내 속될 것도 없고 거룩할 것도 없는 지극한 거룩, 성과 속이 따로 없는 자리에 이른다.

 

동일한 문장, 동일한 언어로 표현했다고 해서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 역시 동일한 것인가.

존재 언어와 정보 언어의 차이는 동일 단어의 배열이 같다. 혹은 다르다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의 표현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자와 청자의 영성에 달려있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지듯 나누인다.

하나님의 창조의 둘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물 가운데 궁창이 있고 물과 물로 나뉘는 사건이 있다.

이 둘은 궁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이룬다,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는 것이다. 아래 물은 육체의 소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요 

위의 물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물이다.

 

 

하나님의 둘째 날은 정보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가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이다.

아랫물은 육체의 소욕을 충족시켜주는 지식의 세계요, 위의 물은 마음의 눈을 밝혀주고 마음을 열어주며 

마음의 땅을 적셔주는 하늘의 비의 세계이다.

아래 물은 애굽의 하수요 기름진 고센 평야를 가꾸는 나일강 물이라면 위의 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요,

세초부터 세말까지 여호와의 눈이 머무는 곳, 가나안 땅에 내리는 이슬이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신 32: 1- 2)

 

이같은 것이 위의 물이다.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 (창 1: 7)

궁창이 곧 하늘이라면 아래 물이 생성되는 곳은 공중이며 땅이다.

하늘의 물도 땅으로 내리고 공중의 물도 땅으로 내린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비로소 공중의 권세 잡은 세계와 하늘의 빛의 세계에 대한 나누임이 시작된다.

혼돈의 인식조차 없는 때에는 결코 그 같은 분리조차 없다.

스스로의 삶의 지혜를 '밝음'이라고 우리의 고집을 내세우는 동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과 물은 단지 나의 욕구를 충족해 줄 대상에 불과하고 나의 지혜에 분석되어야 하며, 

정복하고 다스려서 마침내 나의 손아귀에 집어 넣어야 만족할 소유와 욕구의 대상일 따름이다.

 

그런데 진리의 빛을 땅이 영접하고 나면

비로소 하늘의 빛과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된다.

인식의 빛과 마음의 빛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인식의 빛, 자각 능력의 확장이야말로

진리의 세계로 알던 시대를 지나

마음에 비추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같은 것이 하나님의 둘째 날 이야기다.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의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동안은 처리되기커녕 지배당하고 종속된다.

둘째 날 비로소 영과 육, 에고의 고집과 하나님의 정신이 둘로 나뉘어 보인다.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고 있음이다.

공중의 용이 그 기운을 잃을 날이 멀지 않았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과 공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생각을 잡아먹고 영의 세계를 성숙시키라는 데 있다.

영의 생각은 씨요 그 땅은 육체다. 

육체가 영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영과 육의 분리는 분리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합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성취코자 함에 있다.

생명으로의 합일은 육신의 생각이 죽어 영의 생각으로 꽃피는 것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뜻은 둘이 적당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배젖이 죽어 씨눈에게 자양분이 되고 씨눈이 새 생명으로 꽃피는 것처럼 말씀과 육신이 합일되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일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심이라 한다.

예수가 말했다. "영혼에게 의탁하고 있는 육체는 화(禍)가 됩니다." (도마복음 말씀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