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언어는 이미 타자에게서 왔고 의식의 세계 역시 타자에 의해 타자의 언어로 일깨워졌고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수많은 감각 중 청각을 통한 소리와 음성 언어다. 청각만이 아니다.
온몸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지만 특히 언어를 통해 의식의 감각이 일깨워진다는 점이다.
이때의 언어는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과 집단 무의식의 총합이 깃들어 있는 전통 언어다.
생존을 기본으로 한 약육강식의 언어가 내 대뇌피질의 신경망에 반복해서 들려지고
언어 감각과 생각의 기능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언어는 나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의 언어다. 비록 나의 언어 감각기관을 통해 발성이 이뤄지고 발화가 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앵무새와 같이 타자의 언어를 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앵무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 재생이 아니라 깃들어 있는 의미체계를 상호 연관하고 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확장하며 발화한다는 것이다.
고도화된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치 불루투스 스피커와 같이 타자의 세계를 투사하여 발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레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말하다"가 아니라는 것, 물론 형식적으로는 주어가 나지만
타자의 가치체계와 이념들이 들어와 나를 배후 조종해서 나로 하여금 발화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내실적 주어가 '나'이겠는가.
앵무새가 "주인님,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반복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앵무새가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앵무새의 기특함을 칭찬하고 신기하게 바라본다.
앵무새가 말했으니 그 발언의 주체가 앵무새인가? 주어는 앵무새다. 그런가? 아니다.
앵무새의 주인이 그 발언의 주체라는 말이다. 앵무새는 다만 그의 뇌세포 신경망을 주인에게 내어준 것에 불과하고
통신망이 되었을 뿐이다. 이 통신망에 기록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시간 차이를 두고 발화하는 형태일 뿐이다.
신경망은 오늘날 문명이 발명해 낸 반도체 이전의 반도체라 하겠다.
우리들의 언어와 의식이 마치 이같이 타자에 의해 탈취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가 말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다.
오로지 비본질의 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경우 내가 말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다. 오로지 비본질의 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경우 나의 말은 내 말이 아니다.
주어는 나인듯 하지만 내 뇌세포의 반도체 신경망을 타자에게 내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비록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사용자가 앱을 작동시키고 온라인에 연결하여 음악 파일을 클릭하면
컴퓨터의 스피커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다. 이때 컴퓨터가 소리를 내고 있으니 컴퓨터가 소리를 내고 있으니
컴퓨터가 주어이고 주체인가? 아니다. 컴퓨터는 다만 사람의 지시에 따라서 기능 할 뿐이다.
인생은 마치 이와 같다. 여기서 타자란 개별적인 내 앞의 타인을 일컫는 게 아니다.
그 공동체의 문화고 전통이고 언어며 무의식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서로 다른 결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그중에 먼저 들어온 이데올로기가 그 사람의 성향을 나누게 한다.
진보적 신념이 들어와 그를 배후조종하면 진보적인 사람 역할을 할 뿐이다.
보수적 이념이 들어와 지배하고 있으면 보수적 신념이 그를 컨트롤 하고 있다는 말이다.
혹은 단지 진보와 보수로 나눌 수 없는 공동의 가치들이 있다.
수많은 집단 무의식이 들어와서 배후 조종자 역할을 한다.
이들 모두가 '타자'다.
따라서 인생은 비로소 존재 문제를 문제 삼게 된다.
내 의식은 과연 나로 존재하는 가의 문제다.
여기서 비로소 비존재를 보게 되고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무'로 드러나야 배후에 있는 절대 타자가 더 이상
배후에서 나를 조종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무는 드러나는 것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무란 이미 형성된 그 모든 의식 세계의 하우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실존 체험이다.
십자가 경험이고 아무 것도 아님이고, 선악에 대한 디가우징(Degaussing)* (강력한 자력으로 컴퓨터 하드 디스크의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는 기술)이며 의식의 새로운 포멧 경험이다.
내가 없고 앵무새처럼 반도체 하드웨어만 타자에 의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절망이 곧 무의 경험이다.
이때 비로소 타자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없고 타자가 주인으로 있었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나의 생각 기능 작동이 타자의 배후 조종에 의해 반도체 기능이 작동된 것일 뿐, 내가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즉, 생각이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타자의 요구와 조종에 따라 말하는 것이니 나의 말이 아니었다는 자각이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존재의 생각이 아니다.
비존재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아직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무가 경험되면서 이제 비로소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를 토대로 해서 나의 인식의 빛이 찾아온다.
어떤 존재? 타자로 인한 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비로소 나로 인한 나의 의식의 존재,
존재 망각이란 바로 나의 존재를 일컫는다. '나'의 존재 유무가 핵심이다.
이를 뒤로하고 존재자의 존재만을 탐색하게 되면 존재는 영영 드러나지 않고 숨어버린다.
내 의식이 타자로 점령된 채 비존재로 있으면서, 그 같은 비존재가 존재를 탐색한다는 것은 난센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내 앞의 컴퓨터가 컴퓨터 주인을 인식하려 탐색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 문제는 타자로 인해 형성된 의식이 없게 되고 비로소 나로 인해 다시 세워지는 존재의 탄생을 일컫는다. 그러고서야 존재에 의해 모든 존재자는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의문이 풀린다. 나누어 보고 나누어 생각하고 나누어 말하게 되는 것이 시작된다.
그리스 언어에 나타난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본다. '보다'는 동사를 두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다.
'블레포'가 있고 '호라오'가 있다.
'블레포'는 흔히 육체의 눈으로 나타난 것만을 보는 것이고, '호라오'는 마음으로 보기며 영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내적, 영적 통찰력으로 인식하는 것을 '호라오'라 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타자에 의해 의식이 틀 지워지고 작동되는 세계에서의 생각은 여러 가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노미조 (생각하다. think), 도케오(to have an opinion)등이 있다.
그것은 생각의 기능이 작동되어 무수한 생각의 세계가 펼쳐지겠지만, 자기의 생각하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비존재의 생각이 작동할 뿐이라는 점이겠다.
밤을 새워 생각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고민하며 생각을 해서
그의 세계를 펼친다 해도 타자의 지배 아래 작동되는 생각은 곧 생각다운 생각이라 할 수 없다.
강력한 배후 세력의 조종에 조종 당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서 하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에는 명사 '누스'에서 유래한 '노에오'가 있다.
'노에오'의 부정사 '노에인'을 흔히 사유라고 번역한다. '노에인'을 사유라고 하면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유는 명사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의 노에인은 단지 명사가 아니다.
동사는 분사로 사용될 수 있고 부정사로 사용될 수 있다.
분사나 부정사나 둘 다 동사의 성격을 잃지 않는다. 동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형용적이거나 혹은 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 분사라 하고, 동사면서 동시에 명사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 부정사로 쓰인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들 다수는 그리스어 부정사(영어식으로는 to 동사원형)을 사용하고 있다.
'노에인'은 따라서 단지 명사가 이니요, 사유하고 있거나 사유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를 나타내는 '에이나이'도 마찬가지다.
에이미 동사의 부정사라는 사실은 단지 저기 그렇게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명사로 그렇게 있지만, 여전히 상태 동사로 지금 있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기'가 '에이나이' 의미를 제대로 살려준다. 존재는 단지 명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사로 표현되거나 분사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존재론을 흔히 Ontology라 한다. 온(존재자)과 로고스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온'(being)이 에이미 동사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온'을 존재자로 번역하든 존재로 번역하든 동사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에이미(Be) 동사의 분사 형태가 '온'(Being)이고 부정사가 '에이나이'(to be)다.
즉 존재라는 부정사 형이 에이미 동사에서 비롯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살아있는 것, 스스로 서 있고, 가고 쉬는 그와같은 것을 의미하는 'asus'에서 유래했다고 하이데거는 분석한다. 노에오 혹은 노에인은 명사형 '누스'에서 유래했다. 누스는 생각하는 힘이요, 정신 혹은 '얼'을 의미한다.
누스는 생각하는 힘이요, 정신 혹은 '얼'을 의미한다. 누스에서 유래한 동사가 '노에오' 혹은 '노이에오'다.
노에오에서 여러 동사가 파생되고 그 의미는 심화된다. 이를테면
카타노에오 ( consider carefully)
프로노에오 ( to have understanding, to think)
메타노에오 ( chang the inner man)
번역 성서들은 메타노에오를 '회개하다' 혹은 '속사람을 바꾸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메타노에오를 분석해 보자.
'메타'는 '사이에, 뒤에, 넘어서'의 뜻이고 '노에오'와 합성되었다.
따라서 그 본래의 뜻은 '넘어서 생각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회개란 그 너머의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즉 해설을 붙이면 타자에 의해 지배되는 생각의 세계를 넘어서 생각하라는 뜻이 회개하라는 의미의 본질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종속된 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가 회개라는 말의 더 깊은 의미다.
'노에오'에서 '노에인'이 나왔다. 즉 노에오의 부정사 형이 노에인이다. 그러므로 노에인은 '생각하기'로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하다. 사유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대상을 두루 생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스어의 본래 의미는 '생각하기'라는 말이다. '노에오'는 '내가 생각하다'이고 노에인은 '생각하기(현재 부정사 능동)'다.
여전히 동사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다.
비로소 타자로부터 형성된 비본질의 의식과 구분하여 자기 의식의 싹이 트며 시작되는 생각이 '노에오'요,
'노에인'이다.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체를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게 된다.
서양 사상사에 면면히 관통하고 있는 주제를 일찍이 엘레아 사람 파르메니데스(BC 510-450년경)가 단편에 남겨 놓은 문장이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동양에서는 공자(BC 551-479년경), 노자와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다.
"토 가르 아우토 노에인 에스틴 테 카이 에이나이 " "왜냐하면 '생각하기는' 곧 '존재하기' 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와 존재하기는 전 서양철학의 주제요 역사사다.
파르메니데스가 "노에인( to think 현재 부정사 능동)이 에이나이(to be)라고 하는 위대한 문장을 남겨 놓는다.
대개 "사유가 존재다"로 번역하나 나는 부정를 살려 '생각하기가 존재하기다'로 번역한다.
'노에인'은 엄격하게 하면 thinking of 가 아니라 to think 다.
생각하기는 곧 자기 세우기요 자기 의식이 비로소 존재하기(에이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더 이상 타자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고 스스로 서 있고 가고 쉬는 것도 스스로 하는 것,
그렇게 존재하기다. 그러므로 '에이나이'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기'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를 분석해보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생각하기'에서 '존재하기'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거기서 존재하기란 비로소 '나(I)'를 의미한다. 존재의 '나'를 의미한다.
타인에 의해 형성된 의식이 스스로 독립적 의식의 '나'로 형성되어 감을 의미한다.
생각하기가 곧 존재하기다. 의식과 정신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저 사물 존재자의 존재를 일컫는 게 아니다.
온통 사물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느라 정작 자기 존재를 망각하게 되고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까지도 망각하게 한다.
내가 존재해야 모든 게 존재한다. 내가 존재해야 비로소 존재자들은 존재자로 드러난다.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생각하기가 존재하기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어에는 '하야(그가 있다)' 동사의 완료시상과 미완료시상의 합성어에서 야웨라는 명사가 탄생하고
하야는 그가 있다(HE IS)라면 '에흐예'는 '내가 있다(I AM)'다.
에이미 동사의 분사 '온'의 여성형에서 유래한 것이 '우시아'다.
우시아에서 성서의 그 유명한 파루시아가 나온다. 파라 전치사와 우시아의 합성어로 힘께 있다.
혹은 흔히 임재라 사용하기도 한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번역된 '에피우시온'도 '에피' 전치사와 '우시아'에서
유래한 '우시오스'의 합성어다. 따라서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살펴보는 까닭은 에덴 이야기에서 로고스 읽어내기를 위해서다.
명사 로고스는 동사 '레고'에서 유래했다. 레고는 비로소 '내가 말하다'는 의미다.
내가 말하려면 타자로 인해서 형성된 의식의 세계에 무의 체험을 통해 타자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무의 토대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이를 '호라오'로 표기한다.
편견과 선입관, 앞서 자리잡고 있는 이데올로기, 진영 논리 등이 의식에 진을 치고 있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 보는 것만 보게 된다. 진영의 관점에서만 만물을 보고 해석한다.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한다.
헬라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보는 것을 동사 블레포를 사용해 본다고 언어를 구분한다.
무의 체험으로부터 비로소 그 같은 앞선 앎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다.
무의 토대에서만 새로 보게 된다. 일러 '호라오'로 표기된다는 점이다.
보게 되면서 새롭게 '생각하기'가 시작된다.
제 스스로 생각하기가 시작되면 비로소 '존재하기'가 찾아온다.
이것이 I AM이다.
아이 엠에서 비로소 레고가 시작된다. 자기 자신이 '말하기'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레고의 부정사는 레게인이다. 동사면서 명사가 '레게인'이다.
따라서 '레게인'은 존재의 언어로 '말하기'다.
존재의 언어로 말하기란 무엇일까? 빌려온 생각은 타인의 생각이요 제 생각이 아니다.
타자에 종속된 채 생각하는 것은 앵무새와 마찬가지로 타자를 반영할 뿐 제 생각이 아니라는 점은 미미 논했다.
무의 토대 위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는 비로소 스스로 '존재하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존재하는 나가 말하는 것을 일컬어 '레고'라고 한다.
'레게인'은 존재가 '말하기'다. 따라서 제대로 인식이 먼저 시작되면서 동시에 도대체 말하기도 시작되는 것이다.
로고스는 레고에서 유래했지만 동시에 로고스에 의해 레고와 말하기가 가능해진다.
이때의 로고스는 근원 안에 있는 신성의 언어다. 얼이요, 하나님이다.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고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 이념에 잡히지 않는 지극하고도 지극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통찰로부터의 열매가 로고스다.
로고스로부터 레고가 흘러나오고 '레고'와 '레게인'으로부터 아르케에 있고 지성소에 있는 로고스가 드러난다.
관통해서 말하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나누어 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디아레게인'에서 헬라어 디아는 '무엇을 통하여'라는 의미의 전치사다.
통찰이란 타자의 사유에 종속된 것을 지나서 스스로의 생각하기를 통한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어 말하기
혹은 관통하여 말하기가 통찰이다. 이때 '레게인'을 통해 드러나는 게 '로고스'다.
여기서 서양철학의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다양한 차이를 드러낸다.
아니, 요한복음의 빛나는 통찰과는 다른 개념으로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라고 위대한 선포를 한다.
하나님이 곧 로고스라 일컫는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은 절대자 곧 절대 타자요 무한자로 변형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그 같은 오해가 발생한다.
요한복음은 데오스란 도리어 절대자 혹은 절대 타자인 신이 아니라 '로고스'임을 밝히 드러내 주는 책이다.
그런데 역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데오스' 곧 하나님을 말하는 책이요,
하나님은 상상 속에서 관념으로 창조된 엄위하신 절대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로고스'가 곧바로 그 '데오스' 임을 밝혀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
그 로고스는 생각하기를 통해 존재하기가 이루어지고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나 '말해지기'가 이뤄진다.
말하기를 통해 로고스로 드러나는 것이 신성이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책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로고스와 하나님은 비존재를 넘어선 존재의 현현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로고스'로 선언하고 있는데, 서양철학의 사유에서는 '로고스'를 종종 요한복음에서 폐기하고 있는 절대 존재 혹은 무한자인 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다분하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신을 오해하고 있고 다수의 서양 사상가들은 로고스를 오해하고 있다.
즉 로고스를 우상화하려거나 혹은 정반대로 약화시킨다.
거기서 서양 사유는 로고스를 중심에 놓고 선과 악을 나누고 흑과 백을 구분하려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개념과 현저히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는 파토스의 상대개념으로 로고스를 한정할 때다.
보편 이성의 원리에 의한 말, 논증, 계산 등으로 사용하는 경우라 하겠다.
인생이 타자로부터 의식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이고 숙명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 의식세계가 형성될 수 없다. 비록 자신이 아닌 남의 집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처음 시작된다.
부정되어야 할 집을 짓게 된다. 아무리 긍정하고 싶어도 그것은 긍정되지 않는 부정의 존재다.
부정되어야 할 의식은 누구라도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다.
비존재( 나 아닌 타자)로부터 시작되고 존재로 이행하기 위해 무의 소용돌이가 찾아온다. 무는 도대체 무가 무다.
유인줄 알았던 것이 아님이 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정신이 드는 사람은 없다.
로고스는 절대자를 일걷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하기가 이루어진, 존재가 말하기를 통해
드러나는 근원에 깃들어 있는 증거를 일컬어 로고스라 한다.
이 로고스는 따라서 사람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빛이고 존재의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생명의 빛이다.
그것은 늘 현재 능동태 부정사 '말하기(레게인)'를 통해 드러나는 말씀이다.
우리말에서 말과 말씀의 차이가 있다.
흔히 윗사람들 혹은 성인이나 현자의 말은 말이라 하지 않고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해서
말을 마음에 새기라는 뜻으로 말씀이라 일컫는다.
혹은 말은 잘 사용(말하기)하라는 의미로 말을 씀, 하여 말씀이라 한다. 우리말 용법이다.
생각하기가 존재하기요 존재하기는 곧 말하기로 드러난다.
타자의 생각과 말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내 의식에 들어와 있지만, 이제 그것으로 형성된 의식의 세계가 무너지고
무화(없어지게 되면) 존재의 나가 '레고' 혹은 '레게인' 또는 '디아레게인'하게 된다.
거기서 드러나는 존재의 소리(로고스)를 새겨들으라는 의미에서 정관사가 붙어있는 호 로고스는 곧 '말씀'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들여오는 존재의 소리 곧 호 로고스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하기'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로고스'는 거기서 창조의 주체가 된다.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 로고스'와 '존재하기'는 상호 순환적이다.
먼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하겠다.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가 이뤄지고 말하기에 의해 '존재하기'가 이뤄진다.
요한복음이 위대한 것은 바로 '타자에 속한 말하기'에 익숙해 있던 베드로로 하여금
마침내 타자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언어를 획득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는 전형적인 타자의 욕망과 요구가 자신 안에 그대로 투영되어
자신의 욕망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는 동시에 로고스를 오해하고 오해된 로고스를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1장에 이르러서는 다시 요한복음 14장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사이 절대타자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고 그의 절대 우상인 예수와 오해된 로고스가 없어지게 된다.
자신의 말로 말하기(레게인)에 이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베드로전후서는 마침내 베드로가 자신의 말로 말하기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침내 베드로로 '존재하기'를 보여주는 장쾌함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에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 같은 로고스를 읽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