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A.뮈토스와 로고스

1.

뮈토스에 대해

 

뮈토스는 흔히 신화로 번역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서사구조를 띠기에 내러티브(narrative)다.

 

성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한다. (딤전 4: 7)

성서는 온통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바울의 신화를 버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서는 공교히(궤변을 꾸며) 만든 이야기일까?

신화에 매몰되면, 그러니까 이야기에서 로고스를 읽어내지 못하면, 신화에 빠진 거고 그럴 때

허탄한 것이 되고 만다.(딛1: 14)

신화는 봉한 샘이고 덮힌 우물이고 로고스를 함장하고 있는 판도라 상자다.

인을 떼어 봉합이 풀릴 때마다, 우물의 덮개가 열릴 때마다 로고스는 홍수를 이루고

심판을 완성하고 생명의 꽃을 피운다.

뮈토스, 오늘까지 살아남아 전승되는 이야기는 단지 흥미롭고 말초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다.

고대 사람들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는 깊은 영성과 더불어 후대의 철학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영적 지혜를

담고 있다. 뮈토스와 로고스는 서로 상충하는 게 아니다. 대립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 우리는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산다.

뮈토스는 로고스를 길어내는 샘 근원이다.

왜냐면 오늘의 나는 어제에서 왔기 때문이다. 어제의 유산으로부터 오늘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과거가 아니다. 이야기로 오늘 내게 다가와 대화를 청한다.

성서는 뮈토스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창조 이야기, 에덴의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기타 수많은 사람 이야기가 있다.

단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관련한 이야기여서 동시에 신의 이야기기도 하다.

무엇으로 옛사람들의 예지와 만날 수 있을까? 성서의 아름다움은 옛사람들의 이야기 곧 뮈토스가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생성되던 때와 전승 과정에서 영적인 깊이와 무게가 더하여진다.

혹자들은 뮈토스가 심리학의 초기 형태라고 지적한다. 그리스 신화를 논할 때 흔히 그렇게 규정하곤 한다.

심리학자들이 신화에서 심리학 용어를 많이 만들어내곤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 말에 분명 일리가 있다. 뮈토스는 전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생성될 때 당시의 사람들 심리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심리학의 초기 형태라는

말에는 백프로 동의할 수 없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심리학의 초기 형태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미처 규명하지 못한 수많은 인생의 이야기를 함장하고 있다.

무의식에 담겨 있는 혼탁한 욕망에서부터

마침내 사람다운 사람에 이르게 하는 깊은 순례의 영성을 이야기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뮈토스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수한 로고스를 길어 올릴 수 있다.

모세의 영적 각성을 통해 편집된 이야기에 같은 영성으로 접속할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결이 있고 영적 주파수가 있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고대 사람들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고

거기서 로고스는 사라지고 만다. 단지 이야기만 남는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만 남는다.

뮈토스와 대비하여 로고스를 역사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철학을 비롯한 그리스철학이 대두되면서 우주의 이치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자연의 신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논증하는 이성의 시대를 로고스 시대라고 칭하곤 한다.

그럴 때 로고스는 말, 논증, 계산, 분별, 합리성, 이성의 의미로 사용된다.

문제는 이 글에서 전개하려는 로고스는 단지 그러한 의미의 로고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제목이 의미하는 로고스는 '이성을 중심으로 규정되고 있는 개념을 훨신 넘어선다.

요한복음이 언급하는 '로고스'는 앞서 말한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로고스가 생명이고 빛이며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로고스는 철학에서 규정하고 있는 로고스와는 전혀 결이 다르다.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라고 말할 때의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일컫는다.

이점이 분명해져야 우리는 에덴의 '뮈토스'에서 길어 올리는 로고스를 비로소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에덴의 로고스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려 한다.

에덴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들이 가득하다. 신(야웨 엘로힘), 자연, 사람, 결혼, 나체, 뱀, 뱀과의 대화,

생명, 선악, 질투와 분노, 형제 살인 이야기 등, 소위 신화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이야기로 읽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고 또 믿고 있다.

하여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로고스는 매장, 매몰 되고 만다.

신화 그 자체에 빠지게 되면 야기되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뮈토스는 로고스다.

 

동해바다의 맑은 물과 출렁이는 아침 바다는 무수한 이야기를 생성하고 또 소멸한다.

인류 지혜의 산물인 경전은 신화적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모세 오경은 물론 신약의 사복음서 역시 신화적 기법의 이야기로 기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뮈토스는 로고스다.

로고스는 동시에 뮈토스 형식을 의존한다. 로고스로는 로고스를 결코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신화적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고

주어가 엘로힘으로 되어 있지만 뮈토스(신화)형식을 빌려 로고스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저 맑은 물과 출렁이는 동해의 파도 소리는 결코 로곳의 형식으로만 진술될 수 없다.

끊임없이 뮈토스를 품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거기서 새로운 이야기는 생성되고 로고스와 뮈토스는

is, was, will, be 의 형태로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쉰다.

주어가 엘로힘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의 생산자는 거룩한 영성자, 곧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모든 신화적 이야기에 현혹되어 '나'를 소외시켜 놓고 이야기를 읽게 되

미신에 빠져들게 되고 거기 유대 신의 엘로힘만 춤추게 된다. 미신에 사로잡힌 인생은 종교적 판타지에 예속되고 만다.

인류는 언제나 자기가 생산해 놓은 이야기의 판타지 뮈토스에 빠져 로고스를 잃어버린다.

'허탄한'은 주름살 많은 늙은 여인이란 뜻이 있다. 여기 늙은 여인은 인생의 기품과 연륜의 메타포가 아니라

미신적 삶에 찌들고 근거 없이 희망고문을 하며

습관적으로 '주여'를 주문처럼 외는 석고처럼 굳어져 있는 여인을 상징한다.

고집으로 고착된 남성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이야기에 담겨 있는 로고스를 읽어내지 못하면 이야기는 비록 성서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망령된 게 되고 허탄한 게 되고 만다. 남녀노유 불문이다.

창세기 1장의 이야기 생산자는 사람이다. 에덴 이야기 생산자도 사람이다.

거기 신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신학적 현란함으로 더 이상 인생을 기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뮈토스에서 '호 로고스'를 만날 때 '뮈토스'는 위대한 빛이 된다.

모든 신화는 그렇게 만나는 지점에서 인생을 신의 아들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