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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기도와 새 창조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의 저자  

                                                                             김창호님의 글 

 

 

 

사실 '인자의 기도와 새 창조' 이 글은 도무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글이다.

하지만 새 창조의 일곱 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글일지 몰라

한 문장 한 문장 세심하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인자의 기도와 새 창조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언제나 계시며 전능하신 자이다.

그 하나님은 전에도 창조자이시며 지금도 창조자이시며 언제나 창조자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또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

예언되고 있다. 하나님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알파와 징조로 삼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처음 창조에 속한 육신의 첫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의 새 창조의 경륜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알파와 오메가의 계시로 그것을 사람에게 알리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즉 첫 창조의 모든 것이 새 창조의 징조가 되게 하시고 그 징조를 좇아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의 마음을 닮은 아들로 새롭게 창조하신다.

첫 창조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었고 또 처음과 나중이 있었다.

새 창조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으며 처음과 나중이 있다.

첫 창조에서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창조되었으나 새 창조에 있어서는 사람의 새로워짐이 가장 먼저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만물이 일곱 날을 좇아서 창조되고 또 온전하게 지음을 받은 것 같이

새 하늘과 새 땅도 일곱 날을 좇아서 창조되고 또 온전하게 지음을 받는다.

인자의 기도는 새 창조의 예언이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로고비젼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기도문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그 기도는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우리의 예언의 삶이 되지 아니하고

다만 주기도문으로 있는 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없다.

인자의 기도가 인자들의 기도가 되고 또 그 기도의 실존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인자들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셨으니 우리 또한 인자들이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징조다.

'사람의 아들'이란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사람에게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맏아들인 인자가 그 형제들에게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니 이 기도는 인자들의 기도이다.

인자의 기도는 이사야의 하존이며 요한의 아포카뤼프스(계시)이다.

 

 

인자의 기도는 일곱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세 단계는 아버지에게 초점이 두어져 있고 나중의 세 단계는 인자들에게 초점이 두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처음과 나중이 온전히 하나 되는 단계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좇아서 보면 처음의 세 단계는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나중의 세 단계는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걷는 대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의 세 단계와 나중의 세 단계가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짝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가

짝을 이루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가

짝을 이루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짝을 이룬다.

"대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은 이 모든 기도를 하나되게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알파로부터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세 절기와 그 절기를 지키는 이스라엘의 실존이 하나 되게 하셨다.

유월절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되게 하신 절기요,

오순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나라가 임해오는 것과 죄 사함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 되게 하신 절기요,

초막절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그의 백성이 시험에 빠져들지 않게 하시는 것이 하나 되게 하신 절기이다.

 

유월절에 우리는 첫 사람의 생존에서 둘째 사람의 생명으로 옮기운 사자의 삶을 살고

오순절에 우리는 첫 사람의 나라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옮기운 송아지의 삶을 살고

초막절에 우리는 첫 사람의 자기 뜻에서 아버지의 뜻으로 옮기운 제사장의 삶을 살고

하나님과 하나됨의 화평 안에서 우리는 독수리와 같은 초월의 삶을 산다.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은 곧 어린양의 네 생명을 징조하고 있다.

인자들은 어린양의 네 생명을 근원으로 하여 새롭게 지어지면서 풍성함과 온전함의 실존으로 인도된다.

 

 

요한계시록에는 귀중한 네 책이 계시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편지다. 이 편지를 받아 읽고 듣고 마음에 새기는 자마다 승리하는 사자의 삶을 산다.

둘째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이다. 이 책의 봉인이 열리는 자마다 섬김의 송아지의 삶을 산다.

셋째는 펴 놓인 작은 책이다. 이 책을 어린양처럼 작은 자가 된 자는 어린 양의 삶을 사는 제사장이다.

넷째는 생명책이다. 이 네 생명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자에게 이루지게 된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실존은 나고, 자라며 성숙하며 열매 맺는 하나의 생명이다.

이 네 생명은 각기 일곱 날을 좇아 창조되면서 그 풍성함과 온전함에 이른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인자의 기도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는 시험이다.

예수는 시험받기 위하여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다. 금식이 끝나자 그는 시장하셨다.

그때에 시험자가 그에게 나아왔다. 그가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이 빵이 되게 하라"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시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기록되어 있느니라" 하셨다.

인자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기도하면

시험자는 나와서 말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구나 그런즉 너희가 돌을 명하여 땅이 되게 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먹인다면 너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같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일용할 양식은 짝을 이루고 있다.

인자들은 사람이 먹고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이다.

사람이 먹고 죽는 육신의 빵만 구하는 자가 아니다. 이 시험에 빠져들면 짐승이 되고 만다.

 

마귀는 다시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그가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손으로 너를 붙들어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느니라. 하였다. 그때에 예수 대답하시기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하였느니라" 하셨다.

인자들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기도하면 시험자는 말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오는 징조를 보이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징조는 짝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서만 뵈올 수 있다. 인자들은 참 성전의 징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인자들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며 세상에 볼거리(기사, 테라타)를 제공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아니다.

인자들은 서로가 죄를 용서하는 그 긍휼한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징조로 보여야 한다.

이 시험에 빠져들면 거짓 예언자가 되고 만다.

 

마귀는 다시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에게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었다.

그가 말하기를, "만일 네가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하였다.

그 때에 예수 대답하시기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다. 인자들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기도하면 시험자는 말하기를

너희가 내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과 누구에게 엎드려 절하느냐는 것과 짝이 되어 있다.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려면 수단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사탄은 인자들을 미혹한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려고 사탄에게 절하는 것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버리고 사탄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인자들은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기도한다.

이 시험에 빠져들면 음녀가 되고 만다.

 

 

새 창조의 일곱 날

 

요한계시록은 총 22장이다. 인자의 기도와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서 일곱 단계로 나누어 보면,

알파에 속한 11장은 3장, 4장, 4장으로 나누이며

오메가에 속한 11장은 3장, 4장, 2장, 2장으로 나누인다.

 

첫째 날, 첫 단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계 1 - 3장)

둘째 날, 둘째 단계: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계 4- 7장)

셋째 날, 셋째 단계: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계 8 - 11장)

넷째 날, 넷째 단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계 12- 14장) 

다섯째 날, 다섯째 단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 (계 15- 18장)

여섯째 날, 여섯째 단계: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계 19- 20장)

일곱째 날, 일곱째 단계: 대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계 21- 22장)

 

필자는 요한계시록과 이사야서를 인자의 기도를 좇아서 일곱 단계로 나누어 읽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인식 능력의 한계성 때문이다.

사람은 순서를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체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의 이해 방식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아무런 인위적 단계나 제목없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영과 생명 안에서 끊임없이 따라가며 통짜로 읽는 것이 좋다. 물론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그런 날이 올 것이다.

필자는 본서가 독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 쓰이기를 바란다.

 

첫째 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계 1:1 - 3:22)

 

빛이 있으라

창조의 첫째 날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하였다.

빛이 있으라 명하신 것은 처음이요, '빛이 비추어 온 것은 나중이다.

이 징조를 좇아서 아버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새 창조의 첫째 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신다.

기록된 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에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 하였다.

 

그 빛이 비취어 온 자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간구한다.

빛이 비취어 온 것은 알파요 기도하는 것은 오메가다. 오메가의 나중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실존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록되기를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하였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하였다.

이와 같이 어두움은 빛을 위하여 있었고 빛은 어두움을 밝히면서 온전한 한 날을 이루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하였다.

 

우리의 삶 역시 어두움과 빛으로 나뉜다.

그러나 그 어두움은 어두움일 뿐이지 우리의 선악 개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어두움에 빛이 새롭게 창조되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생명의 문제일 뿐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빛과 어두움이 선악과 관계가 있게 되는가.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빛을 어두움으로 삼을 때이며, 빛이 비취어 왔는데 빛을 영접하지 않을 때이며,

처음 빛을 붙들고 나중 빛을 영접하지 않을 때이다.

만물에게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다만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선과 악은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나님은 일곱 날을 좇아서 거듭 거듭 오는 새 창조의 빛을 받지 아니하고 멈추어 서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를 새롭게 하실 수 없다.

그는 마치 어두움을 빛으로 삼은 자와 같다. 그러나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서

풍성하고 온전한 실존으로 지어지기까지 멈추지 아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에게 빛으로 오고 계신 분(호 에르코메노스)이다.

첫 날의 실존으로 오신 그분은 다시 둘째 날의 실존으로 오시며, 둘째 날의 실존으로 오신 그분은

다시 셋째 날의 실존으로 오신다.

이와 같이 우리 생명은 새 창조의 6일을 좇아서 풍성하게 지어지고 일곱째 날 온전함에 이룬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할 때에 그 이름은 무엇을 말함인가?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모세에게 분명히 드러내셨다. 기록된 바,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야웨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에 이르는 나의 표호니라"(출 3:13 - 15)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존재니라(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I am that being)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의 이름은 야웨"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먼저 '나는 존재니라'하셨다.

하나님께는 존재가 곧 그의 이름이다. 하나님이 야웨로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나는 존재니라 하셨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서 새 창조는 시작된다.

이삭도 야곱도 존재의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지어진 실존이었기 때문에 '산 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되셨다.

 

야웨란 하나님이 존재임을 드러내는 이름이므로 존재와 만나 새롭게 지어질 그들을 위하여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그가 존재 임을 아는 자만이 그들 존재로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를 잃고 존재의 이름만을 부르며 그를 우상화하고 있다.

존재 없는 이름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존재로, 거룩의 존재로, 사랑의 존재로 사람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면서 그들과 하나되려 하신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창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을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닮게 하신다.

이는 그의 마음이 곧 생명이요, 거룩이요, 사랑인 까닭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아들들이라 호칭하는 것은 그가 존재로서 우리 안에 임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존재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만 가지고 있다면 쭉정이에 불과하다.

이름은 실존을 위하여 있고 실존은 이름을 온전케 하면서 둘이 하나를 이룬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이루어질 실존을 미리 알려주는 아버지의 예언이다.

우리는 그 예언의 삶을 살면서 아버지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다. 이름은 알파요 실존은 오메가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그 이름은 이루어질 실존이다.

아브람은 첫 사람의 이름이요, 아브라함은 둘째 사람의 이름이다. 둘째 사람의 이름은 그 실존과 하나이다.

오늘도 아브라함의 실존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그가 믿음의 조상이며 우리는 그의 믿음을 좇아 새로운 실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존은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 가운데서 바라본 로고비젼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