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요한계시록 1장 주해와 번역

'예수의 믿음'의 저자 김창호님이 운영하시는 '형상과 글' 카페에 올려진 글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지만

유독 요한계시록만이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보는 글자의 모듬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최근에 다시 읽으니 투명한 유리창이 거둬졌는지 글자 하나 하나가 보물이고 그 모둠이 보물창고가 아니겠는가..

 

노트에 받아적은 내용을 내 블로그에 다시 옮겨 적어보면서 주옥같은 그 글들을 다시 음미해 볼 생각이다.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에게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에게 주셨고,

그는 자기의 종 요한에게 보낸 자기의 천사로 말미암아 징조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1장 1절은 20장 전체를 여는 열쇠다.

만약 우리가 1장 1절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에 충만한 영과 생명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아포카뤼프스'(계시)와 이사야서의 '하존(로고비젼)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하는 예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언과 점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예언은 크로노스의 생존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 카이로스의 생명의 실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계시다.

그러나 점은 첫 사람의 소욕을 좇아서 흘러가는 시간 속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점은 첫 사람의 길흉화복을 말하고 예언은 둘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실존을 말한다.

 

계시란 감취였던 것을 열어보임이다. 무엇이 감취여 있었는가. 그를 믿는 자 안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의 실존이다. 첫 사람이 둘째 사람으로 새롭게 되는 그 일이다.

요한계시록을 종말론이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점서로 취급되고 있는 분명한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에 충만한 영과 생명을 버리고 오늘 여기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실존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종말에 일어날 일에 집착하고 있다.

종말론의 근원이 된 나중(에스카토스)은 영과 생명의 둘째 사람이 창조되는 은혜의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 우리의 실존이 되는 역동의 시간이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끝이 아니라 크로노스를 초월하는 생명의 시간 곧 카이로스이다.

누구든지 크로노스는 처음이요 카이로스는 나중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즉시 카이로스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고

깨어있는 자는 속히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삶을 산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계시로 겉 사람 안에 숨겨 있는 속 사람에게 존재의 빛을 비추신다.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의 모양과 같이 지어지게 하는 마음의 빛이다.

우리 육신의 첫 사람이 나중 되고 영의 나중 사람이 처음 되어 둘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그 일이 새 창조이다.

이 새 창조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이 알파요 그 오메가는 만물이 새롭게 되고

마침내 하늘에서 아버지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일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요한이 예언하고 있는 일들은 크로노스의 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때에 속한 것이다.

카이로스의 실존은 지금 여기서 반드시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하루를 천 년 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자는 이 일을 지체하지 아니한다.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질수록 하나님과 하나 됨의 기쁨을 속히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속히 이루어 주시는 분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의 종들 안에 속히 이루어지는 예언으로 와 있다.

계시를 속히 실존이 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계시를 받은 자가 즉시 계시 안으로 들어오고 항상 깨어서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계시된 일들은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오늘날은 계시가 없다'한다.

요한계시록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항상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들을 귀를 가진 자는 그의 계시가 지금 속히 이루어져야 함을 믿고 그 안에 거한다. 

 

 

*에세마넨( 징조하다)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좇는 한 자기 지혜의 함정에 빠져든다.

이는 우리의 지혜를 초월하는 계시의 말씀을 영과 생명 안에서  읽지 아니하고 자기 지혜를 좇아 읽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에세마넨' (세마이노 동사의 직설, 과거 능동)은 징조를 보였다는 의미다.

그것을 오늘날 '알게 했다'( made it known )로 번역하니 번역 성경은 1장 1절부터 징조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에세마네'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그 첫 절에서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징조서이기 때문에 요한은 말하기를 '그것을 읽고 있는 자(호아니기노스콘)는 복되다' 하였다.

읽는다는 것은 징조를 생명 안에서, 거룩 안에서, 사랑 안에서 해석한다는 의미다.

종말론은 그 안에 생명도 없고, 거룩도 없고, 사랑도 없으니 요한계시록을 해석한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와 상징이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해석되지 않는 것은 모두 점 풀이에 불과하다.

징조는 실존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실상은 징조에 의해 증거되지만 징조는 실상이 아니다. 그런즉 징조를 실상으로 붙잡은 자마다 그 징조를

멸망의 '테라타(기사)가 되게 한다.

징조(세메이온)와 기사(테라타)는 둘이 아니요 하나다.

징조를 생명과 거룩과 사랑을 좇아 읽는 자는 징조를 징조 되게 하지만

그 징조를 생존과 속됨과 욕심을 좇아 자기 이익 거리로 삼는 자는 그 징조를 멸망의 기사가 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숫자와 상징을 멸망의 기사로 삼는 자들이  도처에 우글거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만 구원 받았다(우리는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 되었다. 구원 받은 것은 소유태요, 구원된 것은 실존태다)고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들은 멸망의 기사를 움켜쥐고 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그의 계시를 징조로서 베푸신 것인가.

영적 실존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또 어린 양에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를 나누기 위함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로 거짓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이 새 창조를 위한 징조다. 징조를 실상으로 믿는 것은 곧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한 자마다 거짓을 좇아간다.

 

모든 성경은 첫 창조에 속한 천지만물을 영과 생명을 위한 징조로 기록하였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그 징조를 숫자와 상징으로 드러내고 있다.

징조는 알파다. 그 징조를 좇아 이루어지는 우리의 실존은 오메가다.

징조해석이 영과 생명에서 벗어나면 그 실존 역시 영과 생명에서 벗어난다.

같은 계시의 말씀이 우리를 음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그들의 무리가 되게 하기도 하며

어린 양의 신부가 되게도 한다.

 

 

*천사

 

오늘 날 천사에 대한 오해가 너무 심각하다. 천사는 좋은 소식 곧 징조를 전하는 자이다.

카이로스의 영과 생명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천사이며 그 소식 자체가 천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말씀 자체는 천사로 있으면서

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징조이며 천사다.

우리의 실존을 이루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영이다.

그 말씀이 우리의 실존이 되면 그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천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징조를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속히 될 일

곧 복음을 알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새 창조의 계시를 받은 이들이 일곱 날을 좇아서 거듭 거듭 새롭게 지어지는 일을 거절하면

그 계시는 헛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전해질 때 사랑으로 그 진리 안으로 속히 들어오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아버지의 이름이 그 순간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그런즉 그에게 새 창조의 첫 날이

속히 시작된다. 그 첫 날은 다음의 모든 날들과 일체로 있다.

처음 날의 창조가 이루어진 자 둘째 날로 나아간다.

그러나 처음 날이 전부인줄 알고 둘째 날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둘째 날을 맞이할 수 없다.

죄는 여기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둘째 날로 나아오라 하시는데 우리는 말하기를 첫째 날로도

족합니다. 하며 그 첫 날을 움켜쥐고 자기의 의로 삼고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첫째 날에서 일곱째 날에 이르기까지 깨어서 풍성하고 온전하게 지어져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계속 천사를 보내신다.

 

 

*요한

 

요한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란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 창조의 진리 안에 살게하기 위하여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신다.

전에 너희가 하나님의 마음 밖에서 너희 자신을 만들겠다고 행한 모든 것이 죄이지만 그 모든 죄를 용서하였으니

그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라 하신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면전에까지 와서는 우리는 당신의 마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당신의 축복을 받겠습니다.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죄인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까지 와서조차 움켜쥐고 있다.

 

심판과 은혜는 하나다. 심판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 밖에서 복을 받겠다는 그것이 심판되면 그 마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자에게 그의 마음을 닮게 하신다.

하나니ㅣㅁ의 마음 밖에서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는 자는 계속하여 첫째 날에서 일곱째 날까지 나아간다.

첫째 날의 빛이 온 후 둘째 날의 빛을 영접해야 하고 둘째 날의 빛이 온 후 셋째 날의 빛을 영접해야 한다.

이는 일곱째 날까지 하나님의 새 창조는 중단 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빛을 움켜쥐고 거기에 머무를 때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온 처음 빛을 움켜쥐는 순간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오는 나중 빛을 영접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풍성하고 온전하게 창조되는 진리의 길을 버리고 우리 생각을 좇아

우리의 길을 걸으며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그가 본 모든 것을 증거하였다.

 

요한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온전한 하나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안에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케 하면서 둘이 하나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실존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들은 짐승이나 음녀나 거짓 예언자나

그 무리들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붉은 용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보좌에 앉아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실존 안에서 하나다.

누구든지 그 안에 말씀과 증거가 하나가 되어 있지 않고, 그의 이름과 실존이 하나되어 있지 않으면

아직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신실함을 증거한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마음에 품는 자들은 복되다.

이는 그 때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징조의 말씀을 읽는 자(해석하는 자)가 복되다. 이는 그가 징조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어도 그 자신의 영과 생명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이 말씀을 알 수 없는 자는

들을 귀(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이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가 듣고 새 창조의 징조를 마음에 품으면 그 또한 복되다.

복된 자는 누구든지 다시 예언의 말씀을 좇아 복된 자의 실존을 이룬다.

복된 예언의 말씀은 알파요 복된 실존은 오메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다.

 

 

*때( 카이로스)가 가깝다.

 

크로노스는 처음이요, 카이로스는 나중이다.

크로노스는 육신의 때요, 카이로스는 영의 때다.

우리의 첫 사람이 어느 크로노스의 때를 살고 있든지 간에 우리의 둘째 사람은 항상 카이로스를 대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카이로스를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은 카이로스를 크로노스로 바꾼 것이다.

우리의 첫 사람은 항상 크로노스의 시간을 좇아서 살기 때문에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영의 눈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은 가까이 있는 그 카이로스를 보라고 하고 있다.

그 카이로스를 보는 것이 알파요 그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오메가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오고 계신 이로부터, 또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로부터.

 

 

*에클레시아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에클레시아에 대한 대각성이 필요하다.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바꾼 그 모든 지식은 던져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새 창조의 징조를

볼 수 없다. 모든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천둥소리와 목소리를 그들의 귀로 듣고 번개불을 그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록은 새 창조의 계시가 되지 못하고 종말을 이야기하는 점서가 되고 만다.

 

모든 성경에 에클레시아는 '교회'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본질을 잃은지 오래다.

사실 '교회'라는 말 자체는 빗나감의 알파요, 처음이요, 시작이다.

교회란 종교인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아무리 달리 해석하려 한다해도 종교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큰 건물로 있고, 많은 사람이 모이며, 많은 돈이 모이며, 큰 행사를 행하며 큰 조직을 이루고 있어서

겉으로는 누구의 눈에도 감취어 있을 수 없지만 거기엔 영과 생명이 없다.

영과 생명이 빠져버렸으니 육과 생존을 좇아 움직인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전으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실존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관계성이다.

육신의 첫 사람은 큰 건물과 큰 조직과 많은 행사와 많은 돈 등에서 보람을 느끼고 큰 자, 높은 자, 부자,

유명한 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새 창조의 하나님은 작은 마음 속에 거하신다.

오늘날 겉으로 드러난 교회는 사람의 생각(교리)을 좇아서 사람의 길(종교)을 걷고 있는 사람의 모임(종교인들의 모임)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걷는 종교인이 되라 하심이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길을 걷는 그의 아들들의 실존인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 아들들이 하나 되는 생명과 거룩과 사랑의 관계성이다.

에클레시아는 건물도, 그 조직도, 그 활동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에클레시아에게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으로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이들이

종교인(음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그 무리)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심판이요 경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되게 하려 함이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인이 되게 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종교인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날 때 우리는 이름과 실존이 하나 된 에클레시아이다. 

오늘날 교회라 부르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증거 되지 아니하고

종교와 윤리와 도덕과 사회정의와 교리와 기복 등등 첫 사람의 가치와 욕심이 말씀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에클레시아다.

   

 

*오고 계신 분(호 에르코메노스)

 

아버지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언제나 오고 계신 분이다.

'호 에르코메노스'는 장차 오실 분이 아니라 오고 계신 분이다.

야웨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항상 오고 있는 분이다.

존재의 하나님은 전에도 창조의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언제나 오고 계신 하나님은 첫째 날에도 오시고 둘째 날에도 오시고 셋째 날에도 오시고

일곱째 날까지 계속 오신다.

이렇게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으려 하심이다.

존재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으시는 시간은 카이로스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실존으로 드러난다.

예수 말씀하시되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하셨다. 그는 전에도 부활과 생명이요, 오늘도 부활과 생명이며

언제나 부활과 생명으로 오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과 생명으 증거로 오신다.

그는 크로노스의 미래에 부활과 생명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카이로스의 부활과 생명으로 오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하여 역사하신다. 그가 하나님의 일곱 날을 좇아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곱 영으로 계시되었다.

은혜의 성령, 영광의 성령, 진리의 성령, 성결의 성령, 생명의 성령, 약속의 성령, 영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

부활과 생명의 실존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5. 또 신실하신 증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요, 땅의 왕들의 근원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화평이 있기를 바란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셨고  

 

* 호 마르투스 호 피스토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충만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증인이시며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된 그의 믿음 안에서 부활의 실존을 이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는 부활의 실존이 될 수 없다.

이는 자기의 믿음으로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되면 그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부활에 동참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믿음을 좇아서 크로노스의 미래에 부활할 것을 소망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오늘의 부활에 대하여는 알지도 못하며 그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으면 살겠다." 하신 생명과 사망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오늘 여기서의 죽음과 부활이다.

 

자기 믿음은 알파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오메가다. 오메가의 믿음에 동참한 자마다 오늘 여기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실존을 이룬다. 그는 부활한 그 실존으로 몸의 구속을 바라본다.

알파가 없으면 오메가도 없다. 부활의 씨를 뿌린 자만이 부활의 열매를 거둔다.

이 일은 아무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이 일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어린양의 믿음이 우리 안에 계시되어 우리의 믿음이 되고, 그의 부활의 증거가 우리의 증거가 될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 믿음의 알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오메가로 옮기였다.

 

 

*땅들의 근원자(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예수 그리스도는 '땅위 모든 왕들의 지배자'(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가 아니다.

그는 '땅위 모든 왕들이 본받아야 할 근원자'이시다. 그는 진리의 왕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왕들은 그의 진리를

본받아야 한다. 그의 진리를 본받기 위하여서는 모든 왕들은 그의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세상의 왕들은 군림하지만(reign over) 그는 우리 안에서 다스리신다(reign in).   

그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그가 진리로서 섬기기 때문이다.

계시록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세상의 군림 자(붉은 용)

로 영접한 자이다. 붉은 용은 예수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온다.

진리의 왕인 예수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과 욕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목마르게 부르는 그가 짐승이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아니하고 짐승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은 모두 헛되다.

이는 남을 가리켜 짐승이라 부르는 그 역시 짐승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서로를 잘 알아보고 더 높은 군림의 권세를 두고 다툰다. 

 

 

*사랑과 피 흘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해방하셨다.

사랑은 알파요 피 흘림은 오메가다. 사랑과 피 흘림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은 그의 형제들에게도 사랑과 피 흘림의 실존이 되게 한다.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는 자들은

예수의 사랑도 그의 피흘림도 모르는 짐승이요, 음녀요, 거짓 예언자요, 그들에게 속한 무리일 뿐이다.

우리의 피흘림은 예수의 피 흘림을 본받은 오메가이다.

그 오메가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다.

우리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처음이요, 나중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

(죄 지은 자)를 해방하는 것이다.

처음은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나중은 우리 하나님을 향해 가는 대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

 

우리의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죄 안에 머물게 된다.

우리의 죄란  하나님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요,

악이란 하나님의 마음 밖에서 선악판단을 행하며 인간의 가치를 좇아 자기를 세우려는 것이다.

세상에 허다한 죄와 악이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있는데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자는 하나님이 자기 모양과 같이 그를 새롭게 지으신다.

죄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밖에 있음이요, 악이란 그의 마음 밖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으려는 그 모든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풍성하고 온전하게 지으려 하신다.

사람들은 인간의 선악 판단을 좇아서 생겨난 인간의 가치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말씀은 종교와 도덕과 윤리와 사회정의와 권세와 기복 등등의 인간 가치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첫 사람의 세상에 필요한 첫 사람의 가치일 뿐이다.

하나님의 새창조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의 생명과 거룩과 사랑으로

새 사람을 지으려 함이다.

 

 

 

6. 우리를 그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아멘

 

 

*토 데오(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왕과 제사장으로 삼기 위함이다.

우리의 왕 됨과 제사장 됨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우리 자신을 제물로 삼는 제사장이 된다.

다음은 우리가 형제의 마음 안에서 다스리는 왕이 되고, 형제를 위하여 섬기는 제사장이 된다.

야웨의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왕이요 제사장이며,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에서 우리는 형제 안에 있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왕은 그들 안에서 다스리며 제사장은 그들을 섬긴다.

 

 

*영광과 능력을 그에게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그는 우리에게 왕과 제사장의 영광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실존이요 소유물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왕 된 것과 제사장이 된 것을 소유로 움켜쥐는 순간

짐승이 되고 만다.

솔로몬이 짐승의 원형이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세세토록 (into the ages of the ages, 영원토록)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시다.

알파와 처음과 시작은 크로노스요, 오메가와 나중과 끝은 카이로스다.

 

세세토록은 크로노스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생존에서 카이로스의 생명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시와 시간과 일하심의 총체다.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항상 계신다. 첫 창조도 그가 행하셨고 새 창조도 그가 행하신다.

그는 처음의 세대에도 계시고 나중의 세대에도 계신다.

그는 첫 사람의 때에도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셨고 나중 사람의 때에도 함께 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과 하나 됨의 실존이지

영존이 아니다.

 

 

 

7. 보라, 그가 구름과 함께 오신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아멘 

 

 

*구름과 함께

 

구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구름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너무 심각하다.

기록된 바, 이 말씀을 마치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 11) 하였다.

또기록되기를,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화평이 있으라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요 20: 19 -20)   

 

징조와 실상을 잘 분별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징조를 실상으로 움켜쥐고 미혹에 빠져든다.

구름은 부활하신 예수의 영적실상을 징조하고 있다.

구름에 가리운 예수의 승천은 모든 사람에게 그의 하늘에 속한 초월의 실존을 징조를 통하여 보이고 있다.

징조가 주어지는 것은 육신의 눈에는 영적실상이 보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구름의 징조없이 예수가 보이지 않게 하늘에 오르셨다면 아무도 그 일을 알 수 없고 증거할 수도 없다.

부활의 실존에게는 구름이란 이동수단이 필요 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구름이 나타난 것인가? 이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한계성 때문이다.

생존의 첫 사람에게 둘째 사람의 실상을 계시하는 징조가 구름이다.

이렇게 징조가 되어 있는 그 구름을 실상으로 붙잡은 자들은 구름타고 하늘로 오르는 줄 알고 그것을 휴거라 부르며

거기에 매여 달려있다.

말씀의 계시는 늘 징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징조(세메이온)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의 기사(타라타)가 된다. 징조는 이렇게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나눈다.

이와같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는 심판된다.

만약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우리의 육신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 부활의 실상이라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을 날고 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기도 하며

열기구를 타고 창공을 날기도 하며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공간을 날기도 한다.

또 이런 기구 없이 새들은 이미 창조될 때부터 하늘을 날고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 부활의 실상은 우리의 영적 초월성이다. 새 창조다.

오늘 여기서 이루어지는 부활의 실존은 비록 우리의 육신은 땅위에 있을지라도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앉히웠다.

구름에 가린 예수의 승천은 이 영적 초월성을 증거하는 징조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이다. 부활의 실존 가운데 있는 그는 이미 하늘에 올리웠다.

 

 

*메타 톤 네웰론( 구름과 함께)

 

번역 성경들 중에는 '메타 톤 네휠론'을 '구름과 함께'로 번역한 것과 '구름을 타고'로 번역한 것으로 나뉘어 있다.

'구름을 타고'는 구름을 이동수단으로 오해한 것이다. 메타는 함께(with)이다.

그러면 구름과 함께 오시는 예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구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실존을 이룬 허다한 증인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가진 이들이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오신다.

우리 안에 부활의 실존이 이루어지면 노아도, 아브라함도,다윗도, 이사야도, 요한도, 베드로도, 바울도, 구름 같은 증인으로 예수와 함께 와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초월성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면 그와 하나 되어있는 그 증인들이 모두 내 안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기록된 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름과 함께'를 '구름을 타고'라 읽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탐심이나 교리를 좇아서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을 새들이나 자신들이 만든 기구 아래 두고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기 함정에 빠져든다.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은 알파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오메가다. 우리의 실존은 오메가에 달려있다.  

 

 

*그를 찌른 자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로마 군병이 그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기록을 보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 사도는 여기서 그 군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 군병의 행위는 우리 모두의 행위를 징조하고 있다. 우리 모두 죄악의 창으로 그를 찔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창으로 찔렀을지라도 그의 죄 사함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런즉 그 안에 들어온 자들은 그의 오심을 기뻐할 것이요, 밖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를 애곡하게 될 것이다.

 

 

*이두, 이에르케타이(보라, 그가 오신다.)

 

'에르케타이'는 그가 지금 오고 있음을 말한다. 그의 오심은 크로노스의 미래가 아니다.

카이로스의 오늘에 항상 우리에게 오고 계신다.

요한은 오고 계신 그 분을 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그가 오실 것으로 알고 그 날을 점치고 있다.

우리가 요한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오고 있는 그 분을 본다면 그의 예언은 오늘 여기서 속히 될 일이다.

 

 

8.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오고 있는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신다.

 

 

*호 에르코메노스(오고 계신 자)

 

'호 에르코메노스'는 '오실 자'가 아니라 오고 계신 자'다.

하나님은 한번 오셨다가 지나가 버리는 분이 아니며 또 미래에 오실 분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계속 새로움으로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카이로스는 항상 가까이 있다.

 

 

9. 당신들의 형제이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파트모스라 하는 섬에 있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

그의 환난이 나의 환난이요, 그의 나라가 나의 나라요, 그의 참음이 나의 참음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의 유월절에 동참하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해오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의 오순절에 동참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의 초막절에 동참한다.

새 창조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에클레시아 안에 이루어진다.

 

 

10.나는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고 나는 내 뒤에서 울려오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요한 사도는 로마의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파트모스에 유배된 것이다.

그가 유배된 것은 기독교를 위한 것도, 자기교리를 위한 것도, 사회정의를 위한 것도, 권세를 위한 것도,

인간의 그 무슨 가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아닌 것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세상 사람에게 넘겨주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과 어린 양의 증거를 드러내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들려오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날이 주의 날이다. 주의 날은 가까이 있다. 

 

 

 

11.그 음성은 "너 보는 것을 책으로 써라. 에페소와 스뮈르니와 퍼가모와 뒤아테이라와 사르데이스와 필라델페이아와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그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보내라"하였다.

 

 

일곱 에클레시아들에게 편지가 보내진 순서를 좇아 선을 그어보면 로마(Rome)의 알(R)자의 모양이 된다.

로마는 부활의 실존인 에클레시아가 그 생명의 말씀(레마)을 비추어야 할 세상이다.

여기서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징조는 무엇인가? 말씀(레마)도 알(R)이요, 종교(Religion)도 R이요,

로마(Rome)도 R이다. 말씀과 종교와 세상권세 가운데 요한이 증인으로서 거기에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의 종교와 세상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다.

 

요한이 여기서 증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길을 좇아서

짐승과 음녀와 거짓예언자와 그들에게 속한 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 징조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레마(말씀)을 받은 자들 안에

예수가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세상의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면

그들은 짐승이 되거나, 음녀가 되거나, 거짓예언자가 되거나, 그들을 좇는 무리에 속하고 만다.

이것은 깨어있지 않은 자에게 일어나는 두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읽으며 짐승과 거짓예언자와 음녀와 그 무리가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나'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이 예언을 좇아서

눈으로 너희 자신을 보고, 귀로 너희 자신을 들으며, 마음으로 너희 자신을 살피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벗어나면 어린양의 신부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짐승이나 음녀나 거짓 예언자나 또는 그들을 좇는 무리가 된다는 것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R자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점은 창조의 일곱 날이며, 성령의 일곱 역사이며

어린 양의 일곱 뿔이며, 인자의 일곱 기도이며, 에클레시아의 일곱 실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곱 점은 붉은 용과 짐승의 일곱 머리이며, 음녀가 앉은 일곱 산이다.

붉은 용과 짐승과 음녀는 제 것은 없고 언제나 하나님이 청하는 일을 흉내 내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 일곱 에클레시아가 처하여 있던 세상은 그들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처해있던 상황은 전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새 것이 아니다.

해 아래서 사람들이 처한 그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나 처음 창조에 속한 것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아담 때의 상황이건, 아브라함 때의 상황이건, 이사야 때의 상황이건, 요한 때의 상황이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자녀에게 변함없이 새 창조를 위한 징조가 되고 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새 창조를 위한 징조다.

 

 

*야웨의 길과 우리 하나님을 향한 큰 길

야웨의 길과 우리 하나님을 향한 큰 길은 이사야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두 길이다.

야웨의 길은 알파요 우리 하나님을 향한 대로는 오메가다.

인자의 기도에도 이 두 길이 분명히 게시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여 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알파의 길, 곧 야웨의 길이다.

오메가의 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함 받으며, 우리가 시험에 빠져들지 않으며 악에서 구함을 받는 일이다.

알파는 각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이루는 일이요, 오메가는 그 실존들이 함께 우리 하나님을 향해 걸으며

하나되는 일이다. 두 길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면 인자의 길이다.

일곱 점으로 이루어진 인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의 길이다.

앞의 세 점은 알파의 길이요, 뒤의 세 점은 오메가의 길이다. 마지막 점은 알파와 오메가를 온전히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의다.

 

두 길을 율법을 좇아서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알파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오메가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와 같이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알파는 오메가를 위하여 있고 오메가는 알파를 온전케 하면서 하나를 이룬다. 

둘이 하나되지 않는 것은 인자의 길이 아니며 새 창조의 길이 아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되고, 처음과 나중이 하나되고, 시작과 끝이 하나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하나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의가 하나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하나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의가 하나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하나되고, 영과 생명이 하나된다.

 

 

 

12. 나는 나에게 말함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다. 그때에 일곱 금 촛대와

13.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고

 

 

*금 촛대는 순결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에클레시아를 징조하고 있다.

 

* 인자와 인자같은 이

 

이사야의 토기장이 비유는 인자와 인자같은 이의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토기장이는 흙에 퍼다가 고운 흙가루를 만든다. 그 음 그는 그 마음의 형상을 좇아 그릇을 빚는다.

그 후 그것을 그늘에 말린다. 그 다음에 그 그릇의 형체를 불가마에 넣어서 알맞는 온도로 굽는다.

보라! 불가마에 구워진 그릇은 첫 형상 그대로이지만 그 그릇의 질은 처음 것으로부터 온전히 바뀌었다.

불가마 안에서 온전히 새 것이 되었다. '인자같은 이는 죽었다가 살아난 '인자'다.

그릇의 질은 처음 것으로부터 온전히 바뀌었다. 불가마 안에서 온전히 새 것이 되었다.

'인자같은 이는 죽었다가 살아난 '인자'다. 인자같은 인자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셨지만 이제 인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인자들이 본받아야 할 인자같은 이'가 되셨다.

부활의 실존은 일곱째 날에 인자같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다.

에클레시아가 인자가 되는 것은 알파요, 그 인자가 인자 같은 이가 되는 것은 오메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인자가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 인자들을 영과 생명 안에서

인자같은 이가 되게 한다.

 

*그가 입으신 발에 끌리는 옷은 그가 하나님의 길에서 이루신 풍성하고 온전한 의요,

가슴에 띤 금띠는 그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가지신 순결하고 변함없는 믿음이다.

그 안에서 의와 믿음은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그의 믿음과 의를 본받게 하시는 징조다.

 

 

 

14. 그 머리와 머리카락은 흰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인자같은 이의 지혜와 지식은 순결하며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양털은 따뜻하고 눈은 찬 것이 그의 지혜와 지식은 죄인에 대하여 따뜻하지만 그 죄에 대하여는 차갑다.

또한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눈같이 차고 아버지에 대하여는 따뜻하다.

그는 눈같이 찬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세상을 이기셨고

양털같이 따뜻한 그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길을 나설 때

그의 손에 칼과 불을 들었던 것과 같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길을 불 칼로 지키심과 같다.

 

인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눈같이 차고 하나님께 대하여 양털같이 따뜻한 존재다.

그러나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고 있을지라도 세상에 대하여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자같은 이는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뜻과 생각을 살피신다.

그의 불꽃같은 눈에 드러나지 아니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불꽃같은 눈에 드러난 자신을 보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놋쇠 같았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와 같으며

 

 

*빛난 놋쇠 같은 그의 발은 그의 원수들을 이기시고 발등상으로 삼으실 징조다.

많은 물들의 소리같은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세상을 이기고

그와 하나된 많은 사람들의 풍성한 생명의 소리다.

 

 

 

16. 그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었으며 그의 입에서는 양쪽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의 얼굴은 해가 강렬히 비취는 것 같았다.

 

 

*인자같은 이는 그의 오른손, 곧 그의 의로운 능력의 손에 일곱별을 가지고 계신다.

이 별들은 엑클레시아 안에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일곱 날의 의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곱 실존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양쪽에 날선 검은 인생들의 생각을 베고, 또 그들의 길을 베신다.

이 검은 사람의 에고비젼과 자기 마음을 철폐하는 심판과 의의 검이다.

인생들은 첫 사람의 육신의 소욕을 좇아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 생각과 자기 길을 좇아서

좌우와 동서와 남북과 위아래로 나뉘어 서로 자기가 옳다며 싸우고 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에 심판되지 아니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해가 강렬하게 비취는 것같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과 사라의 빛을 풍성하고 온전하게 비추신다.

 

 

 

17. 내가 그를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것같이 되었다. 그가 그의 오른손을 내 위에 얹고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며 나중이며,

 

 

*요한은 인자같은 이를 보게 되자 그의 권세와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자같이 되었다. 인자가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인자같은 이가 되셨다. 요한은 산자 앞에서 죽은 자같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육신은 산 자 앞에서 죽은 자 임을 징조하고 있다.

에클레시아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사는 것은 알파의 부활 곧 인자됨이요,

인자가 인자같은 이의 영광에 이르는 것은 오메가다.

인자같은 이는 그의 권능의 손을, 죽은 자같이 된 요한에게 얹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하셨다.

인자같은 이는 누구인가? 그는 원래 요한이 잘 알던 그 처음 인자다.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인자는 알파요 인자같은 이는 오메가이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인자인 요한에게 인자같은 이의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요한은 잠시 어두움을 맞이했으나 영원한 빛으로 살아났다. 우리는 여기서 이 징조를 보아야 한다.

 

 

*사망과 음부

 

사망은 무엇이며 음부는 또한 무엇인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먹고 죽었다. 물론 그 육신은 살아있었다.

그러면 죽은 것은 무엇인가. 영과 생명의 속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지어져야 할 둘째 사람이 죽었다.

육신의 죽음은 속 사람의 죽음을 깨닫게 하는 징조다.

요한계시록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계시하고 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불리운 자가 자기의 욕심을 좇아 그의 마음을 떠나면 그것이 첫 번째 사망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나면 둘째 사망도? 없다.

사람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좇아 살고 있는 그것이 첫째 사망이다. 그 죽었던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던 육체와 정과 욕심을 못 박으면 영과 생명으로 살아난다.

이것이 오늘 여기서 일어나는 부활이다. 우리의 부활은 알파요, 생명은 오메가다.

"나를 믿는 자는 죽으면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였다.

알파의 믿음은 예수 안에서 죽고 사는 것이요, 오메가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되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이 왔는데 그 복음은 말하기를 먼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식물인간이 될 것인데 무슨 수로 사느냐 하며

인간의 생각과 길을 고집한다.

계시의 말씀은 네가 죽으면 살리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라 하신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다.

사람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영과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말씀이 알파요,

오메가는 생명의 말씀을 좇아 그가 죽고 다시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예수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가 부활의 실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믿음을 좇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음부에 처해있다.

인자같은 이가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것은 네가 죽으면 살리라 하신 그 말씀을 믿고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살리려 함이요, 

또 그가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것은

자기 생각과 자기 믿음을 좇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그 자신의 음부에서 놓아주려 하심이다.

음부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 안에 만들어 가진 감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자기 믿음의 음부에 갇힌 자를 놓아 주신다.

자기 믿음을 버리고 오늘 여기서 부활하는 그의 부활의 믿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하늘나라의 열쇠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주신다 하였다.

베드로에게 주신 열쇠들은 그를 비롯한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주신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에클레시아를 이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하셨다.

즉 반석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자 위에 반석의 실존을 세우시겠다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에클레시아 위에 왕이나 권세자나 무슨 조직을 두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클레시아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시고 원하는 자마다 거기서 해방하신다.

거기서 풀려난 이들은 반석같은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가지고 자신을 성령의 전으로 거룩하게 세운다.

성령의 전이된 그 실존은 땅에서 매이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

에클레시아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맬 것은 매고, 풀 것은 푸는 인자들의 실존이다.

 

 

 

19. 그러므로 네 본 것들과 이제 있는 일들과 이 일을 좇아서 될 일들을 기록하라.

 

 

*메타 타우타( 이 일들을 좇아서)

 

*메타 타우타'는 단순히 일의 선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의 관계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선후를 바꾸어 일어나지 아니한다.

창조의 일곱 날을 좇아서 알파가 있은 후에 오메가가 있으며 처음이 있은 후 나중이 있으며

시작이 있은 후 끝이 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사람들은 자신의 새로움은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려 하며 알파의 부활없이 오메가의 부활에 참여하려 한다.

은혜는 처음이요 진리는 나중이며, 심판은 처음이요 의는 나중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이요 에클레시아의 실존은 나중이다.

 

 

 

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이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에클레시아다.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

 

'현대인의 성경'은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을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번역하는 터무니없는 일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종교인들의 모임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

천사들을 '지도자들'이라 번역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혼잡스럽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