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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됨'은 무엇인가?

 

                                          조도재

 

 

* 하나님의 기쁘신 뜻

 

'나의 나 됨'은 종교적 명제도 철학적 명제도 도덕적 명제도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상관없이 '나의 나 됨'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다.

때문에 그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나의 나 됨'이 하늘에 속한 것이냐 땅에 속한 것이냐가 문제이다.

참 '나의 나 됨'은 야웨 하나님께 낳아진 참 사람 됨이요,

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람의 신 됨(하나님의 아들 됨)이다.

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람의 신 됨(하나님의 아들 됨)이다.

이것은 사람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며 예정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푯대이다.

 

웨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에예 아세르 에예'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헬라어 70인 번역 성경은 '에고 에이미 호 온'이라 하였고 KJV 번역은 'I am that I am'이라 하였다. 

즉 '에예 아세르 에예'란 '나는 나다' 또는 '나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종교가나 도덕가나 윤리가나 철학가나 그 누구의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각 사람 안에서 '나의 나 됨'을 이루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에게 네가 쉰 살이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할 때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에고 에이미, 요 8" 56)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낳기 전부터 있는 그 '나'는 야웨다. 말씀은 야웨의 마음 안에 있어 왔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가 '인자'( 그 사람의 그 아들)이다. '인자'란 야웨가 그 사람 안에 낳으신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참 사람이요 참 신이다.

그 신은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낳으신 아들이므로 그 사람은 그 아들의 모태다.

즉 사람의 겉 마음 너머의 속 마음은 어머니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모양)을 낳고 있다.

그 어머니는 곧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그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그의 모양으로 아들을 낳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영원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양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모양도 영원부터 있으며, 지금도 있으며, 오고 있다.

인자의 '나'는 영원부터 있어 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 나기 전부터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속에 낳아진 하나님의 모양(신성)으로 '나의 나 됨'을 이룬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 속에 있다. 

 

 사람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때부터다. 그러나 사람에게 부여된 그 형상은 영원부터 있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영원부터 있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 되었으므로 그 근원은 영원하다.

사람이 영생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 영원한 형상 떄문이다.

그러면 왜 사람은 영생을 사모하면서도 영원히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양(신성)이 그에게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그의 형상 안에서 그의 모양이 이루어지기 원하신다.

그것이 새 창조다.

사람이 야웨 하나님의 새 창조를 좇아서 그의 모양을 이룰 때 너는 참으로 내 아들이며

너는 나와 하나다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나의 나 됨'을 이룬 존재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상 안에 그의 영원한 모양을 이룬 자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영생을 가졌다.

육신이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존하겠다는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부활의 실존이 된 자라야 인자이며 영생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내 안에서 믿는 자는 죽어 있어도 살겠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였다.

 

오늘 여기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가 살아나는 것은 '혼'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아니하고 땅을 향하여 사는 자는 그 육신은 살아 있으나 그 혼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

사람의 그 혼이 먼저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산 혼의 실존'(렌페쉬 하야)이 되어야 마침내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자'로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형제라 부른 것은 그들이 거듭난 '인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인자는 신이며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들 또한 신들이며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루어진 그들을 신들(데우스)이라 하였다' (요 10" 35) 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알파요, 그 말씀의 실존을 이루는 것은 오메가이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종교의 어떤 교리도 가르침도 아니다. 그 말씀은 '나의 나 됨'과 '인자 됨'과 '신 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나의 나 됨'을 믿는 자들의 경이로운 믿음을 통하여 그들이 그의 아들들이 되도록 선택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이 되도록 선택되는 것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때문에 부르심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받는 자는 적다.

 

 

 

* 나의 나 됨'의 역설

 

성경을 읽는 이들이 선악지식에 갇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나의 나 됨'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방황하며 사람의 종교나, 철학이나 수양이나 그 무엇을 통하여 '나의 나 됨'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역설적 현상이다.

야웨 밖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나의 나 됨'을 이루려고 애써 왔고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나의 나 됨'을 알지도 못하였으니 어느 누구도 야웨로 말미암는 '나의 나 됨'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아브라함 전부터 있노라'하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인자 됨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다.

 

오늘날 '유앙겔리온' (호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우리에게는 복음이란 말로 전해져 있어서

우리는 이중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누구든지 복음으로 불리는 선악지식에 빠져들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좋음(토브)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음 속에서 방황할 뿐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좋다 (토브) 하시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다(토브)'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육신에 유리한 것을 선이라 부르며 선을 원하고 육신에 불리한 것을 악이라 부르며 악을 징치하고자 한다.

복음이란 것도 선악지식을 좇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종의 선이다.

하나님은 흑암에 빛을 비추시고 그 빛을 보시고 '좋다(토브)' 하셨다.

그리고 그 빛을 낮(욤)이라 하시고 그 흑암을 밤(라엘라)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첫 창조의 일곱 날들을 좇아서 흑암에 빛을 비추시고, 혼돈에 질서를 주시고, 공허를 충만케 하시고,

깊음에 초월이 일어나게 하시면서 '좋다'하셨다.

그런즉 하나님께 좋은 것이 욤(낮)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좋다(토브) 하시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다(토브)'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육신에 유리한 것을 선이라 부르며

선을 원하고 육신에 불리한 것을 악이라 부르며 악을 징치하고자 한다.

복음이라는 것도 선악지식을 좇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종의 선이다.

하나님은 흑암에 빛을 비추시고 그 빛을 보시고 '좋다(토브)' 하셨다. 그리고 그 빛을 낮(욤)이라 하시고 그

흑암을 욤(낮)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선악지식을 좇는 그것이 밤이기 때문에 그것을 '좋다' 하지 않으신다. 그것들은 다만 육신의 첫 사람이 알파의 크로노스 때에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둘째 사람이 오메가의 카이로스에서 구할 것은 거룩한 빛이요, 생명의 충만이요, 사랑의 질서요,

영의 초월이다. 

 

장남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함과 같이 오늘날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 바꾸어 부르면서

인도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에게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함께 멸망의구덩이에 빠져들고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빛이 비취는 낮이 오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언제나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밤에 속한 첫 사람의 '복 소리'인 까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들이 위로부터 둘째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첫 사람의 복을 둘재 사람의 하나님 나라에서 구하고 있으니 그것이 그들이 가진 자기 믿음의 비극이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너희는 야웨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찾는 것은 야웨가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선악지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예수를 믿고 받는 복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신이 정욕 때문에 들어도 듣지 못하고, 안목의 정욕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이생의 자랑 때문에

마음은 생각해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버리고 그가 부르시는 소리마저 듣지 못하는 벌레처럼 되었다.

 

 

 

* 낮(욤)과 밤(라엘라)

 

창세기 1장 5절에 '하나님은 그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그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빛으로 알고 있는 그 복음은 어두움이니 그들은 밤에 속해 있어서 무엇이 좋은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육신의 크로노스를 좇아서 100년을 살았다 한들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는 한 낮을 이루지 못했다.

낮을 맞이해야 할 그들은 여전히 밤 속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속에 있다.

사람들이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속에 처하여 있을 때 야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들려지는 소리가 

'유앙겔리온'이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것이 '유앙겔리온'이 되지 않고

흑암에 흑암을 일으키고, 혼돈에 혼돈을 일으키며, 공허에 공허를 일으키며, 깊음 속에서 더욱 방황케 하는 선악지식일 뿐이니 이것이 오늘날 이 세대가 처한 비극이다.

야웨 하나님은 육신의 생존 속에서 헤매는 자에게 생명으로, 육신의 욕심 속에서 헤매는 자에게 사랑으로,

육신의 자랑 속에 헤매는 자에게 거룩으로, 육신의 시공 속에 갇힌 자에게 영의 초월을 일으키는 새 창조를 행하신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때가 낮이므로 그는 '나의 나 됨'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육과 영이 하나됨

 

많은 사람들이 육신을 악한 것으로 여기고 구원되는 것은 영이니 육신은 아무래도 좋다는 선악지식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육신이 왜 악한 것이 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육신의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푯대에서 빗나가고 잃어졌을 뿐이다.

잃어진 자들을 다시 찾아 하나님의 모양을 이루는 것이 '호음'이다.

야웨 하나님은 잃어진 자를 찾아서 그 육신의 '나' 안에 속 사람인 영의 '나'를 낳으시어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푯대 곧 나의 인자 됨이요, 나의 나 됨이요, 나의 신 됨이다.

그럴 때에 과거에 우리가 선악지식을 좇아서 바라보던 모든 신은 우상임을 안다.

 

우상은 나를 나 되게 하지 못하고 다만 내 위에서 군림하며 이렇게 하면 복을 내리고 저렇게 하면 화를 내리겠다 하며

제물과 봉사와 헌금과 기도와 헌신과 순교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됨'을 이룬 자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다스리고, 속 사람은 제사장이 되고 겉 사람은 제물이 되며,

속 사람은 예언자가 되고, 겉 사람은 그 예언을 듣는 자가 되고, 마침내 그 둘은 온전한 하나가 되어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육신을 초월한다.

 

'나의 나 됨'은 야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초월의 의력(디카이오쉬네)를

좇아서 사는 실존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 외에는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는 어떤 우상도, 짐승도, 사탄도, 거짓 예언자도, 종주도 그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근원 안에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시고 또 그 땅을 새롭게 지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나'이신 하나님이 육신에 속한 각 사람의 '나' 안에 영의 '나'를 낳으시어 둘이 하나 되게 하시고자

행하신 알파의 일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 있는 모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양식으로 주셨고

모든 짐승들과 새와 땅에 기는 것들에게는 모든 푸른 풀(예레크 에세브)을 양식으로 주셨다.

그것은 징조다. '나의 나 됨'을 향하여 가는 자는 크로노스에서 푸른 풀(예레크 에세브)을 먹던 시기에서

카이로스로 옮겨 와서 씨 맺는 채소와 씨가 있는 열매 맺는 과목을 먹으며 거기서 나오는 영과 생명의 씨를

그의 마음 잩에 뿌려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신 됨의 은혜'(카리티 데 데우 에이미 호 에이미)  (고전 15" 10) 하였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나의 나 됨'을 이루는 신 됨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으로 유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첫 사람의 신관이 위로부터 거듭나댜 한다.

첫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는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약속이 바라진 경이로운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그 일을 이루시며 '좋다'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하시는 그 좋은 것(욤, 낮)으로 거듭나댜 한다.

위로부터 난 자 안에서 비로소 밤(라엘라)과 낮(욤)이 하나인 날(욤)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