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조도재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려워하고 받기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기독교(종교) 교리의 초보인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모르거나 의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면 반드시 해야 하고 또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아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지어낸 우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겐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처럼 공허한 말이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그 하나님을 보게 하지도, 듣게 하지도, 깨닫게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그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편재설을 선악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편재설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말씀이 있다.

기록된 바,  '그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시니 손으로 지은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신다" (행17" 24)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그가 거하도록 사람들이 그들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거하셔야

하는데 거기에 거하지 아니하신다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의 손으로 큰 집을 짓고서 교회다 성당이다 하면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공허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주이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시면 어디에 계시는가?

이사야는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존하며 높임을 받으시며 영원히 거하시며 그 이름이 거룩하신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높고 거룩한데 거하며 통회하고 낮아진 영과 함께 거하나니 

이는 낮아진 자들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 15) 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라' 하였다.

또 기록되었으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 19) 하였다.

요한은 이 말씀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자기 몸의 그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다' (요 2" 21) 하였다.

또 기록되었으되 "너희의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우리의 겉 마음(카르디아) 너머의 속 마음(누스)에 계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신 줄 오해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져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실상을 보게 하는 징조다. 사람에겐 겉 마음과 속 마음이 있다. 속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다.

속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다. 그 지성소는 육신의 휘장으로 가려져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그 지성소에 계실지라도 육신의 휘장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어서 하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으로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휘장을 찢을 때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그 길을 버리고 밖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기록된 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니 하나님을 볼(호라오) 것이요"하였다.

청결한 마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선악지식을 찢은(할례한) 그 마음이다.

육신의 정욕은 들어도 듣지 못하는 공허를 일으키고, 안목의 정욕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으로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휘장을 찢을 때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그 길을 버리고 밖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기록된 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니 하나님을 볼(호라오) 것이요"

청결한 마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선악지식을 찢은(할례한) 그 마음이다.

육신의 정욕은 들어도 듣지 못하는 공허를 일으키고, 안목의 정욕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흑암을 일으키고,

이생의 자랑은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는 혼돈을 일으킨다.

선악지식은 사람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음 속에서 무저갱에 빠져들게 한다.

때문에 그것들을 그대로 둔 채 만나는 하나님은 우상이다.

 

하나님이 계신 높고 거룩한 곳이 어디인가? 시공에 갇힌 사람들은 저 높은 우주 공간 어디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들어도 듣지 못한 것이다.

높고 거룩한 곳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할례한 사람의 마음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흰 구름처럼 된 증인들의 청결한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과 생명의 눈으로 '호라오'하게 하기 위하여

통회하는 자들과 낮아진 자들과 함께 거하신다.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이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할례하기 원하는 자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선악지식으로 높아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버리고 낮아져서 생명의 말씀 안으로 들어올 때

그들의 영은 낮아져 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

 

하늘들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하늘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 모든 사람들의 마음(카르디아) 너머의 마음(누스) 안에

계신다. 어느 누가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은 높고 거룩한 하늘이 되어 있거나,

높고 거룩한 하늘을 바라보벼 통회하는(애통하는) 마음과 낮아진 영으로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늘들'이란 하나님의 아들들 각자의 마음이 하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수의 하늘들에 계신다.

천국도 '하늘들의 나라'이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안으로 들어와서 그 하늘과 하나 되는 하늘들의 나라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반드시 헐려야 할 집이다.

왜냐하면 그 곳엔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실 성전을 짓는다며 눈물을 쏟으며 피와 땀을 흘리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성전이라 부르는 집을 지어 놓고는 정작 성전인 자기 마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선악지식에 빼앗기고 아버지 대신 짐승(우상)을 섬기고 있다.

그들의 육신은 땅을 향해 부요하게, 강하게, 크게, 높게, 살지만 그 혼은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참으로 놀라운 부자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비록 땅 위에서 크로노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소유하고 권세를 부리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유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나 됨'을 이루는 아들들의 아버지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초월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자마다 거룩한 영의 전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로마서 1장 20절의 기록을 보면,

"세상의 창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데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라"하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는 징조이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을 먼저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이 도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직접 계시되시기 때문이다.

그가 만물을 지으셨으니 그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으므로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잘 가리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위로부터 물과 영으로 난 사람은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

때문에 그는 존재적으로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알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 비록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데 성전이라 부르는 곳에 가서 찬송하며 헌금하며 봉사하며 기도할지라도

그 안에ㅔ 있는 것은 우상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 가겠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이 천국인데 그 천국을 알지 못하니 그는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우상이 있을 뿐이다.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다. 야웨는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 호 온)'하셨고

'나는 전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오고 있는 자(호 엔, 호 온, 호 에르코메노스)'라 하신다.

야웨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육신의 '나' 안에 영의 '나'를 낳으시어 둘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하신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성전 됨이며, 거듭남이며, 인자 됨이며, 그의 마음을 닮음이다.

아버지 하나님께 낳아진 '나의 나 됨'을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야웨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하신다.

그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에게는 야웨 하나님이 없다. 그는 그가 만든 우상을 좇아서 살 뿐이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사람의 마음(누스) 안에 계시며, 통회하는 마음과 영과 함께 계시며,

사람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 약육강식하는 사자 속에, 피 흘리는 곰 속에, 먹을거리를 덮치기에 신속한 표범 속에,

두렵고 거칠고 강한 짐승 속에 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좇아가는 것은 사자 속에 있는 것이요, 안목의 정욕을 좇아가는 것은 곰 속에 있는 것이요,

육신의 정욕을 좇아가는 것은 표범 속에 있는 것이요,

선악지식을 좇아서 사자(머리의 우상)와 곰(가슴의 우상)과 표범(배의 우상)을 함께 가진 자는

두렵고 거칠고 강한 짐승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육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를 성전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사자가 되게 하고 곰이 되게 하고, 표범이 되게 하고 두렵고 거칠고 강한 짐승이 되게 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사자와 곰과 표범과 두렵고 사납고 강한 짐승이 되어 있으니

하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해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즉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 보라'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그를 세상 임금으로 삼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부인 우리가 신랑을 신랑으로 알지 못하니 그는 우리의 남편이 되실 수 없고

아버지는 우리를 아들들이라 부르시는데 우리는 그 아버지를 알지 못하니 사생자와 같다.

기록된 바, "사람이 거듭나지(겐나오 아노덴, 하늘(하나님)로부터 낳아진) 아니하면 하나님의 그 나라를 볼 수 없다"하였다.  위로부터 물과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자가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위로부터 난 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 자)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고,

자기가 자기를 제물로 삼는 제사장이 되고,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 되는 삶을 사는 예언자가 되고,

마침내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된다.

요한 계시록의 네 생물이 이를 징조하고 있다. 

 

 

아버지와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 영을 향하여 가난한 자가 있는 거기이며

애통하는 자가 있는 거기이며

온유한 자가 있는 거기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있는 거기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가 있는 거기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있는 거기이며

화평케 하는 자가 있는 거기이며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있는 거기이다.

 

또한,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하는 실존 속에 계시며

오늘날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실존 속에 계시며

대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하는 실존 속에 계신다.

오늘날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실존 속에 계시며

대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하는 실존 속에 계신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지식을 따라 만든 교리나 사람의 정의나 공의나 자랑이나

권세를 좇는 곳에는 함께하지 아니하시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선악지식을 좇는 거기에는

함께하지 아니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임금으로 삼는 거기에는 함께하지 아니하시며,

손으로 지은 전이나 거기서 첫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들과는 함께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거기에는 크고, 높고 강하고, 부유한 우상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벌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고 벌레만 보인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벌레 취급을 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