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재
오늘날 영과 생명의 흐름 속에 있지 아니하고
육신의 선악지식을 좇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고대하며 자신들만
있지도 않은 종말에 144,000 인들의 임금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있다.
종말을 말하는 교리나 주장을 에스카톨로지(종말론)라 한다.
도대체 종말론은 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첫 사람이 인간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그가 바라는 선의 최종적 승리를 점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첫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근원과 궁극이라 하셨다.
그런데 에스카톨로지(종말론)는 사람이 그의 선악지식을 따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 할 때의 그 나중(에스카토스)을
종말로 인식한데서 비롯되었다.
처음과 나중의 나중이 종말로 오해되고 거짓된 믿음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이 행하시는 나중의 새 창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나서 세상에 속한 종교인들은 자신들만 구원되는 종말을 고대하며 종말론을 좇는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나' 안에 영의 '나'가 낳아지고
그 둘이 온전한 하나로서 '나의 나 됨'을 이루는 나중의 새로운 시간, 곧 영의 시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
수직적 시간, 하나님의 아들 됨의 시간인 나중의 '카이로스'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육신의 태어나고 죽는 시간인 '크로노스'에서 언젠가 그 '크로노스'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수평적인 시간, 영적인 낮이 오지 아니하는 육신의 시간, 해가 뜨고 지나 흘러가는 인생의 시간인 '크로노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크로노스'에서 살던 사람이 영의 카이로스에서 살게 될 때
육신의 때인 '크로노스'를 '처음(프로토스)'이라 부르고, 영의 때인 '카이로스'를 '나중(에스카토스)'이라 부르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종말을 믿고 그 종말이 올 것을 소망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육신에 속한 그들의 자기 믿음일 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이 아니다.
자기 믿음을 가진 자는 육신의 크로노스가 끝나는 한 시점을 종말로 여기고 그 때에 많은 사람이 멸망당하는 가운데
자신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인간 욕심의 발로 중 이 이상 큰 것이 없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과 하나 된 이들에게 '에스카토스'는 무엇을 말하는가?
'에스카토스'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새롭게 지으시기 시작하시고 마침내 그 일을 마치는 영의 시간이다.
가령 사람의 나이가 100세에 이르렀다 하자.
그가 그를 새롭게 지으시는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크로노스에 속한 육체의 나이로는 100세일지라도
카이로스로는 하루도 맞이하지 못하고 여전히 밤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크로노스의 종말에 큰 이득을 얻기 원하는 이들은 그들의 선악 지식으로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을 부르고 있으나 그들은 카이로스의 한 날 조차 이루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부활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 안으로 들어온다면 비로소 카이로스의 한 날을 맞이하고 그 날에
크로노스(처음)로부터 카이로스(나중)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유월절로 징조 되고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선악지식의 시대가 크로노스다.
첫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크로노스에 갇혀 있다.
누구든지 거기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진리의 시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카이로스가 시작된 것이다.
만약 그가 카이로스 안에서 온전한 둘째 사람인 '나의 나 됨'을 이루었다면 그는 크로노스 시대를 마감한(초월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여기 카이로스에서 그의 부활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을 가진 자는
매일 육신에서 죽고 영으로 살면서 자신의 육신의 크로노스를 초월하게 된다.
그 때에 그가 이루었던 그의 첫 사람의 세상, 곧 그의 옛 하늘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다고 하자.
육신에 속한 어느 한 사람은 여전히 크로노스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선악지식을 좇아 살지만
그와 육신으로는 함께있을 지라도 위로부터 난 영에 속한 사람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옮겨져서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진리로 사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육신의 크로노스에서 영의 카이로스로 옮겨지는 사람마다
그 자신 안에서 큰 소리로 처음 하늘이 떠나가고 땅의 체질이 뜨거운 불이 타는 그 일을 겪는다.
그 일이 일어나는 새 생명의 때를 '에스카토스'(나중)라 하는 것이다.
그 일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과 생명 안에서 맞이하는 '빅뱅'이요 천지개벽이다.
이와 같이 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이는 크로노스의 삶을 초월하고 있다.
비록 그가 땅 위에서 잠시 육신 안에서 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으로 살고 있으면 반드시 그러하다. 종말론의 허무함을 이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의 자기 믿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으로 옮겨온 자는 종말이 사라져버린 새 창조의 때인 영과 진리의 카이로스 안에 있다.
* 종말론의 발단은 창세기 1장 1절이다.
모든 번역 성경들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 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태초가 있었으니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초에'라 번역된 '베레쉬트'는 '태초에'가 아니라 '근원 안에'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근원 안에 하나님이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이다.
즉 하나님은 만물이건 사람이건 그 무엇이건 근원 안에 창조하셨고 근원으로 말미암아 존재되게 하시며
근원 안으로 이끄신다.
근원은 쉬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첫 씨알이다.
번역 성경들에서 시작과 끝으로 번역된 '아르케'와 '텔로스'는 '근원'과 '궁극'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고 궁극이 되신다.
오늘 여기 카이로스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육에서 죽고 영으로 사는 자, 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자에게는
종말이란 없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서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이다.
그러면 하나님 밖에 있는 자는 어떠한가.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잃어진 삶이요 종말의 삶이다.
흑암 중에 유리하는 별과 같고 광풍에 뿌리까지 뽑혀 죽고 또 죽은 나무와 같다.
그러니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종말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다른 무슨 종말이라는 것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종말에 구원되려는 자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갇힌 종말의 무저갱 속에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첫 사람의 종말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종말을 맞이하지 아니하는 한,
영과 진리의 존재로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여 오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한 아버지 안에서 영원한 아들들이 되어 있는 자는 종말론의 헛됨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현혹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