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재
예수가 받은 시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당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험은 시험을 당하는 각 사람에게 강력하고도 당연한 필요로 다가온다.
그러나 시험을 이긴 자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이 세워두신 푯대에서 빗나가며 죄인이 된다.
그러나 시험을 이긴 자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고
시험에 진 자는 사람의 선악지식으로 정당화 되는 의(정의, 공의) 안에 거한다.
'의'라는 말은 같으나 사람의 의를 구하는 자는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며 죄인이 되고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자에게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그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는 자에게는 그 인간의 의는 죄이며 불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것이지 땅에 속한 인간의 정의나 공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빠져들었던 그 선악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예수가 받았던 세 가지 시험이 그것이다.
아담에게 온 시험이나 예수에게 온 시험은 본질적으로 같지만 그 시험의 모양과 성격이 다르다.
아담에게 온 시험은 그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들게 한 것이요,
예수에게 온 시험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세 가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우상이 되라는 것이다.
즉 그 시험은 예수에게 땅에서 육신의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다.
아담이 받은 시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아들이 될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요,
예수가 받은 시험은 구원자로 하여금 구원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시험의 대상이 누구이냐에 따라 그 시험의 성격은 달라진다.
시험을 이긴 자에게는 그 시험은 단련이 되고 있지만 그 시험에 빠져든 자에게는 파멸을 가져온다.
마태 사도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되도록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 안으로 들어가셨다 하였다.
즉 성령이 예수를 광야 안으로 이끄신 것은 그로 시험되도록 함이지 시험에 빠져들게 하려 함이 아니었다.
예수는 시험 당하는 것과 시험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무엇닌지 잘 아셨다.
뱀은 아담을 시험에 빠져들게 하기 위하여 시험하였고 성령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거 되게
하기 위하여 마귀에게 시험되도록 광야 안으로 이끄셨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밤낮 사십일을 금식하시고 그 후에 시장하였다. 그가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으니 물론 육체적으로 시장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배고픔은 오늘날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이들의 육체적 배고픔이 아니다.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이들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배가 고파서 금식하며, 단식하며, 삭발하며,
분신하며, 도를 닦으며 하여간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행한다.
그들의 금식은 세상 것들에 대하여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들에 대하여 배가 고파서 그것들을 얻으려고 금식한다.
금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을 향하여 가난하였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셨다.
예수께서 당하는 배고픔은 하늘을 향해 있었고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의 지배 하에서 당하는 배고픔은
땅을 향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고 계신(호 에르코메노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그들의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 그들은 배를 채우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인 에수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무엇인가에 배고픈 것은 같았다. 그러나 그 배고픔은 달랐다.
마귀는 다른 것을 같게 보이며 또 그것을 선악지식으로 정당화하여 시험한다.
아담은 에덴의 동산에서 생명지식과 선악지식의 다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아담을 모형으로 삼고 자기 믿음으로 육신에 속한 에고비젼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첫째 시험은 무엇인가?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하시오'하였다.
마귀는 왜 예수에게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 하였는가!
마귀는 예수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이스라엘 백성이 알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라 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배(belly)가 신(God)이라 하여 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메시야가 절실했다.
때문에 메시야가 그들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것이 정의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 뱀이 말하는 바이다.
누가 이런 시험을 시험으로 알고 이길 수 있겠는가.
오늘날은 이 시험은 정의와 공의로 칭함을 받으며 여전히 사람을 시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무슨 직책을 가진 이들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사람의 정의에 앞장서면 세상은 그것을 칭찬하며 환호한다. 그러나 경제적 정의든, 사회적 정의든, 종교적 정의든, 정의 앞에 무슨 그럴 듯한 말을 붙이든 그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되는 그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를 모형으로 삼는 이들의 '의'와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이들의 '정의'나 '공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있다.
여기서 거기로 건너갈 수 없고 여기로 건너올 수 없다.
아래에서 나서 아담을 좇는 이들의 정의나 공의는 육신의 이익을 좇는 욕심과 선악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땅에 속해 있다.
우리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이들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과 그의 기쁘신 뜻을 좇아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 속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 생명의 관계성, 거룩의 관계성, 진리의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의다.
그것은 시공에 갇힌 육체에 속한 첫 사람의 선이나 의를 초월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의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하였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으로 살 것이라'한 그 말씀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새로 번역되어 나온 성경들에는 친절하게 '성경에 또는 성서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넘어서 심비에 새겨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그의 입을 통하여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말씀이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경을 들고 시험을 받는 것도 아니요
시험의 때에 뱀의 선악지식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에 기록된 것은 오메가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을 육신의 양식으로 먹느냐 영의 양식으로 먹느냐가 문제다.
빵이든, 떡이든, 밥이든 그것은 육신의 양식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 양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양식의 전부가 아니다.
더 중하고 반드시 먹어야 할 양식이 있으니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과 육이 하나 된 실존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의는 육신의 겉 사람이 나중 되고, 영의 속사람이 처음 되면서
온전한 '나의 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육신의 배고픔에는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겉 사람이 해결할 일이다.
그러나 속사람의 배고픔에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 자가 아니라 영의 양식을 주는 자다.
그렇다고 그가 육신의 양식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에게 '영의 양식'을 주는 자이므로 반드시 그 일을 행하여야 한다.
마귀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반드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생명의 양식 대신
먹고도 죽는 썩는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다.
즉 마귀의 시험은 양식을 뒤바꾸라는 것이다. 선악지식을 좇는 자는 언제나 육신의 양식을 영의 양식 위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마귀는 이 시험에서 예수를 배(belly)를 섬기는 자들과 하나 되게 하려 하였다.
* 둘째 시험은 무엇인가?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 오는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 마귀는 안목의 정욕을 좇아서 오는 시험으로
그를 넘어지게 하려 하였다.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그가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라 왜냐하면 기록된 바 그가 너를 위하여
자기 사자들에게 명하시고 그들은 손으로 너를 들어 올려 너로 네 발을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하였다.
여기에 마귀와 거룩한 성과 거룩한 집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있다.
마귀는 예수를 데리고 거룩한 성 안으로 들어왔고 성전 꼭대기에 그의 아들을 세웠다.
하나님은 성전의 깊은 곳 지성소에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다.
그러나 마귀는 그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밖 가장 높은 곳에 그를 세웠다.
첫 사람은 그의 선악지식으로 높은 것, 큰 것, 강한 것, 부유한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취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낮은 것, 작은 것, 약한 것, 가난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취한다.
마귀는 예수를 성전 높은 곳에 세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전은 징조요 참 성전은 예수 자신인 것을 알지 못했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을 성전이라 하며 스스로 속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높은 곳에 자신들의 우상을 올려놓고 정작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큰 집을 짓고 십자가를 높이 달고 그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그곳을 성전이라 부르며 세상을 향하여 강력한 세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거기에는 낮아지고 작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 진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은 없다.
그 때의 이스라엘은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낮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졌지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높아지고 커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려 하다가 하나님께 매를 맞아 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높은 것, 큰 것, 강한 것, 부유한 것을 좇고 있었다.
마귀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그들의 육신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었다.
마귀는 예수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라' 말했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의 신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뱀이 말하는 전능한 하나님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당신이 그의 아들이면 당신 역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라 한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 사랑으로, 생명으로 거룩으로, 초월로 임하여 계신다.
하나님은 육신의 첫 사람들이 그들의 선악지식으로 만들어낸 신, 곧 무엇이든 행하는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으로 말미암아서 작은 말씀의 씨알로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그가 언제나 큰 자로만 계시면 그것은 전능이 아니라 반능이다.
아래에서 난 육신의 첫 사람이 자기 믿음으로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다.
우상은 위로부터 난 영의 둘째 사람이 믿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말이 같으므로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 시험에 빠져 든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나님이란 말을 썼으나 그 하나님은 육신의 '나' 안에 영의 '나'를 낳으시는 야웨가 아닌 세상 신(뱀 자신)을 말한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뱀의 시험에 빠져든 것은 뱀이 말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아닌 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하나님은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아버지시다.
마귀가 게속하여 말하기를, '왜냐하면, 기록된 바 그가 너를 위하여 자기 사자들에게 명하시고,
그들은 손으로 너를 들어 올려 네가 네 발을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하였다.
마귀는 시편 91편 11- 12 절을 인용했다. 마귀는 예수께서 첫 번째 시험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하자
자기의 심비에 새겨진 진실 된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쓰인 기록을 훔친 선악지식으로 시험했다.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 지 아는 것은 알파요
그것을 생명의 말씀으로 심비에 새기고 나의 나됨을 이루는 것은 오메가다.
누구에게든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심비에 새겨진 생명지식이 되거나 훔쳐온 선악지식이 된다.
마귀가 거룩한 성 안에 있는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세우고 뛰어 내리라 한 것은 그의 선악지식으로 성전이신 예수를
성전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즉 마귀는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치려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글이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서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지 아니하고 성경의 문자대로 살려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마음을 마귀에게 훔침을 당한다.
그 일이 다른 데가 아니라 성전 꼭대기(머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글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마귀에게 훔침 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훔침 당할 때 마다 아멘! 아멘! 하고 있다.
선악지식으로 말씀을 훔친 자들이 사람의 혼을 훔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이다.
마귀는 자기에게 유리한 기록을 성경으로부터 훔쳐서 예수를 시험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의 심비에 기록된 거룩한 생명의 말씀으로 그에게 답하였다.
마귀가 인용한 시편 91편의 문장은 그가 인용한 것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 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속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시인은 지성소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전능자의 능력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다.
말씀을 선악지식으로 가지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러내리는 자는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시험을 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험에 빠진 자를 돌아보실 리도 없거니와 거기서 뛰어 내리는 자마다 거룩한 성의 거룩한 집 꼭대기(머리)에서 마귀에게 속고 만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책에서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거룩한 글을 훔치며 마귀 노릇을 하고 있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려고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땅 아래의 물질 속으로
뛰어내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쓰는 존재 곧 '양의 옷을 입은 이리'안에는 임하여 오지 않는다.
거룩한 성의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려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자는
세상의 왕 마귀다. 뱀이 에덴의 동산에 들어와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보이는 것으로 시험한 것 같이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예수에게 사람의 눈에 보이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라고 시험하고 있다.
예수께 받은 이 시험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호라오)자만이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그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다.
아래에서 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문자대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마귀가 말하는 것이 바로 성경대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그 성경이 가리켜 보이는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진리로 사는 자이다.
어느 누가 성경의 문자대로 살려면 성경을 인용하는 마귀를 좇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어야 하고 또 예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니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잃어진 존재가 되거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아들들의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권능을 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느 임하여 오지 아니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종교의 힘 막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힘에 의지한다.
그러나 그 힘은 마귀의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말하지만 다만 그들 자신을 위한 세상 나라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 세 번째 시험은 무엇인가?
두 번째 시험에도 실패한 마귀는 다시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그 모든 나라와 그것들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엎드려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 하였다.
마귀는 예수를 향한 그의 시험이 계속 실패하고 있음에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다시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그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마귀가 예수의 거룩한 영성에 대항하는 그 나름의 매우 높은 영성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와 함께 높은 산에 있다. 왜 예수는 두 번의 시험을 당하고도 마귀와 함께 매우 높은 산으로 갔는가?
그것은 마귀가 매우 높은 영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를 심판하려 함이다.
그것은 또한 그를 믿는 이들이 그것을 보고 마귀를 알고 이기게 하려 함이다.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자는 자기의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높은 영광의 자리에 까지 이른 후 그것을 움켜쥔다.
그것은 모든 종교의 종주들이 행하는 일이다.
마귀는 그들을 높은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그들에게 경배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심판을 받는다.
그들은 땅에서 높은 영광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그들에겐 하늘의 문도 열리지 않고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그 산 위로 내려오지도 않는다.
그들이 그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산 아래의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하늘의 문이 열리고 또 그들은 새 예루살렘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그 산 위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본다.
또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를 섬긴다.
예수와 마귀가 함께 산에 올라갔으나 예수는 그 산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진리의 산이 되게 하셨고,
마귀는 그 스스로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며 불의(인간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선악지식의 산이 되게 하였다.
마귀는 그 산 위에서 그 자신이 세상의 모든 나라의 왕들의 왕임을 드러내었다.
마귀는 예수에게 '만일 당신이 엎드려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 하였다.
이 제안은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너무도 크고, 강하고, 부유한 선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외에는 아무도 이 선물을 거절한 자가 없다.
첫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마음 속에서 언젠가 이런 엄청난 제안이 자기에게 오기를 고대하며 고대한다.
마귀는 두 번째까지의 시험에서는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왜냐하면 마귀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리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마귀의 아들'이란 명칭보다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존이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은 그가 마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든 '이단'이라 불리든,
하나님 모독자라 불리든, 상관치 아니한다.
그는 마귀가 부르는 그 호칭에 현혹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을 좇는 종교인들은 남들이 자신을 부르는 그 호칭에 민감하다.
만약 누가 그들을 이단이라 부르기만 하여도 그 호칭이 두렵고 떨려서 진리를 잠시 탐색하던 자도 질겁하여
옛 길로 도망친다. 오늘날 마귀가 흔드는 칼은 '이단'이란 정죄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단'이란 말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종교인이다.
그러나 그 칼을 휘두르는 종교인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아무리 '하나님의 모독자(이단)'라 하며 핍박해도 소용이 없자 기어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더니 실상은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를 죽인 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자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는다.
마귀는 높은 산 위에서 아들을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려 하였다.
진리의 길을 버리고 선악의 길을 좇아서 높은 산에 오른 자가 거기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사탄(적대자)의 길이다.
그가 참으로 '산 자'가 되려면 그 불의의 산에서 내려와서 다시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회개란 선악의 길을 걷던 데서 돌이켜서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의 길을 걷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하는 무슨 후회나 반성이나 회한 등은 회개에 이르는 몽학선생은 되어도 회개(메타노이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새 길을 걷는 자만이 회개한 자다.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다. 잘 보라. 사탄도 높은 영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대하며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는 높은 산까지
하나님 아들들과 함께 가고 있다.
그는 그 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넘어뜰리려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그와 함께 지내며
이웃이라, 형제라, 자매라, 어머니라 부르면서 친해졌는가.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자가 사탄으로 드러날 때 단호하게 물리치지 아니하면 우리를 향하여 열리려던
하늘의 문은 닫힌 채로 열리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성은 내려오지 아니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단호하게 '사탄'이라 부르신 적이 있다.
'사탄'이라 불리움을 받은 자가 아! 내가 하나님께 사탄이 되어 있구나 하며 그 길에서 돌이키면
그도 또한 생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내 안에 있고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 하나님을 적대하는 육신의 사탄도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믿음으로 영의 의를 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양의 옷을 입은 사탄은 육신의 정의와 공의를 구한다.
육신의 의를 구하게 하는 그 사탄이, 우리 안에 세상 임금이 되어 있는, 우상 예수다.
그 임금은 이와 같이 높은 산 위에서 예수께 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심판된 세상 임금이 예수의 이름으로 각 사람 안에 들어와서 주인 노릇하고 있다.
그 임금은 이와 같이 높은 산 위에서 예수께 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심판된 세상 임금이 예수의 이름으로 각 사람 안에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고 있다.
예수 이름 안에서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자마다 예수는 세상 임금이 되어 있다.
그 임금이 우리를 양의 옷을 입는 이리가 되게 한다.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되게 하는 왕이 되라 하였다.
그 때에 그는 예수께 심판되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는 그의 짧은 인자의 기도로서 그를 믿는 우리에게 그 세 가지 시험을 이기게 하셨다.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하는 자는 육신의 정욕을 좇아 배(belly)의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해오는 것을 원하는 자는 안목의 정욕을 좇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 이루어지기 원하는 자는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사탄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그를 심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