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재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원죄론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마서 5장이 원죄론의 근거처럼 된 것은 너무도 충격적이며 슬픈 일이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무엇을 말했는지 자세한 것은 필자의 로마서 주해서 '신 됨을 위한 호음'을 살펴보시기 바라며
여기서는 로마서 5장 17절, 18절, 19절이 대상이다.
롬 5" 17 에이 -가르 토 투 헤노스 파라프토마티 호 다나토스 에바실레우센 디아 투 헤노스,
폴로 말론 호이 텐 페리스세이안 테스 카리토스 카이 테스 도레아스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람바논테스,
엔 조에 바실레우스신 디아 투 헤노스 예수 그리스투.
필자번역: 만일 그 한 사람의 그 범죄를 좇아서 그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다스렸다면 그 은혜와 그 의력의
그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그 한 사람, 그 범죄, 그 사망
여기 그 한 사람은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형인 아담이다.
그 범죄는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그의 불신(믿음의 상실)이며
그 사망은 '산 혼의 실존'(레네페쉬 하야)이던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던 데서 땅을 향하여 살게 된
야웨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그가 야웨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은 죽은 아담을 다시 그를 향하여 살도록 긍휼을 베푸신 것이 창세기 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역 성경, 공동 번역, 현대인의 성경도 '에이'(만일)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로마서 5장 17절의 번역에서 '만일'이 빠진 것은 원죄론의 반영이다.
아담은 육신을 좇아 사는 이들의 모형이다.
만일 어느 누구든지 아담을 모형으로 삼고 그의 불신을 좇아 살면 그 사망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데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게 되면
그 은혜와 그 의력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그 사람들은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왕이다.
속사람은 겉사람을 다스리는 왕이요, 속사람은 겉사람과 하나 되는 것(나의 나 됨)을 예언하는 예언자다.
속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 초월을 이룬다.
롬 5" 18 아라 운 호스 디 헤노스 파라프토마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카타크리마,
후토스 카이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키이 오신 조에스
필자번역 :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한 범죄를 통하여 정죄에 이르는 것 같이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한 의로움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의에 이른다.
개역성경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을 누리게 누리게 되었습니다.
* 바울의 선포가 원죄론이 되어버린 결정적 오역
바울은 로마서 5장 18절에서 원죄론을 선포했는가? 그 반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개역성경 공동번역 새 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은 18절을 원죄론의 선포처럼 번역했는가?
KjV, NIV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으므로 번역자들이 단순히 그 번역들을 좇을 것인가?
바울은 원죄론을 선포하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원죄론을 발견한 이들은 지혜로운 이들인가! 어리석은 자들인가!
야웨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의 동산으로 이끄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는 생명으로 살라 함이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선악지식으로 살려 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8절에서 믿음을 말하고 있는데 지혜자들은 선악지식인 원죄론을 찾았으니 그들 역시
뱀을 좇아간 아담을 모형으로 삼고자 한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로마서 5장 18절이 어떻게 오해되었는지 살펴보자.
* '에이스'
바울은 18절에서 동사를 일체 쓰지 않았다.
모든 번역자들이 동사가 있는 것처럼 번역한 것은 동사를 활용한 번역이 되지 않으면
그 뜻을 드러내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18절에서 '에이스'란 전치사를 네 번 사용하였다.
에이스의 사전적 의미는 ' 안으로(into), 으로(to), 향하여 (toward, unto), 대항하여(opposed to, against) 등이다.
바울이 동사를 쓰는 대신 '에이스'란 전치사를 두 개씩 짝을 지어 쓴 것은
문장을 간명하게 하여
그의 선포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자들은 그것을 원죄론의 선포로 잘못 알았다.
* '디 헤노스 파라프토마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한 범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범죄는' 아담을 모형으로 삼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화해를 받지 않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책망하시는 죄이다.
그 죄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
누구든지 아담을 모형으로 삼으면 그에게서 불신(믿음의 상실)이 일어나고 그 불신이 '정죄 안으로' 이끈다.
마찬가지로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한 의로움을 통하여' 이다.
'모든 사람을 향해 있는 한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이다.
죄가 모든 사람을 향해 있듯이 의로움 또한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으면 믿음이 그에게서 일어나고 그 믿음이 '생명을 얻는 의롭게 하심 안으로'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이끈다.
'디카이오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로움'이요. '디카이오신'은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로움에 이르는 '의의 삶'인 것이다.
개역 성경, 공동 번역, 새 번역, 현대인의 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는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가 제외죈 것은 물론이요 아에 믿음의 본질이 사라져 있다.
그 번역을 문면으로 좇아서 보면 모든 사람은 믿음 없이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받을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도 없는 것처럼 번역되었다.
*'판타스 안드로푸스'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된 여러 번역들을 살펴볼 때 아담의 원죄로 정죄함에 이른 모든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으로 구원된 모든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인가?
만약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모든 사람들과 저 모든 사람들로 나뉘었으니 모두는 모두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만약 같은 사람들이라면 개역 성경이나 공동 번역, 새 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 KjV 나 NIV
그리고 예루살렘 바이블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아담을 모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되지 않았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었고 여전히 그 일은 계속되고 있으니
모두가 정죄된 것도 구원된 것도 아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아담도 예수도 모든 사람의 모형이 되어 있는데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모든 사람은 정죄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는 모든 사람은 의로움에 이른다 함이다.
그러므로 18절은 19절의 전제가 되어 있다.
롬 5" 19 호르페르- 가르 디아 테스 파라코에스 투 헤노스 안드로푸 하마르톨로이 카데스타데산 호이 플로이,
후토스 카이 디아 테스 휘파코에스 투 헤노스 투 헤노스 디카이오이 카타스타데손 타이 호이 플로이.
필자 번역: 왜냐하면 그 한 사람의 그 불순종을 통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이 된 것 같이
그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역 번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파라코에( 그 불순종)와 휘파코에( 그 순종)
'파라코에'는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좇지 않음이요, '휘파코에'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음이다.
믿음은 듣고 좇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좇지 않은 아담의 그 불순종을 좇아 죄인들이 된 것 같이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좇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종을 좇아 의롭게 되고 있다.
18절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담을 모형으로 삼은 자와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은 자들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담의 불순종이 유전되어 많은 사람들을 죄인 되게 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도 유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행야 동일한 원리일 것이다.
원죄론자들도 아담의 불순종은 강력하여 유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미약하여 유전되지 않는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창세기 1장 27절의 아담과 2장 7절의 아담을 동일한 사람으로 오해하였고
또 영원히 살 자로 오해하였다.
에덴의 동산으로 들어온 '레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사람들의 계보 가운데서 처음으로 '산 혼의 실존'이 된 그 첫 사람이다. 그런즉 원죄론은 창세기 2장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사람의 창조
곧 사람의 거듭남을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람이 위로부터 나는 그 일을 말하고 있다.
처음 땅이 거듭나서 '땅의 땅 됨'을 이룬 것 같이 그 땅이 징조하고 있는 사람도 거듭나서 '나의 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