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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은 하나님 아들의 길을 걷고 있는가

                                         

                                            조도재

 

 

 

2. 바라는 믿음이냐 바라지는 믿음이냐

 

기록된 바, '믿음은 바라지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책망이라' (히 11' 1)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오역하였다.

이 오역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빗나가게 하고 있다.

즉 이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바라지는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믿는 믿음 ( 자기 믿음)으로 살게 하고 있다.

 

첫 사람은 누구든지 육신의 부모에게서 낳아진 생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길을 좇아서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자기 믿음으로 산다.

그렇지 않은 자 아무도 없다.

때문에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또한 자기 믿음으로 그에게 오고 있다.

그런즉 영이신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육신 가운데서 자신이 바라는 믿음으로부터 영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바라지는 믿음으로 유월해야 한다.

바라지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다. 

이 일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은 믿음의 푯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이룬다.

그러나 그 믿음은 땅에 속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자신에게 이루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믿음 

곧 바래지는 믿음을 가진 자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처음의 바라는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나중의 바래지는 믿음으로 유월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 곧 '나의 나됨'을 이루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푯대에서 벗어난 것이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바라는 믿음을 가진 자는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길을 걷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적인 푯대에서 벗어나 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푯대로 주셨기 때문에 그 일을 믿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어느 누가 비록 오래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왔으지라도

자기 믿음으로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길을 걷고 있다면 땅의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을 가진 종교인이다.

만약 어느 누가 잘못 알고 세상에 속한 종교인의 길을 걷고 있다면 아무리 그 종교의 교리가 심오하다 할지라도

거기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아들의 길로 옮겨오는 믿음의 대전환을 맞이해야 한다.

우리의 회개는 영의 생각을 따라 영의 길을 걷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믿음이

자기가 바라는 믿음인지

하나님의 약속이 바라지는 믿음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나님께 구원된 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다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에게 화를 자초하는 강력한 자기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종주들이 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 중의 하나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자신들의 길을 걸으며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 있으나

많은 종교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 부르며 그들을 좇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벗어나 자신들의 육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며 그것을 강요하며

그들을 죄의 종들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의 종들로 삼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러면 그 종주들이 종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들은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 예수의 말씀을 읽고 있다.

기록된 바,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 17) 

율법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되는 것이요 

사람이 불완전한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종주들은 율법을 그들의 탐심을 이루는 종교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종주들이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과 주일(안식일) 성수다.

두 가지 다 그림자인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들을 귀로 듣고 그 말씀 안에 거하면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되어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들어도 듣지 못하니 율법이 무엇인지 유앙겔리온(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기록된 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마: 15: 14) 하였다.

자칭 율법 선생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종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들과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는 종은 누구든지 자신의 일한 대가로 육신의 보상을 바라는 기복신앙의 자기 믿음으로 

육과 생존의 때인 크로노스의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영과 진리 안에서 '신 됨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속에서 육신의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랑의 계명을 사랑의 권세가 되게 하는 

카이로스의 존재가 되어 있다.

육신의 때인 크로노스는 영의 때인 카이로스를 위하여 있고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를 온전케 한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카이로스의 존재는 크로노스의 존재로 돌아갈 수 없다.

기록된 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하여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 11) 함과 같다.

즉 율법은 영과 진리에 대하여 어린아이의 때의 것이요,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은 영과 진리 안에서

장성한 자(자유자)의 것이다. 장성한 자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영과 진리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와 하나 되는 영광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육신의 소유는 무거운 짐이다. 

기복신앙은 그 무거운 짐을 복으로 받는 첫 사람의 자기 믿음이다.

또 사람이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시공 초월의 생명의 법 안에서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거룩 속에서

거룩하게 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헛된 수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28) 하였다.

물질의 십일조와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내린 네피림들이 되었다.

또한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 부르며 그들을 좇는 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의 길에서 벗어났다.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식의 대전환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며 우리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