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재
각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됨 곧 '나의 나 됨'이다.
'나의 나 됨'은 남을 탓하는 선악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걷는 대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남을 탓하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부터는 먹지 말라 하셨다.
원죄론을 누가 무슨 말로 항변한다 할지라도 뱀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다.
첫 창조에 속한 첫 사람은 누구나 육신에 갇혀서 아담처럼 자기 욕심을 좇아서 선악지식의 길을 걷는다.
아담은 '레네페쉬 하야'가 되었음에도 사랑의 하나님을 닮으려 하지 않고 선악지식을 좇아서 하나님처럼 되려 하였다.
첫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좇아서 육신의 길을 걷고 있으므로 모두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악지식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의 죄의 길에서 또 다른 죄의 길로 들어섰을 뿐이다.
아담은 동산 밖에서 세상의 선악의 길을 걷다가 에덴의 동산에 들어와서도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자신의 헛된 생각을 좇아 하나님처럼 되는 선악의 길을 가고자 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육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는 첫 사람의 창조물이다.
원죄론 자들은 아담을 비난하지만 그들 역시 육신의 생각을 따라 육신의 길을 걷는 자의 모형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6절과 17절에서 그 일을 말하려는데 선악지식을 좇는 이들은 엉뚱하게도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줄 오해하고 오실 자의 모형이라 번역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그는 거기서 원죄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의 모형으로 삼는 두 사람을 말했다.
첫 사람 아담을 모형으로 삼는 자는 불신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삼는 자는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른다는 선언이다.
그는 전혀 원죄론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악지식을 좇는 이들은 로마서 5당을 원죄론의 근원으로 삼았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이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원죄론을 부정해 오고 있다.
필자가 아무리 원죄론을 부정하며 그것은 마땅히 철폐되어야 한다고 말할지라도
번역 성경들이 로마서 5장을 원죄론의 근원처럼 번역하였기 때문에
5장 전문을 다시 번역하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죄론을 의심하는 분은 5장을 자세히 살펴주기 바란다.
*
우리는 왜 원죄론의 사슬을 끊어버려야 하는가!
우리가 원죄론의 사슬에 매여 있는 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게 하실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원죄론의 헛됨과 거짓됨에 대하여 듣고도 말하기를 그런들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원죄로 죄인 되었거나 우리 자신의 죄로 죄인 되었거나 죄인 되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한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매우 달관한 자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원죄론에 길들여져 있다는 말이며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며 예수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야담의 죄가 유전되어 죄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죄로 죄인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들에게는 죄인이라는 것이나 의인이라는 것은 실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명칭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죄로 죄인 되는 것과 자신의 죄로 죄인 되는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의 나됨'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다만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 가려 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욕심이요 선악지식이다.
이제 우리는 아담의 원죄로 사람들이 죄인 되었다는 것을 믿기 전에
왜 아담은 원죄 없이 죄를 지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원죄 없이 아담이 죄인 되었다면 다른 사람 역시 원죄 없이 죄를 짓는 것이다.
육신의 첫 사람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영의 둘째 사람을 이루는 그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만약 어느 누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영의 둘째 사람 되는 것을 그의 푯대로 삼고 있지 않다면
그가 믿는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일 뿐이다.
그것 또한 푯대에서 빗나간 것이니 죄이다.
사람들이 원죄론에 대하여 처음 들을 때에는 그것이 어쩐지 부당하고 억울한 일처럼 여겨져서
왜 그런지 잠시 물어보다가도 교권의 권세에 눌려 그 원죄를 뒤집어쓰고 원죄 뒤에 숨는다.
그리고는 그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담의 원죄에 그 탓을 돌린다.
원죄를 뒤집어 쓴 자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아니한다.
그런즉 영의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더 더욱 믿거나 소망하지 아니한다.
다만 자신의 죄가 사해졌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좋아서 교주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
에클레시아와 교회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 불리우는 곳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와 비방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속해 있는 이들은 전혀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비록 관심을 둔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처럼 자찬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어떤 이들은 교회가 회개하여야 한다며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교회'라 번역된 '에클레시아'가 자신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란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불러냄을 받은 (에크 칼레오) 각 사람이 실존이며
그 실존들의 영적 관계성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는 십자가를 높이 달은 큰 건물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조직과 거기에 모이는 돈과
그들의 활동이다. 그 교회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마음도 없다.
그 교회가 변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만 그 교회가 변할 리 없다.
사람들은 도리어 그 변하지 않는 교회 뒤에 숨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불의한 일을 할 뿐이다.
그러면 누가 변해야 하는가!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새롭게 지어져야 한다.
모든 종교개혁은 여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새롭게 지어지지 아니하고 남을 개혁하려 한다.
변해야 할 자는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이며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변화되어야 할 자가 무엇을 개혁한다고 하나님 대신 나서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욕심과 선악지식의 발로일 뿐이다.
'에클레시아'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불러냄을 받은 나의 실존이요, 너의 실존이요,
그의 실존이요, 그녀의 실존이요, 우리의 실존이요, 너희의 실존이요, 그들의 실존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마음도 없는 곳을 개혁하겠다 하며 정작 변해야 할 자신은 버려둔다.
그들 각 사람은 야웨 하나님께 지어지는 '나의 나 됨'을 알지도 못한다.
필자가 어느 누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즉각적으로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묻는다.
이와 같이 '에클레시아'는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다니는 곳이 되어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되는 것을 구원으로 알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구원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답답한 마음에 '아직도 다니고 있습니까' 묻곤 한다.
*
원죄론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담은 나와 상관없이 죄를 지었고 또 그 죄는 나와 상관없이 내게 유전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상관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라고 전파하는 교회에 다니며 이 땅에서 복 받고 천국가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 선악지식인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떤 유명한 설교자는 우리의 형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사하였으니
그 동생들은 복 받고 잘 살다가 천국가면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말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의 형제들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는 예수의 형제가 아니라 양의 옷을 입은 이라일 뿐이다.
심판의 부활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왜 그렇게 외쳤느냐'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복을 좋아하는
사람을 당신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필자가 원죄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아무 소용없고 다만 해만 끼치는
선악지식이니 마땅히 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기독교는 원죄론을 큰 교리로 가지고 있는데 이단으로 취급 받지 않겠습니까? 말한다.
그 때에 필자는 그에게 '아직도 애플을 계속 먹고 있는가!' 말하곤 한다.
애플이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알 것이다.
선악지식은 이와 같이 인간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어떤 이는 그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라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아버지이지
사람들을 종교인들이 되게 하시는 종주가 아니다.
어떠한 종교일지라도 인간의 선악지식의 산물이다. 유대교든, 기독교든, 카톨릭이든, 개신교이든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악교리로 가진 이들이 만들어 낸 땅의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의 길로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들은 분명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땅에 속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에 속한 자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나의 나 됨'을 이루려 하는 첫 사람의 몸짓이다.
누구든지 첫 사람에게는 그 몸짓이 필요하고 또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 몸짓을 멈추고 믿음으로 영과 생명 안으로 들어와서
야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아지고 길러지고 온전함을 이루는 새로운 '나의 나 됨'을 이루게 하신다.
선악지식은 육신의 욕심을 좇는 자의 지식이다. 그 지식은 육신의 때에나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든지 새 창조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찢어져야 할 육신의 휘장이다.
아담은 찢어져야 할 그 육신의 휘장 안에서 살고자 하였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다.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는 자는 종교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유월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때문에 우리를 에클레시아(불러냄을 받은 자0가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