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죄란 무엇인가?

                                                                               글  조도재  

 

 

 

 

히브리어 '히타'이든지 헬라어 '하마르티아'이든지 죄는 '푯대에서 빗나감'이다.

그러면 사람은 무슨 푯대에서 빗나갔기에 모두 죄인이 되었는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고 또 그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 하셨다.

그것이 창세기 1장 2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이로운 예정이다.

 

하나님은 그가 모든 사람의 그 육신의 '나' 안에 낳아주시는

그 영의 '나'로 말미암아 '나의 나 됨'을 이루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예정의 푯대이며 거기서 빗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 죄인이다.

아담은 원죄 없이 그 푯대에서 빗나갔다. 그런즉 모든 사람이 원죄 없이 푯대에서 빗나갔다.

그의 죄가 무엇이기에 유전에 유전을 거듭하겠는가.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에서 분명히 사람이 그의 모양과 같이 되는 것을 사람들의 푯대로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의 '크로노스'에서 영의 '카이로스'로 옮겨오지 않는 한 예외없이 그 푯대에서 빗나가고 있다.

 

창세기 3장에 드러난 아담의 죄는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아내가 주는 대로 먹은 것을 죄로 알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의 죄라기보다 그의 죄가 일으킨 결과이다.

그러면 그의 근원적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불신, 곧 그의 믿음의 상실이다.

그가 뱀의 유혹 앞에서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야웨 하나님이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실과를 아내가

주는 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다.

불신 또는 믿음의 상실이 아담의 죄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은 결과요,

그 결과는 또 원인이 되어 사망을 낳았다. 

불신이나 믿음의 상실이 유전한다는 것은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만약 불신이 유전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원죄 없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면

원죄가 유전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아담이 믿음을 상실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즉 야웨 하나님이 그에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가 먹는데 좋고, 보는데 탐스러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흠모되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지 육신의 정욕은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안목의 정욕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이생의 자랑은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원죄로 인하여 그것들이 유전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슬픈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사람이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소욕, 곧 육신의 생각을 좇아 육신의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의 푯대에서 빗나간 죄다.

아담에게 탐심으로 인하여 믿음의 상실이 왔고

그로 인하여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면 

그 실과를 따 먹기 전에 아담에게 온 탐심은 누구에게서 유전된 것인가.

그 탐심은 어느 누구에게서 유전된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아담이 원죄 없이도 죄를 범했다면 그의 후손들 역시 원죄 없이 자신들의 탐심을 좇아서 죄를 짓는 것이다.

아담은 그의 탐심을 좇아서 먹지 말라 한 것을 먹고, 먹으라 한 것은 먹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담처럼 믿으라 한 말씀은 믿지 않고 믿지 말라한 선악지식은 믿는다. 그것이 죄다.

 

그러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사람의 생존의 에너지이다. 육신의 첫 사람은 그 에너지로 산다.

그러나 첫 사람이 언제까지나 그 에너지로 사는 한 하나님의 푯대에서 빗나가고 있으며 빗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그와 같이 창조하셨으니 사람은 빗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육신의 첫 사람이 있고 영의 둘째 사람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서 생명의 길로 들어오지 아니하는 한 사람은 예외 없이 빗나가고 있다.

그래서 첫 창조와 새 창조가 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도록 하나님은 버려두시는가!

그것은 사람이 자기가 심은대로 거두는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올 때까지 기다리시려 함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것을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양으로 지어지려 할 때에만 그에게로 온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첫 사람의 때를 사는 에너지요, 둘째 사람으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 선생이다.

누구든지 첫 사람의 때를 살아보지 않고는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죄를 인식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아니한다.

첫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나의 나 됨'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푯대에서 빗나간 것이어서 그는 결국 길을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만다.

그가 길을 잃고 좌절하는 그 때에 그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나를 새롭게 지으소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은혜이다.

아무도 죄를 인식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올 수 없고 그 죄를 인식하는 자라야 회개를 통하여

부드러운 마음의 존재인 '아파르'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 된 그 알파의 길에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오메가의 길로 옮겨와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이 아담의 원죄로 죄인 되었다고 듣고 믿고 있으므로

죄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기가 왜 푯대에서 빗나간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의 푯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그 푯대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는 다만 전통이 되어버린 종교적 교리 안에 갇혀서

거기서 맴돌 뿐이다. 그가 죄인 된 그것이 푯대에서 빗나간 것임을 알 때에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

 

원죄론은 모든 사람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기에 매우 편리한 수단이다.

그것은 그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지 아니하고 거기에 가둔다. 

원죄론자는 마치 병 주고 약 주면서 그 병에 가두는 자와 같다.

육신의 첫 사람이 영의 둘째 사람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그의 푯대인데, 원죄론은 첫 사람이 알지도 회개할 수도 없는

그 자신의 빗나간 생각과 길에 갇혀 거기서 맴돌며 종교인으로 머물게 한다.

종교인이란 첫 사람의 생각과 길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에 간다는 자기 믿음을 가진 자이다.

거기에서 교주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